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음모는 음모를 낳고
차명진은 렌트카 조수석에 놓인 가방에서 작은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안기부 블랙 전용 녹음기, 이건 차명진 본인 게 아니다. 백정태가 목숨보다 소중하게 애지중지하던 것을 맡겨 놓은 것이다.
절대 몸에서 떼어 놓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백정태는 언제든 김시혁에게 자신이 당할 경우를 가정하고 이 녹음기를 차명진에게 맡겼다.
최후에 쓸 조커라면서, 어쩌면 이 녹음기가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것이라면서.
벌써 몇 번이나 들었는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는 내용을 다시 틀었다. 심심한데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녹음기에서 이건호 회장과 백정태의 대화가 또렷이 흘러나왔다.
-회장님, 허락을 득할 일이 있습니다.
-뭔가?
-어디까지 가야 할는지 지침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상당한 무리수가 동원될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끝까지 가자, 백 팀장. 네 생각이 내 생각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뒷감당해 주마. 다만, 확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한 거사는 역사로 남지만, 실패하면 야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도록.
차명진이 듣기에는 약간 애매했다. 딱 꼬집어 ‘김시혁을 죽여라’라는 지시는 없었다.
상당한 무리수? 끝까지 가자? 성공해야 역사다?
아마… 다른 것이 더 있을 것이다.
차명진은 백정태의 치밀한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자신에게 작은 블록을 맡겼지만, 분명히 다른 블록이 또 있을 것이다. 그건 누가 보관하고 있는지 모른다.
차명진은 더 상념에 잠길 수 없었다, 저 또라이 새끼!
“어이, 돈 무브. 이프 유 무브 하면, 유 킬! 언더스탠?”
알아들었기를 바란다. 못 알아 처먹으면 또 땀을 흘려야 하니까. 가뜩이나 짜증이 북받친 차명진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아무리 곰 같은 덩치의 차명진이라도 여기는 미국, 저 애송이에게 접근하는 흑형 두 명도 그에 못지않은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씨익 웃어?
어쭈? 칼도 들고 있네?
클럽에서 멧돼지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응? 돈 무브 했어, 안 했어? 유 무브 하면 유 킬 한다고 했어, 안 했어? 기분도 꿀꿀한데 잘됐다. 검뎅이라 피 색깔도 잘 안 보이고, 패는 맛도 찰지고 잘 됐다고. 이 새끼들아.”
그사이 애송이 약쟁이는 종적을 감췄다. 차명진은 주먹 가득 묻은 피를 꿈틀거리는 놈 옷에 문질러 닦으면서 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제깟 놈이 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라지만.
하아… 나도 이사 되고 싶다고! 나도 무한대로 쓸 수 있는 법카 가지고 싶다고! 나도 사인만 하면 뭉텅이로 현금을 빼고 싶다고!
이건호는 이건호대로, 백정태는 백정태대로 그리고 밑바닥의 차명진까지 나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 * *
“아빠!”
“아이고, 꽃돼지 왔어?”
“씨, 그거 하지 말랬지?”
“꽃돼지가 어때서? 귀엽고 앙증맞기만 하구만.”
“죽는다? 꽃사슴도 아니고 꽃돼지가 뭐냐? 하나밖에 없는 딸래미한테.”
“헤헤헤, 아빠는 그래도 꽃돼지라고 할래. 세상에서 제일 이쁜 내 꽃돼지.”
헤벌쭉 입을 다물지 못하는 권덕용.
전형적인 딸 바보의 모습이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빠, 여기.”
“담부터 가져오지 마, 아빠가 알아서 사 입을 게.”
“뭔 소리? 속옷이랑 양말은 그렇다 쳐. 그 양복은 얼마나 비싼데 그래? 월급도 쥐꼬리… 보다는 많지만, 아껴 써!”
“야, 말 나온 김에 아빠 용돈 좀 올려 주라.”
“시꺼! 아직 빌라 대출 이자도 다 못 갚았거등? 또 자동이체 그만하라고 했지? 또 삼천포 무슨 보육원에 오만 원씩 빠져나가더라?”
“으, 응. 얼마 전에 뉴스 나왔잖냐? 거기가 미인가 시설이라고 정부 지원이 안 된다네. 방송에 나오는 걸 보니까 애들이 너무 꾀죄죄한 게 가슴 아파서 그만… 헤헤헤.”
