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꼼수로라도 먹고 싶다
“형님아!”
“태식아!”
몇 년 만에 보는 동생 이태식. 성큼 자라 버렸다. 난쟁이 똥자루만 하던 놈이 어느새 이리 컸나? 거의 시혁과 눈을 마주 볼 정도였고, 수염까지 뭉실뭉실하다.
이 새끼, 무슬림도 아닌 것이 꼭 도인 같은 모양일세.
남다른 인연이 아닐 수 없는 시혁과 태식. 보육원에서 한 살 터울로 같이 자란 놈이다. 친동생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이런 감정이 아닐까 싶은 놈.
그런데, 이 자식이 대뜸 염장을 질렀다.
“악독한 자본가 라커펠러의 환생, 세기의 승부사, 유로의 주인, 유럽 정복자,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샤일록, 하도 많아서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태식아, 왜 하나같이 좋은 말은 없을까?”
“원래 영웅은 피를 먹고 자란다 안 했습니까?”
“그런데, 악독한 자본가 라커펠러(록펠러)의 환생하고 세계에서 제일 돈 많은 샤일록은… 좀 심했다.”
“형님, 사람들은 원래 시기, 질투를 많이 합니다. 자신들은 가지지 못했으니까. 헤헤헤.”
“그게 아니라, 록펠러는 그렇게 취급받을 사람이 아니거든. 30센트씩 하던 석유값을 5센트로 대폭 인하해서 경쟁자를 다 죽인 것은 맞아.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가격을 올리지 않았어.”
“그렇습니까?”
“샤일록도 마찬가지. 비록 고리대금업자였지만 그는 약속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를 지독한 유태 상인으로 그렸지만, 돈은 그런 거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성공할 수 있는 거야.”
이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샤일록의 행동이 잔인했다지만, 그건 돈을 빌려주면서 한 약속이었다. 오히려 판사로 위장해서 피를 흘리지 말고 살만 베어 가라고 했던 주인공도 마냥 칭찬받을 행동은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면피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이다.
“형님아, 세간의 평은 무시해라. 형님은 구름 위에 살고 있는 신계의 존재니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거다.”
“아니, 네 말을 듣고 보니 조금 반성할 부분도 있네.”
“에이… 너무 상처받지 말라니까. 나니까 그런 소리도 가감 없이 전하는 거지.”
“그래… 너무 세상을 가질 생각만 했다. 그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네. 그렇네.”
태식의 말에서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은 셈이다.
빌런이 되고, 세상의 모든 돈을 가질 거라고 결심했다. 복기를 해 보건대, 30%는 이룬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을 망치면서까지 가질 생각은 아니었다. 하도 세상이 뭐 같아서, 이놈의 빌어먹을 세상 내 맘대로 만들겠다 결심한 것이지… 세상이 불행해지건 말건, 내 욕심만 채우겠다는 건 아니었거든.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라……. 상당히 뼛속 깊이 박히는 화두를 태식에게서 얻었다.
오늘 이 깨달음으로 인해 시혁의 인생이 새롭게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아직 누구도 몰랐다.
“그래, 이제 졸업도 했으니 뭘 할 생각이냐? 뚜렷한 목표가 없으면 형님하고 같이 일해도 좋고.”
“형님, 저는 하는 일이 있습니다.”
“MIT에 남을 셈이냐?”
“아뇨, 저 사업 준비하고 있는데?”
“사어업? 네가? 돈을 벌겠다고? 미친 새끼.”
“형님아, 무시하지 마라. 취직과 동시에 투자도 했다.”
“취지익? 투자아?”
시혁은 정말 놀랐다. 항상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태식이 벌써 취직을 하고, 투자까지 했단다.
“너, 무슨 돈으로? 아니아니, 그것보다 취직했다는 회사가 어디냐?”
“오래전에 스탠퍼드 대학에 교차 수강을 간 적이 있었거든. 거기서 스탠퍼드 출신 선배를 한 사람 만났거든. 그 양반 아이디어가 꽤 괜찮은 것 같아서 졸업하면 같이 사업을 하기로 약속했지. 그 약속을 지키는 중이야.”
“돈은?”
“어? 말 안 했나 보네? 삼촌한테 빌렸는데?”
“공사홍 삼촌?”
“응, 20만 달러.”
“끄응! 뭐 하는 회산데?”
“유통, 그것도 인터넷으로.”
“사무실은 어딘데?”
“응, 그 선배가 아는 사람 차고에 컴퓨터 3대 놓고 시작했다.”
“이런 미친놈!”
“나, 멀쩡해.”
