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내 눈으로 꼭 확인해야 한다
“부장, 좀 더 구체적인 자료 없소?”
“회장님, 워낙 오래전 일입니다. 다 폐기되고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사안, 그런데 자료를 폐기했다고?”
“…회장님, 제가 부임하기 한참 전의 일 아닙니까? 그동안 부장이 수없이 바뀌었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그래요? 안기부장 마치고 갈 곳이 안보 실장 아니면 외교부 장관일 텐데. 대통령과 사전에 이야기는 되었습니까?”
“…….”
“이 정부의 2차 개각이 곧 코앞이요. 안기부장 자리를 노리는 작자들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 파다합디다. 퇴직하고 갈 곳은 있으신가?”
“…….”
“연임도 힘들고, 그렇다고 지금 신임받고 있는 외교부 장관을 밀어낼 수도 없고, 주미 대사는 임명된 지 얼마 안 된 대통령의 심복이고… 어디, 사립대학 교수 자리는 있겠네. 그게 쪽팔리면 고향 산청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짓던가.”
“회, 회장님.”
“인사수석이 내 말을 제법 잘 들어요. 우리 삼송 장학생 출신이니까. 민정수석도 마찬가지지. 둘이 힘을 합치면 당신 연임을 밀어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소?”
이건호는 바로 안기부장을 호출했다. 이자의 뒷 주머니로 들어간 돈이 얼만데?
“나는 구체적인 자료를 달라는 게 아니오.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은 거지. 그런데 협조를 못 한다? 당신이 나와 등을 돌리겠다는 소리 아닌가?”
“…아닙니다. 제가 회장님께 받은 은혜가 산더미 같은데, 감히 등을 돌리겠습니까?”
“허허허, 정작 협조는 안 하면서 은혜를 운운해?”
난감하다. 이건 대통령의 승인이 없으면 절대 열 수 없는 초특급 파일이다. 아무리 안기부장이라도 접근이 불가능하다. 완전 봉인된 기밀인 것이다.
“그… 파일이 열리면 미국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이건 단순한 국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하하. 내가 CIA 무서워 파일을 열지 못 한다? 그런 거네?”
“…….”
“이거 어쩌지? 나는 CIA와 한판 뜨더라고 꼭 그 파일을 열어 봐야 겠는데?”
“회장님,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제발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흠… 그러니까 결국 내가 청와대를 들어가야 한다는 거네? 그리되면 당신은 영원히, 어떤 공직도 맡지 못한다는 걸 각오하고 하는 말이고… 어쩌면 교수 자리를 주는 학교 찾기도 쉽지 않을 거야, 부장.”
이 정도로 밀어붙이면 안기부장이 아니라 총리도 손을 들기 마련이다. 이건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초야에 묻히는 한이 있어도 그 파일은 열 수 없습니다. 제 권한 밖의 문제입니다.”
“……!”
국가 기밀은 군사기밀과 외교기밀, 첩보기밀로 나뉜다. 또 여기에 등급을 주고 있다. 1급 비밀, 2급 비밀, 3급 비밀 그리고 대외비.
통상 그렇게 알려져 있고, 이를 열람할 수 있는 비밀 취급 인가도 직급에 따라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열외로 취급받는 절대 비밀이 있으니… 탑 시크리트 위의 봉인된 비밀. 이를 일컬어 ‘절대 비밀’이라고 한다.
이건 오직 대통령밖에는 열어 볼 수 없다.
이상하네. 이건호는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안기부장을 노려보았다. 이 작자가 진짜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자신의 남은 인생을 잡초나 뽑으면서 살려고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대리인도 아닌 이건호가 직접 나서서 협박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이건 폭탄이 맞구나.
안기부장도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밀한 내용을 들여다보지 못한 게 틀림없다.
청와대로 가야겠다. 이 폭탄의 잠금 장치를 해제하려면 그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 * *
“오랜만이오, 이 회장.”
“네. 대통령 각하,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항상 똑같죠. 별일 없으시고?”
“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 캬아, 직이는 말입니다. 벤화(변화)와 핵신(혁신)은 그런 과감한 갤단(결단)이 없으믄 안 되지. 잘했심니다.”
“감사합니다. 삼송그룹은 이제 전자와 반도체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미래의 쌀이 될 반도체를 잘 키워 보겠습니다.”
“음… 내가 그쪽은 잘 모르지만 지원할 거 있으믄 언제든 말하시오. 최대한 도와주리다.”
