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30화 (130/150)

130화 비밀의 한 자락이 드러나다

백정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건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같은 혼란기, 생사대적의 위협, 그런 상황에서 바로 저렇게 평점심을 회복한다는 건 쉽지 않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넋을 놓았을 것이다.

“이제 말하게. 자네 덕분에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어.”

“아닙니다, 회장님.”

“자네가 독대를 신청한 건, 그놈 문제겠지?”

“네, 그렇습니다. 김시혁의 아킬레스건이 될 단서를 찾았습니다.”

“……!”

“전에 회장님 지시로 저희 팀에 합류한 직원이 한 명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김시혁의 선배였었지.”

“왜 보내셨습니까? 삼송생명을 배신한 놈을 말입니다.”

“증오, 김시혁을 향한 증오심이야말로 가장 큰 동기부여를 할 것으로 생각했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그가 이번 건을 찾아냈습니다.”

“뭔가? 충분히 예열했으면 엔진을 움직여 보게.”

둘 다 선수다.

이건호는 대한민국을 들어 올리는 삼송그룹의 주인, 백정태는 공작에 최적화된 경험치 만렙.

먼저 말하기 싫은 것이다. 아무리 여기가 세상에 둘도 없이 안전한 삼송 회장실이지만, 너무 민감한 내용이니까.

“자네 가치는 이미 충분히 증명했어, 풀어놔 봐.”

“예, 회장님. 조문호의 사촌 형이 정신과 의사입니다.”

“계속하게.”

“요즘 세상은 인터넷이라는 것으로 소통합니다. 벌써 우리 같은 세대는 뒷전으로 밀릴 정도로. 그런데, 이 친구가 꽤 컴퓨터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뒤늦게 각성한 편에 듭니다.”

“오늘따라 예열 시간이 길군.”

“네, 조문호가 찾았습니다. 재미 삼아 사촌 형의 아이디로 병원 내 검진 시스템에 접속한 모양인데, 거기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

“김시혁의 친부모, 그를 공원 화장실에 유기하고 도망쳤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말입니다.”

“재미있는 얘길세. 조금 전까지 약간 짜증이 났는데, 더 듣고 싶어졌어.”

“네, 회장님. 부친은 고 이효수, 모친은 박혜선으로 밝혀졌습니다.”

“고 이효수? 망자란 말인데… 설마 내가 기억하는 그 이효수는 아니겠지?”

“맞을 겁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이효수, 그가 김시혁의 친부입니다.”

“허어! 왜 그놈이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되네. 과연 씨가 달랐던 거야… 그런데 왜 그놈은, 그렇게 비참히 버려진 건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세기의 천재 이효수 박사.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대 화학과를 다니던 중 물리학에 눈을 뜨고 전과를 희망했으나, 화학과는 공대였고 물리학과는 문리과 대학으로 규정상 불가능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택한 미국 유학이후 실로 눈부신 학문적 업적을 낸 자랑스런 한국인.

한국 역사상 최고의 천재 과학자라 아니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음모설이 무성했다.

박장희 대통령 시절, 핵 개발을 추진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거의 개발 막바지까지 왔었다. 그러나 전도환이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뒤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제일 먼저 이를 폐기했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버린 것이다. 이 결정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북한에게 잉어꼬리 잡힐 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미국이나 서방이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용인할지 말지는 차치하더라도, 너무 허무하게 히든카드를 버린 것이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당시 박장희 정권은 모자라는 핵 기술을 취득하려고 전 세계의 한국인 인재를 대상으로 포섭 공작을 펼쳤다. 비록 이효수 박사가 핵 개발과 관련이 없는 순수 물리학 분야에 있었지만, 세계적인 거장 반열.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그의 명성만으로도 귀국을 결심할 인재들이 넘칠 것이라고 정부는 판단했다.

하지만 이효수 박사는 박장희 정권의 회유에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부정선거와 인권 탄압 그리고 박장희 독재 정권에 지독한 거부감을 가진 이효수 박사.

단칼에 거절했다. 회유 차 접근한 한국 특사에게 다시는 말도 꺼내지 못하도록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러나 이효수 박사는 작금의 대한민국 미래가 가슴 아팠다.

운명의 1967년 한국대학교가 과학 대학원 육성을 위해 AID(미국 국제 개발처) 차관 500만 달러를 신청했고, 이의 심사 위원으로 이효수 박사가 한국에 온 적이 있었다.