“천하의 MIT를 차석으로 졸업한 놈이, 전공했던 컴공도 아닌 유토옹? 투자까지 했다고? 어떤 사기꾼인지 몰라도 세상 물정 모르는 너를 꼬드겨 한 입 베어 먹은 거지, 병신아.”
시혁은 너무 화가 났다. 보나마나 누가 어설픈 아이디어로 스타트업을 시작한 모양이다. 돈도 없고, 기술도 없지만… 말빨로 순진한 태식을 꼬신 것으로 보인다.
으드득! 어떤 놈인지 만나면……. 시혁은 좀 더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야 죽통을 날려 주지.
“그 차고가 어디 있는데?”
“워싱턴주 시애틀.”
“그… 스타벅스 커피 1호점이 있는 촌 동네?”
“응. 그렇지. 촌 동네는 아니고,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형님아.”
“역사는 개뿔, 캐나다랑 이웃하면서 다 인디언한테 뺏은 땅들이지.”
잔뜩 뒤틀린 감정 탓인지 말이 거칠게 나왔다. 그런데, 태식은 밝게 웃는다.
“맞다, 형님아. 시애틀은 인디언 추장 이름을 딴 거다. 프랭클린 대통령이 땅을 팔라는 편지를 보냈다더라. 그걸 받아 본 인디언 추장님이 그랬단다.”
“뭔 만화 같은 소리야?”
“백인들은 어떻게 저 하늘과 땅의 온기를 사고파는가? 공기와 물은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팔라는 말인가? 우리는 땅이고, 땅은 우리다. 사슴, 말, 큰 독수리, 향기로운 꽃은 우리 형제들이다.”
“어쭈? 갈수록?”
“우리 모두의 신은 하나이고 백인도 인디언도 공통된 운명이니,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배배 꼬인 시혁과 달리 태식은 평온한 표정으로 시를 읊듯 말을 이었다.
“이게 인디언 추장님의 답장이었다. 진짜다. 이거 미국 교과서에 실려 있거든. 이 답장을 받은 프랭클린 대통령이 너무 감동을 먹어서 바로 추장님 이름을, 시의 이름으로 정한 거다… 캬아! 한 편의 동화잖아?”
어쭈? 얼치기로 알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네?
그래도 너를 홀린 사기꾼을 용서할 수는 없어.
“그래, 전설도 좋고, 동화도 좋은데… 너에게 투자를 받은 그 이상한 선배라는 놈 이름은 뭐냐?”
“형님은 잘 모를 거야. 제프 베이저스라고… 형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다. 64년생이거든.”
“……!”
“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야?”
“호, 호, 혹시… 그 차고에 차렸다는 회사 이름이?”
“아마조네스닷컴, 이름이 조금 촌스럽긴 하네. 헤헤헤.”
“X발!”
소가 뒷발로 쥐를 잡는 경우가 있다지만, 이건 쥐가 엉겁결에 한 입 물었는데… 그게 다이아몬드였어?
아마조네스닷컴? 그 회사라고?
“네가 투자한 회사. 아니, 네가 같이 한다는 그 회사가 인터넷으로 책을 파는 회사… 맞냐?”
“…형님아, 내 뒤에 사람 붙였어?”
“맞구나, 진짜 맞았어. 이 꼴통 새끼!”
“…우리 회사는 제프 베이조스 CEO 그리고 인터넷 담당인 나, 또 한 사람은 업무 보조를 보는 직원 달랑 하나, 이게 전부인데? 형님이 어떻게 알아… 요?”
사람의 뇌는 흑백을 좋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보는 건 컬러를 선호하지만 선택을 할 때는 “좋다, 나쁘다.” 또는 “잘했다, 못했다.” 아니면 “이거나, 저거냐?”로 귀결된다.
내가 그랬구나.
그냥 태식의 어릴 때 모습만 기억하는 시혁이 그랬던 것이다. 네가 무슨 사업을? 그 힘든 MIT 컴공과를 졸업했으면 떡하니 나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가던가, 아니면 실리콘 벨리로 갈 것이지… 차고에서 스타트업 놀이를 한다고?
그 새끼, 사기꾼이다…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했던 것이다. 제프 베이조스? 태식이가 완전 지갑을 주웠구나.
그나저나 조금, 아주 쪼오끔 탐이 난다.
아마조네스닷컴은 세계에서 1등과 2등을 반복하며 전 세계 유통을 씹어 먹는 인터넷 공룡, 아니지… 오프라인 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혁명의 아이콘이 된다.
그냥 한마디로 세계에서 제일 비싼 회사가 된다는 말이다.
“너, 삼촌에게 빌린 돈 20만 달러 투자하고, 지분은 얼마 받았냐? 빨랑 말해!”