“아휴! 아빠, 월급의 거의 절반이 기부금으로 나가면, 나중에 내 시집은 보낼 수 있겠어? 걱정이다, 걱정.”
“그거야, 아빠 퇴직금이 있으니까. 빌라를 팔아도 되고.”
“아빠는? 길거리 나앉을래?”
“뭔 소리? 너희 신혼집에 얹혀살면 되지. 밥이야 먹여 주지 않겠냐?”
“그러지 뭐. 그 대신 아빠가 골방 써야 한다? 우리는 안방 쓰고.”
대충 들어 봐도 알겠다. 두 사람의 착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번 주말에도 못 들어와?”
“글쎄? 아직 하던 일이 남아서 자신 못 하겠는데?”
“에이구, 하숙생인지 아빤지 분간이 안 돼. 주말에 나 동창회 가야 하니까 미리 연락 줘. 알았지?”
“그래. 꽃돼지야. 조심해서 들어가. 버스 되도록이면 중간 자리, 문 가까운 곳에 앉도록 하고.”
손을 흔들며 떠나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빠는 종이 봉투에 담긴 정갈한 속옷과 양말 그리고 와이셔츠와 한 벌의 정장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어느새 아빠보다 한 뼘은 더 커버렸네… 자식!
안기부의 블랙을 총괄 지휘하는 11국 2과장 권덕용, 안기부 공작원들의 롤 모델. 그는 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좀 신기한 인물로 통하는 권덕용 과장.
다들 자신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걸 알고 있었다. 권덕용은 한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 나이대에 한국대학교 법대를 나온 사람치고 한 자리 못한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대한민국은 딱 두 개의 대학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한국대와 다른 대학… 그런 한국대에서도 불멸의 일등좌가 법대 아닌가?
아무리 능력이 없다 해도 그런 사람이 아직까지 현장 요원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안기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엘리트였다. 그럼에도 권덕용은 스스로 진급을 마다했다. 억지로 진급을 시키려고 하면 사직서를 꺼내 들었다.
그 이유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두 번 사직서 사건이 있은 후, 이젠 회사에서도 그러려니 하고 만다. 저런 고급 인력이 현장 요원으로 퇴직하는 것도 첫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권덕용의 가슴속에는 깊은 멍울이 남아 있었다. 평생을 사죄해도 갚지 못할 죄악, 그 트라우마 때문에 출세를 마다한 걸… 굳이 알리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직 국가에 충성했다는 명분, 알량한 합리화를 위해 침식을 잊고 일에 매달렸다.
그러면 된 거지… 이것 또한 다 지나간다.
빨리 정년퇴직을 하고 딸과 함께 나머지 노후를 보내고 싶었다.
어느덧 그 꼬물거리던 핏덩이가 결혼할 나이로 변했다. 꽃돼지라 놀렸지만 인형 같은 얼굴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딸.
너무 늘씬해서 탈이지.
178센티미터다. 운동화만 신어도 180에 육박한다. 거의 농구 선수 수준이다.
주위 남자들을 오징어로 만드는 권혜림. 누가 쉽게 접근하리… 하아! 그래서 더 걱정이다. 어떤 놈팽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는데, 다들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부터 친다.
한 번은 억지로 소개팅을 시켰었다. 막상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고 나왔던 친구 아들놈은 내내 딸꾹질만 하다가 끝났단다.
그렇게 예쁜 딸이다.
권덕용의 책상은 온통 딸 사진으로 가득했다. 여실히 보여 주는 딸 바보의 전형, 권덕용 과장.
띠리릭-
“예, 권덕용입니다.”
[권덕용 과장, 나 송무처장이요.]
“네? 아… 안녕하십니까? 처장님.”
[시간 있습니까?]
뭐지? 아무리 같은 안기부라고 해도 송무처에서 나를 찾을 일은… 전혀 없다. 블랙 요원들은 글자 그대로 그림자 조직. 지금 안기부의 부훈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쓰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쓰던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전화를 해 온 송무처장은 외부에 알려진 인물이다. 수많은 안기부의 소송과 법무 행정을 처리하는 곳이다 보니 인터뷰도 심심찮게 하는 사람. 듣기로는 특수부대 지휘관이었다고 들었다. 그것도 정보사령부 출신.
