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비밀은 멀리 있지 않다
이건호 회장은 파일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동안 김양삼 대통령은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보기 싫은 것이다.
김양삼인들 궁금하지 않을까?
전면 선반에는 각기 큼지막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김형욱 부장 관련, 김재규 부장 관련, 박장희 각하 관련, 북풍 사건 관련, 간첩단 공작 관련, KAL기 폭파 사건 관련, 5.18 진압 관련…….
그중에 눈에 띄는 이름… 김다중 납치 사건 관련, 김양삼 제거 작전 관련.
이 죽일 놈들이… 그동안 자신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했었단 말이구나. 하아! 지난 세월 이 나라는 어떻게 흘러온 것인가?
그래서 눈을 감아 버린 것이다. 저건 진실이 담긴 파일이 아니다. 추악한 과거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의 성격상 한바탕 칼춤을 추게 될 건 뻔한 일, 차라리 안 보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회장, 다 봤어요?”
“네… 각하, 겨우 퍼즐을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라믄 갑시다. 여기, 구역질이 나서 더 있고 싶지 않소.”
“네, 각하.”
“인자 빚은 퉁치는 거요. 다 갚은 거 맞죠?”
“각하, 빚은 제가 졌습니다. 몇 배를 말씀하셔도 저는 따르겠습니다.”
“그거… 이효수 박사랑 이 회장은 무슨 관계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하여튼 만족했다니 됐소.”
“꼭 오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재삼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제가 겨우 살 길을 찾았습니다.”
김양삼은 미련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방을 나섰다. 은행 금고처럼 두꺼운 철문은 다시 닫혔다.
“안기부장, 여기 비밀번호는 보안이 잘 지켜지는교?”
“네, 각하. 저도 2자릿수를 알고 있는 요원들 신상 명세만 알 뿐, 그들은 저에게도 번호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오직 대통령 각하께만 말씀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제서야 시스템의 안전을 확인한 김양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여기 비치된 더러운 서류 디비러(뒤지러) 오는 대통령이 없으믄 좋겠어. 에이… 토할 것 같아.”
김양삼 대통령의 한숨 뒤에서 이건호 회장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대통령이 나설 때까지 멍한 표정으로.
결국 보고 말았다.
김시혁과 관련된 출생의 비밀을. 아직 몇 가지 부족한 퍼즐, 김시혁이 확실히 맞는 것인지 확인해야겠지만… 거의 일치한다.
이 카드를 어떻게 써야 그의 분노와 알 수 없는 증오를 가라앉힐 수 있을지, 아직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
지금은 좀 더 깊이, 백정태로부터 들어올 정보까지 취합하면 비로소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하나 이렇게까지 했다는 사실에 이건호는 부르르 떨었다.
* * *
백정태는 새로 받은 부장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삼송그룹 비서실 특수 경영 지원 본부 부장이라는 직함 밑에 ‘이사대우’라고 박혀 있었다.
글자 그대로 이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부장이란 뜻이다. 보통은 이사님이라고 불러 준다.
사십 대 초반, 부장 타이틀만 달아도 훌륭한데, 이사라… 그것도 계열사 사장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룹 비서실의 이사.
이만하면 출세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명함을 만지작거릴 때, 웨이터가 문을 열었다. 그런 웨이터의 안내를 받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들어서는 한 사람.
“이거… 잘못 온 건 아닌데,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충성! 대장님, 어서오십시오. 꿈 아닙니다.”
“야! 백정태가 삼송에 스카우트되었단 소문은 들었는데, 여기는… 완전히 격이 다른 곳이잖아?”
청담동의 바 ‘에뜨랑제’는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된다. 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안쪽에는 몇 개의 룸도 있다. 당연히 여기서 술 한잔하려면 상상할 수 없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백정태, 뭐야? 월급쟁이치고는 너무 잘나가잖아? 아무리 삼송 비서실에 있다고 해도, 이건 선을 넘었는데?”
“대장님, 여기 제 명함… 이번에 자리를 옮겼습니다.”
“……!”