“10%. 총 200만 달러를 끌어모았거든. 보스 양아버지도 많이 투자해 줬고.”
“네 보스라는 그 대머리, 내가 좀 만날 수 있을까?”
“우리 보스 머리털 없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자꾸 쓸데없는 일 파고들지 말고 자식아, 전화해 봐.”
“아직, 뉴욕에 있을걸? 새로운 투자자와 미팅 때문에 왔거든.”
“빨리 해, 킹왕짱 투자자를 찾았다고… 다 때려치우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오라고… 알았어?”
이상한 일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건 천성인가? 지금 내가 가진 자산이라면 아마조네스가 아무리 큰 기업이 된다 해도 별 관심이 없어야 하는데, 눈이 번쩍 뜨인다.
솔직히 갖고 싶다. 아무리 전 세계 부를 다 쓸어 담는다 해도 눈앞에 커팅 되지 않은 다이아 원석이 있는데 안 먹으면, 두고두고 잠을 설칠 것 같다.
* * *
“겨우 인터넷으로 책을 파는 회사에 불과합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겨우 인터넷으로 책을 파는 회사가 왜 200만 달러로도 부족한 거죠?”
“…….”
“사무실을 지인 집 차고에 차리셨다고요? 실리콘밸리가 멀지도 않은데, 왜 그러셨습니까?”
“처음 하는 사업입니다. 아껴야죠.”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좀 많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말이 겉돈다.
투자자와 미팅을 위해 미국 서부의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뉴욕까지 날아왔던 사람이 시혁의 투자를 거부해?
“솔직한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브라운 리(이태식)의 형입니다. 동생이 일과 투자를 병행했어요. 그런데 정작 회사의 CEO는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군요.”
“무서우니까… 당신이.”
“……!”
이건 또 뭥미?
“마이다스 킴은 맹수 아니오? 내가 쳐다보지도 못할 위치에 있기도 하고… 그래서 당신의 투자를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나는 당신을 절대 이길 수 없으니까요.”
“회사를 강탈당할까 무섭다?”
“그렇소, 브라운 리에게 형이 미국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마이다스 킴 당신일 줄 몰랐소. 이 자리도 몰랐으니 온 겁니다. 알았다면 애초에 거절했을 겁니다.”
그냥 넘길 말이 아니다.
아직 구멍가게만도 못한 스타트업, 어쩌면 K 타워에 입주한 기업들보다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만의 기술이라도 있다. 겨우 비즈니스 모델 하나만으로 창업한 회사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회사 뺏길 것을 두려워한다고?
이걸 두고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허파에 바람 들었다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시혁은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끝도 없이 솟구쳐 오르는 아마조네스닷컴의 위상을.
그렇다면… 이 사내, 제프 베이조스는 확신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운 사업 모델의 미래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인터넷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사업 모델이 황제로 등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약간 찔리지만, 작전을 바꿔야겠다.
“제프, 돈에는 일련번호가 있어요. 알죠?”
“압니다.”
“한번 은행 창구를 나간 돈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수명이 다하지 않는 이상.”
“…중간에 예금을 하면 은행으로 리턴되기도 합니다만.”
“아뇨, 그때는 은행에서 일련번호를 보지 않습니다. 진폐냐 위폐냐만 보죠. 헌 돈, 사용한 돈은 일련번호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킴, 그게 무슨 뜻이오?”
“제게서 나가는 돈에는 일련번호가 찍혀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때, 저는 그 번호를 보지 않습니다. 얼마냐만 봅니다.”
“……?”
“제프, 당신은 일련번호에 신경 쓰지 말고 수익만 내세요. 당신 회사의 돈 한 장 한 장, 일련번호까지 볼 이유가 없으니까.”
“……!”
“그래요, 돈에는 인격이 없습니다. 그 돈을 움직이는 사람의 인격이 돈에 투영되는 거죠. 당신이 내 동생을 버리지 않는 한, 내가 당신을 아프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하죠.”
“의리를 말하는 겁니까?”
“예, 제게는 브라운 리가 아픈 손가락입니다. 제 유일한 형제니까요.”
“…알겠습니다. 그 말이 너무 가슴에 와닿는군요. 마이다스 킴, 당신에 대한 선입견을 너무 안 좋게 가진 것 같습니다.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자금은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드리겠습니다.”
통했나?
어설픈 감성팔이를 했는데, 흐흐흐. 먹혔다.
미안하다, 태식아. 진심도 90%는 섞여 있어, 자식아.
‘아싸! 이제 내꺼!’
그런데… 왜 록펠러와 샤일록이 옆에서 혀를 차는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