사건은 그때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잠깐 한국을 방문했던 이효수 박사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 김시혁의 어머니란 말이군.”

“네. 회장님.”

“그런데 이효수 박사는 왜 김시혁의 모친을 버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나? 미국에 돌아간 해가 1967년, 그동안 미국의 제의에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던 한국 국적을 버리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게 이때 아닌가?”

“그렇습니다. 아마 이효수 박사는 김시혁의 모친 박혜선이 임신을 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겁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왜?”

“안기부의 공작 때문입니다.”

한없는 침묵이 회장실을 감싸 안고 흘러갔다. 얘기를 다 들은 이건호 회장도, 보고를 마친 백정태도 말이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결심한 듯 이건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더 깊숙이, 최대한 팩트에 입각해서, 자네가 할 수 있는 선까지 파 보도록 하게. 나도 별도 라인을 통해 알아보겠네.”

“네, 회장님. 그런데… 김시혁의 모친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옮기게, 우리 삼송 의료원으로. 예를 갖추고, 최고의 의료진과 최고의 시설, 최고의 환경을 조성하도록 하게. 내 원장에게 전화를 해 놓겠네.”

이건호는 깊은 고민 끝에 이런 결정을 했다.

과연 앞으로 김시혁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아니, 앞으로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벌써 삼송그룹은 김시혁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백할머니가 가진 가장 큰 자산, 동방보험의 BW를 승계한 삼송생명과 용인 자연 공원은 그룹의 최정점에 있는 회사들이다. 여기서부터 물줄기가 흘러 삼송그룹의 모든 자회사가 순환 출자로 엮인 것이다.

그런 회사의 30%씩을 김시혁이 가지고 있다면… 해 보나 마나 게임 오버다.

어느 날 김시혁이 들이닥쳐 BW의 권한을 행사하면 삼송생명 30% 주식이 날아간다. 그리고 백할머니에게 광대한 용인 자연 공원 땅을 넘겨받으면서 주었던 30%를 합치면?

이미 김시혁이 삼송그룹의 주인이다. 악 소리도 못한다.

그냥 자리를 비키라면 그날부로 삼송에서 이씨는 짐을 싸야 한다. ‘악’ 소리도 못한다.

왜, 김시혁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토록 지독한 적대감을 드러냈는지 모른다. 왜, 김시혁이 이처럼 집요하게 삼송에 공격적인지도 모른다.

다만, 적으로 삼기에는 너무, 너무… 큰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고맙네, 고생했어. 자네가 어쩌면 우리 그룹을 지킨 최고의 공신이 될지도 모르겠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조문호 사원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흐음… 솔직히 나쁜 놈이야. 삼송생명 건도 그렇지만, 이번 일도 사촌 형의 아이디를 무단 도용해서 병원 검진 기록을 몰래 봤다? 이거이거 진짜 위험한 놈일세.”

“입을 막을까요?”

“…이번 일은 자네 방식으로 처리하지 말게나. 너무 뜨거워.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상황일세. 거기다 공을 세운 것도 맞으니까.”

“네, 그럼?”

“국내에 있으면 여기저기 떠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겠지? 그런 놈은 멀리 떼 놓는 것이 더 좋겠어. 야무진 사람을 둘 정도 붙여서 미국 지사로 보내게.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알겠나?”

“네. 회장님. 그런데 하필이면 미국으로 보내는 겁니까? 혹여 김시혁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수습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김시혁은 그런 쥐새끼가 감히 범접할 위치에 있지 않아. 그림자도 보기 힘들걸? 그리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일세. 그리 하게나.”

“이학소 실장님에게는?”

“쉿! 이 사안은 오직 자네와 나 이외에는 몰라야 해. 조문호는 대리 승진 발령을 내겠네. 참, 그리고 자네도 이 순간부로 부장일세.”

“……!”

“비서실 내에 특수 경영 지원부 자리를 만들어 놓지. 이학소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어. 자네가 원하면 언제든 이 방에 들어와도 좋아. 자네는 오직 내 명령만 수행하는 거야.”

“너무 과분합니다, 회장님!”

“아냐, 눈들이 있어서 임원까지 올리지 못할 뿐, 자네는 충분히 그 값어치를 증명했어. 자네는 자금도 무제한으로 영수증 없이 사용해도 좋네.”

백정태의 눈이 돌아갔다.