자신과는 하는 일이 완전 다르다. 철저히 음지에서 일하는 권덕용과 양지에 노출된 송무처장. 솔직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죄송하지만, 처장님. 저는 누구를 만나든 위에 보고를 해야 합니다. 지휘 계통을 통해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아요, 권 과장. 내가 부장께는 이미 구두 보고를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 식사 한 끼 같이 합시다.]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제 일이 조금 민감해서 2차장님과 핫라인이 있습니다만.”
[그러시구려. 아마 2차장님께 전화하면 바로 부장님과 연결시킬 겁니다. 확인하세요.]
진짜구나.
직속 상관 11국장이 아니라 해외 공작의 최고 책임자 2차장을 슬쩍 끼워 넣었는데, 바로 안기부장에게 연결할 거라고?
이건 부장의 오더다. 그것도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오더. 그게 아니라면 어떤 공작이라도 2차장과 11국장을 건너뛰지 못 한다.
곧 퇴직인데… 곧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았는데, 말년에 또 무슨 지랄인가? 권덕용은 인상부터 찌뿌렸다.
이런 식의 비공식적인 오더는 백이면 백 모두 뒤가 구린 것들이다. 권력층의 해외 자금? 아니면 대통령 가족들 문제?
설마 예전처럼 김다중을 일본에서 납치한 것이나, 김형옥 전 부장을 파리에서 납치해 닭 모이용 사료 분쇄기로 갈아 버린 것처럼 더러운 공작이 아니길 빌었다.
* * *
“같은 회사에 근무하면서도 처음 뵙습니다, 권 과장님.”
“네, 하는 업무가 너무 다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송무처장님.”
“부장께서 이 식당을 추천하시더군요. 보안이 확실한 곳이라고.”
“저녁 한 끼 먹는 데, 무슨 보안까지 거론하십니까? 저 같은 말단들은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차라리 남대문의 갈치 골목 식당이 더 맛도 있고 좋거든요.”
오밀조밀한 접시에 담긴 갖가지 한정식이 들어왔지만, 둘은 아직 젓가락도 들지 않았다. 밥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저… 오늘 사표가 수리되었습니다. 이제 송무처장이 아닙니다. 자연인으로 돌아 갑니다.”
“……!”
“회사에 500만 달러 현금도 냈습니다. 누가 뇌물로 준 것이죠.”
“……!”
두 번씩 사람을 놀래키는 이 사람. 권덕용은 진짜 깜놀했다. 사표? 뇌물? 자그마치 오백만 달러?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다.
“그 대신 부장께서 명예퇴직으로 처리해 주더군요.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쓰고 옷을 벗지 않게 돼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퇴직금은 많이 받으셨습니까?”
“허허허, 얼마 안 됩니다. 미국에 가면 세탁소는 차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평생 군복을 다렸던 내공이 있으니, 잘되겠죠.”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런 사내라면, 이 정도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비공식 아니라 사적인 부탁을 하더라도.
“권 과장님, 아직까지는 권 과장님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문제일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예……?”
진짜 뜬금없는 소리. 갑자기 왜 자신을 향해 경고를 날리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곳입니다. 어딘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곧 권 과장에게 상당한 압박이 들어올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국가 안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아닙니까? 잘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무슨 일입니까? 솔직히 아둔한 제 머리로는 아직 감을 못 잡겠습니다. 저는 일개 과장입니다. 뜬금없기도 하고요.”
“권 과장님, 담배 있으면 한 개비 주시겠습니까? 겨우겨우 10년을 참았는데, 오늘은 한 모금하고 싶군요.”
권덕용은 송무처장에게 담배를 한 개비 건네주고 불까지 붙여 주었다. 눈처럼 하얀 식탁보에 놓인 음식들이 식어 갔지만 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효수 박사, 그 작전의 망령이 되살아 나고 있습니다.”
“……!”
“왜 지금 죽은 불씨를 헤집는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통령과 동행한 누군가가 파일을 열었던 모양입니다. 그쪽에서는 당시 작전을 담당했던… 그래요, 권 과장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왜……?”
“모르죠, 권 과장 이름을 알려 주는 대가가 500만 달러라면 믿겠습니까? 또 제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어요.”
“개자식, 누굽니까? 제가 비록 퇴물이지만 모조리 쏴 죽이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송무처장. 그런데 왜 저렇게 슬퍼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