군대식 인사와 함께 명함을 받아 든 사람은 입을 떡 벌리고 백정태와 명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부, 부, 부장? 이사 대우? 너… 삼송가의 숨겨진 아들이었냐?”
“하하하. 무슨 그런 소릴 하십니까? 그저 회장님의 총애를 좀 받고 있을 뿐입니다.”
더 놀라 입이 찢어질 것 같다.
“이건호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네가?”
“네, 거기 있잖습니까? 비서실 특수 경영 지원부. 거기는 회장님 명령만 수행하는 곳입니다. 비서실장도 거치지 않습니다.”
“후와! 너 진짜 출세했구나. 대단하다, 백정태… 아니지, 이사 대우 부장님!”
“오늘 야무지게 한잔하시죠. 제가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말해!”
“…….”
“뭘 알고 싶은 거야? 풀코스도 좋고, 비싼 술도 좋지만, 독약은 사양하고 싶거든. 아직 애가 대학을 다니고 있어. 짤리면 마누라한테 아작 난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답다. 바로 백정태가 그냥 술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간파하고 ‘훅’ 들어온다.
“대장님, 독약은 바로 죽지만, 마약은 황홀한 거 아십니까?”
“흐흥, 마약이라… 약은 약이네? 좋지, 중독이 되더라도 마약이라면 사양 안 하지. 시원하게 먹어 줄 테니, 털어놔 봐.”
백정태가 불러낸 사람은 안기부의 송무처장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안기부는 업무의 특성상 수많은 소송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또 정보를 공개하라는 요청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친다.
그 모든 법무 행정을 총괄하는 자리, 송무처장. 하지만 거창한 이름과 달리 요직은 아니다. 한직이다.
하늘회 회원이었던 선배를 대차게 들이받았다가 좌천된 것이다. 둘은 백정태가 정보사 휘하의 특임대에 있을 때 지휘관과 부하의 관계였다.
“대장님, 오래전 일입니다. 이효수 박사 건 아십니까?”
백정태의 입에서 이효수라는 말이 나오자 송무처장은 마시려던 술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직 한 모금도 넘기지 않았다.
“X발… 독약 맞네. 정태야, 너 입 닫아라. 네 명함으로는 감당 안 되는 일이다. 한 방에 골로 가지 않으려면 그 이름, 다시는 꺼내지 마.”
“…….”
“에이… 간만에 재벌 2세들만 온다는 곳에서 한잔 빨아 보나 했더니, 일어나련다.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
뜨겁긴 뜨거웠나 보다. 송무처장은 바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위에 뭐라고 보고할지 고민이다. 하필이면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의 에이스였던 놈이 봉인된 절대 비밀에 접근하려고 하다니.
괜히 왔다. 똥 밟았다.
그러나 송무처장은 문을 열지 못했다.
“대장님, 며칠 전에 우리 회장님이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남산 방문한 거, 아시죠? 왜 가셨을까요?”
“……!”
“아직 대장님도 모르실 겁니다. 이미 파일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습니다. 봉인된 절대 비밀 중에 이효수 박사에 대한 모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너 이 새끼, 죽고 싶냐? 당장 남산 지하실 구경시켜 줘?”
그래도 미동이 없는 백정태. 송무처장은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파일을 대통령과 이건호 회장이 봤다고 치자. 그럴 수 있다. 대통령은 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저런 놈까지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다. 천하의 남산(안기부)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라면, 벌써 북한 빨갱이들이 온 세상에 널렸을 것이다.
송무처장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일단 타격대를 불러 백정태를 남산 지하실에 처넣고, 삼송 이 회장에게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500만 달러가 제 차 트렁크에 실려 있습니다. 모두 일련번호가 다른 100달러짜리로 준비했죠.”
“……!”
“지금 둘째 아드님이 미국 유학 중이시죠? 매달 특활비 꼬불쳐서 유학 비용 보내기 힘들지 않습니까? 아예 사모님이랑 같이 미국에서 사는 건 어떨까요? 수영장 딸린 집과 마이애미 해변, 멋진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새끼, 뇌물을 처먹이려는 거냐? 내가 하늘회에 가입하지 않은 건 군인의 긍지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더러운 주둥이, 또 열면 바로 대갈통에 총알을 박아 주마.”