김시혁에게 이를 갈았지만, 그 덕분에 삼송그룹의 핵심 부서장으로 점핑 했다. 돈도 원 없이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

한 방에 인생 역전이다.

* * *

“시혁아, 곧 미국이다.”

“네. 삼촌.”

“이젠 미국 영내로 들어오면 공군 전투기의 경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구나.”

“그럴 수밖에요. 미국의 국익에도 엄청난 도움이 되니까요. 유럽을 미국이 장악하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마무시한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응, 하긴 그렇다. 이젠 과거와 위상이 완전 달라졌다.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들일 때가 생각나는구나.”

“에이… 삼촌은 한 번씩 센티해져요. 아직 늦지 않았는데, 제가 숙모님을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아서라, 이놈아. 네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클클클.”

“저는 아직 젊다고요. 삼촌처럼 석양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차! 말을 던지고 보니 더 센티해지는 말이네.

그러나 공사홍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겐 이미 자식 같은 시혁이 있었다. 석양이면 어떠랴? 낙조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참, 너… 쉽지 않은 말이다만…….”

“하세요. 삼촌과 제가 무슨 말 못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망설이세요?”

“…친부모 생각은 전혀 안 드니? 찾으려고 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

“사람은 누구나 피에 끌리는 거, 이건 인지상정이야. 너를 낳아 준 부모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있다면 빨리 털어 버려라. 사람마다 아픈 사연은 있는 법이다.”

거꾸로 시혁이 센티해지고 말았다.

시차가 바뀌면서 해가 지고 있는 뉴욕의 앞바다, 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시혁.

왜 보고 싶지 않을까? 왜 낳았냐고, 왜 버렸냐고, 왜 그동안 한번도 찾지 않았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시혁은 상념을 떨쳐 내듯 머리를 흔들었다.

“삼촌, 저에게는 이미 아버지가 있잖아요?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으로 길러 주신 우리 아버지. 누구도 그분만큼 고귀하고, 그분만큼 더 사랑을 주실 순 없을 겁니다.”

“그러냐? 하긴 그렇구나. 보고 싶네, 스님.”

* * *

한편 한국의 불광 자비사는 요즘 들어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경내가 북적거렸다.

“형님, 저 왔습니다.”

“어허, 이 친구. 요사채 문지방 다 닳겠네.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닌가?”

“별말씀을요. 저도 하는 일 없는 백수 아닙니까?”

“가져왔나?”

“당연하죠. 청와대에 사람을 보내서 많이 얻어 왔습니다.”

“저번처럼 맛이 변한 건 아니겠지?”

“웬걸요. 처음 만들었던 쉐프에게 특별히 당부한걸요.”

“들어와. 제수씨도 어여 들어오세요.”

요사채로 거침없이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사람은… 노태후와 김옥순 여사였다.

“오늘, 예지는 안 왔나?”

“네, 연수원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래, 고것이 여우는 여우야. 놀 거 다 놀면서도 덜컥 고시에 붙을 줄 누가 알았겠나?”

“네. 제 딸아이지만, 진짜 여시입니다. 그런데 왜 시혁이는 못 홀리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요. 껄껄껄.”

조용히 개다리소반에 찻물을 내리는 스님. 부러진 다리에 얼기설기 붙은 청테이프는 여전하다.

“자네, 얼굴이 어둡구먼.”

“보입니까? 확실히 도력이 높습니다, 형님.”

“뭘… 그 정도야 길거리 관상쟁이도 다 알겠네. 힘들지?”

“네, 조금 그렇습니다. 사정의 칼날이 곧 덮칠 것 같아요.”

“시혁이가 예언을 했다며? 맘 편히 먹으시게. 어차피 받아야 할 밥상 아닌가? 안 먹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도 조금 찝찝합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둘 다 말없이 녹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니다. 노태후는 퇴임하자마자 불광 자비사를 찾았다. 그리곤 스님과 의기투합한 이래 형님, 아우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어디, 실력이 좀 늘었나?”

“며칠 사이에 무슨 실력이 늘겠습니까? 거기서 거기죠.”

“제수씨는요? 마음 단단히 잡수셨어요?”

“예, 아주버님. 근데 오늘부터 예지가 없어서 광 팔 사람이…….”

“어허! 뭔 소리, 고도리는 맞고도 치는 법입니다. 세 명이면 딱 짝이 맞는 거죠. 시작해 볼까요? 흐흐흐.”

불광 자비사에 아무도 모르는 도박 하우스가 개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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