그리곤 말이 없다. 둘 다 열심히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김양삼은 느닷없이 비서실장을 통해 면담을, 그것도 독대를 요청한 이건호를 마주하고… 찝찝했다.
전경련 초청 행사 때나 5대 그룹 회장단 초청 간담회에서도 별말이 없던 삼송의 이건호였다.
한국의 정치는 결국 빚을 지는 행위다. 국회의원이 왜 기업들에게 잉어꼬리를 잡히는가? 모든 게 돈이거든. 월급이 적지 않다고 하지만, 그걸로 지역구를 관리하고, 쏟아져 들어오는 민원을 해결하고, 온갖 행사를 열 수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뻑하면 국회에서 바카스 원료와 원가를 공개하라고 떠든다. 그러면 의원의 차 트렁크에 사과 상자가 실린다.
아파트 건설 원가를 밝히라고 호통 한번 치면 또 사과 상자가 배달된다.
법인세를 올려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 전경련에서 슬그머니 연락이 온다. 사과 상자는 당연히 실린다.
은행이 과도한 이익을 얻고 있다며 은행장을 국정 감사장에 부르겠다 으름장만 놔도 사과 상자가 날아온다.
그러나 이게 다 빚이다. 먹었으면 나중에 반드시 청탁이 들어온다.
대통령인들… 전국적인 유세에, 각 지역의 조직책 관리에,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곳인가? 이걸 모두 국고에서 보조받는 선거비로? 아니면 자기 주머니에서? 꿈 같은 소리… 다 빚이다.
“대통령 각하, 제가 청이 하나 있습니다.”
“…하시구려, 그 청.”
“이건 지극히 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각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초반부터 씨게(세게) 나오네. 뭐, 먹은 기 있으니까 당연히 청구서가 날아올 줄 알았지만… 오늘 쪼매 다르요? 무시라. 어떤 청을 할고?”
“안기부에 밀봉된 파일 하나를 열람하고 싶습니다.”
“……!”
“복사, 안 합니다. 필사도 안 합니다. 오직 내용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허어! 이 회장, 그건 진짜 민감한 긴데? 내도 절대 비밀 파일을 열라카믄 기록을 남기는 거 몰라요?”
“압니다, 각하. 알기에 이리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또 말이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대통령 집무실을 감싸고 돌았다.
“내일 신문에 난리 나겠네. 이노무 자슥들 즈그 마음대로 써 제낄 끼라. 삼송 회장과 대통령 한 시간 반 독대, 어떤 얘기가 오고 갔을까? 껄껄껄.”
“네. 송구합니다.”
“그래, 어떤 내용이 보고 싶은 긴데요?”
“박장희 대통령 시절, 이효수 박사와 관련된 파일입니다. 거기에 연관된 옛날 중앙정보부의 봉인 파일 말입니다.”
“이효수? 그기 누군데 이 회장이 이토록 애가 닳아서 난린교?”
“한국이 낳은 물리학 분야의 위대한 천재로 알고 있습니다. 실상은 저도 뵌 적이 없는 분입니다.”
“아! 그 이효수 박사! 이제 기억이 나네. 그런데 이 회장과 무신 관계길래?”
“말씀드렸지만, 저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제 주변 사람과 밀접한 사이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꼭 열어서 확인해야겠다?”
“네, 각하. 그렇습니다.”
“이 회장, 문제는 말이요. 절대 비밀 열람은 대통령이 안기부로 직접 가야 합니다. 그냥 지시한다고 열리는 기 아이거든. 우짜꼬? 같이 갈랑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이건호 회장은 김양삼 대통령과 같이 안기부로 향했다. 그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비밀의 열쇠가 삼송을 살릴 수 있다.
어쩌면, 이 비밀을 풀 수 있다면, 지상 최대의 적을 우군으로 만들 수 있다.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단숨에 풀어 버릴 수 있다.
꼭 자신의 두 눈으로 봐야 한다.
그렇게 김양삼 대통령과 이건호 회장은 남산의 안전기획부로 향했다.
* * *
“각하!”
“오! 안기부장, 욕봅니다. 내가 절대 비밀 파일을 볼라카믄 절차가 어찌 되는교?”
“…네, 원래 절차대로 하자면 비서실을 통해 시간을 정하고, 정식으로 요청서를 주시면 안기부의 비밀 취급 인가 심의 위원회에서 의결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 되기 복잡네. 내가 직접 왔잖소? 그라믄 된 기지. 안 그래요?”