“대장님, 제가 봉인된 비밀을 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딱 하나만 알면 됩니다.”
“닥쳐! 개자식아. 국가 기밀을 너에게 흘린 이건호도 용서 못 한다. 똑같이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갈아 마실 테다.”
강골이다. 백정태가 군에서 모셨던 지휘관의 성격을 모르고 실수한 것일까? 백정태가 무데뽀로 거금을 들이댄들,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왔을까?
“플로리다 주립대에 유학 중인 아드님,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리는 안기부 송무처장이지만, 진짜 마약 범죄에 대해서는 플로리다가 상당히 엄격하거든요.”
“……!”
“단순 투약이라면 어떻게든 봉합할 수 있겠지만… 글쎄요? 학생들을 상대로 상당한 양을 팔았던 중간책이라는데… 하루라도 빨리 가셔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말과 함께 백정태는 몇 장의 사진을 루이 13세 꼬냑 병 주둥이 위에 올려놓았다. 사진들은 살짝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더니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렸다.
“DEA(미국 마약 단속국)에 있는 친구 놈, 입을 막느라 1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파티를 하더랍니다. 친구도 오래 막을 수 없다고 빨리 수습하라 충고하더군요.”
송무처장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이미 눈이 풀려 버렸다. 그렇게 믿었던 3대 독자 아들이었다.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연극판을 기웃거리길래 차라리 제대로 배우라고 플로리다 주립대 연극 영화과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그랬던 놈이… 껌둥이, 흰둥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홀랑 벗고 흐느적 거리는 사진들. 흐트러진 맥주병과 탁자 위에 보이는 하얀 가루, 빼박이다.
이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된다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심장이 펌핑을 멈출 것이다.
끝장이다. 단란했던 내 가족은 산산조각 난다.
좀비처럼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진 송무처장. 한순간에 얼굴색이 까맣게 변해 버렸다.
“대장님, 누굽니까?”
“…….”
“당시 이효수 박사 공작 팀을 이끌었던 팀장, 이름이 필요합니다.”
“…….”
“제 팀에 같이 있었던 차명진 중사 기억하시죠? 그놈이 미국에 가 있습니다. 아드님이 딴짓 못 하도록 감시하고 있습니다.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시고, 500만 달러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십시오.”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접근하기 쉽지 않아. 여러 관로를 통해 알아보고 연락하마.”
“네, 좋습니다. 500만 달러는 먼저 드리죠. 트렁크에 꽉꽉 채워 드리겠습니다.”
* * *
차명진은 백정태의 수족 같은 부하요, 동료요, 전우였고, 지금은 비서실 대리 신분이다. 백정태의 블러핑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미국에 있었다.
“지랄하네. 참, 처량하다. 백정 형님은 졸지에 이사로 벼락출세했는데 나는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거칠게 담배를 발로 비빈 차명진은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다.
개구리는 올챙이적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개구리다.
차명진은 철들면서부터 백정태의 졸병이었다. 군대에서도 사수와 부사수로, 안기부 블랙이었을 때도 현장 요원과 백업 요원으로, 삼송 비서실도 대리와 사원으로 스카우트됐었다. 나름 승승장구한 셈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는 김시혁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놈에 대한 공작이 번번이 깨졌다. 이젠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거물이 되어 버렸다.
위기감을 느낀 차명진은 백정태에게 도망을 가자고 꼬드겼다. 당시 이건호 회장이 자금 락을 해제해 주는 바람에 100억까지는 마음대로 써도 될 처지, 도피 자금도 넉넉한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백정태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김시혁에게 쏟으며 빈틈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차명진의 가슴속에는 백정태를 향한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개구리는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전에는 한 끗발 차이라고 자위라도 했건만, 지금은 이사와 대리?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으로 가서 저런 약쟁이 따위나 감시하라고?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말이다.
기가 막힌다. 완전히 꼬붕도 못 되는 따까리 신세일세.
차명진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