“네… 절차는 후 조치하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각하의 뜻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요.”
“법률상 위배되는 기 아이다, 이 말이죠? 맞습니꺼?”
“그렇습니다. 다만, 각하 한 분만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동행하신 이건호 회장님은 비밀 서고에 입장이 불가합니다.”
끝까지 딴지다.
백 퍼센트 이건호의 보복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건호가 마음먹으면 지방대학의 교수도 가기 힘들다.
말은 규정과 법을 들먹이지만, 이렇게까지 결사적으로 이건호에게 감추려는 비밀이 뭘까?
이유는……? 자신들의 치부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공작 중에 뒤가 구린 것들, 또 가장 추악한 것들, 세상에 공개가 되면 안기부가 쑥대밭이 되는 것들만 추려서 봉인한 것일 테니까.
그래서 자신의 남은 삶이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평생 몸 담아 온 조직이 폭파되는 게 더 두려운 것이다.
“부장님, 소신이 지나치면 아집이 되는 겁니다. 나는 각하를 수행해 온 사람입니다. 삼송그룹 회장 이건호가 아니라 오늘은 각하의 수행원 이건호요. 어떤 경우에도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를 홀로 둘 수는 없는 거 아니겠소? 그렇지 않습니까? 각하!”
“하모(아무렴)! 맞는 말이네. 부장, 파일은 내 혼자 볼 끼야. 여기 이건호 회장은 내를 수행해서 옆에 그냥 있을 끼고…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안내하소. 시간 없다.”
더 버티면 항명이다. 대통령이 그리 말한 이상 이건 막을 수 없다. 안기부가 아니라 안기부 할애비라도 비켜서야 한다.
김양삼과 이건호는 안기부의 별실에 들어서기 위해 3개의 문을 지나야 했다. 마지막 문은 은행 금고처럼 원형의 철문,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열 자리의 번호가 필요하다.
한 사람당 각기 2자리씩 번호를 5명이 나눠 가지고 있으며, 서로 누가 번호의 소유자인지 모른다. 오직 안기부장만 이들의 신상 명세를 알고 있었다.
안기 부장도 일일이 전화는 해 주지만 이들도 대통령이 직접 통화를 한 이후에야 자신이 알고 있는 번호를 말해 줄 정도로 철저히 봉인된 절대 비밀.
결국 김양삼이 10개의 번호를 누르자 공기나 통할까 싶은 원형의 철문이 열렸다. 휑한 방 한가운데에는 달랑 책상 하나와 의자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김양삼이 앉고, 안기부장이 오른쪽에 이건호가 왼쪽 옆에 섰다.
그동안 금고 같은 두꺼운 문은 경호원들이 붙잡고 다른 이의 출입을 막았다. 혹시라도 이 문이 닫히면 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대통령만 10개 번호를 모두 알고 있다.
참, 대단한 곳이다.
“안기부장, 별거 없네? 여기 선반에 꽂힌 파일이 전부라요?”
“네, 각하. 저도 처음 들어와 봅니다. 생각 밖으로 많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글나? 하여튼, 저기 50개 파일 중에 이효수 박사와 관련된 박스에 담긴 파일 다 가져오소. 슬슬 내도 긴장이 되네. 하하하.”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안기부장은 전면의 선반으로 향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중앙 정보부 시절부터 지금 안전기획부까지 평생 공작 파트에서 일해 오다가 김양삼 대통령과 동향이라는 점 때문에 발탁된 안기부장.
그도 여기는 들어올 수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박장희 정권이 탄생시킨 중앙정보부 설립이래, 가장 핵심적인 비밀들이 여기 있었다.
하나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면 나라가 뒤집힐 비밀 중의 비밀… 대부분 추악한 진실일 것이다.
“박스는 큰데, 양은 얼마 안 되네. 이 회장.”
“네, 각하.”
“내가 눈이 침침해서 그런데, 이 회장이 한 장씩 넘겨 주소. 깜빡 잊고 돋보기를 안 가져왔네.”
노골적으로 당신이 한 장씩 천천히 보라는 소리다. 이걸로 지난 선거에서 얻어 쓴 자금에 대한 빚은 다 갚았다고 김양삼은 생각했다.
드디어 파일을 마주한 이건호. 그의 손도 은근 떨리긴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