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36화 (136/150)

136화 두 번째 꺼풀을 벗은 비밀

“예,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분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것도 밝혀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불법적인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죠?”

“…그건 아니지만, 며칠째 계속 같은 자리에 정차하고 계셔서요.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차에 삼송이라는 굴지의 재벌 회사 비서실, 너무 이질적이라서 말입니다. 하하하.”

“회사 일입니다. 누굴 좀 만나려고 기다리는 겁니다. 경장님께 그 내용까지 미주알고주알 알려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네… 뭐, 신분이 확실하니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부디 조용히 만날 분 만나고 돌아가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이 동네가 좀 유별난 곳이거든요.”

“네, 그러죠.”

송 경장은 두 사람의 신분증을 돌려준 뒤 거수경례까지 붙이고 순찰차에 올라탔다.

“송 경장님, 뭔가 좀 찝찝한 사람들 같아요.”

“조용히 가자, 우리가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

“예……?”

“저 사람들이 작정하면 우리 서장 모가지가 날아간단 말이다. 서장이 아니라 청장도 한칼에 쳐 낼 수 있는 놈들이라고.”

“제기랄, 일개 기업에게 공권력이 쩔쩔매야 하고… 이건 잘못 되지 않았습니까?”

순경의 툴툴거림에도 송 경장은 말없이 백 미러로 뒤를 보고 있었다. 그랜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청량리 588은 온갖 쓰레기들이 모이는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들의 집합소 아닌가? 삼송그룹 같은 곳에서 관심을 기울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

특히 저 차가 정차하고 있는 곳은 윤락가와 조금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저들의 목표는… 백 퍼센트 희망 어린이집. 그리고 권혜림이다.

“야, 잠시 차 좀 세워.”

“왜요? 곧 파출소 도착하는데?”

“그냥, 너 먼저 들어가라. 나는 조금 볼일이 생겼다.”

순찰차가 모퉁이를 돌아서는 것을 확인한 송 경장은 구멍가게 벽에 붙어 있는 빨간색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10원짜리 동전을 밀어 넣었다.

이건 꼭 알려 줘야 한다.

* * *

“이사님, 아까 경찰 행동,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상했던 대로야.”

“……?”

“몇 날 며칠 한자리에 주차된 그랜저를 보고 검문하는 건 당연한 거지.”

“네…….”

“이제 기다리자. 화들짝 놀란 호랑이가 풀숲에서 뛰쳐나올 때까지.”

“예?”

“그런 게 있어. 너는 저기 구름다리 건너서 음료수나 사 와라. 무슨 동네에 상점 하나 없네.”

백정태는 느긋했다.

송무처장 포섭은 실패했다. 막대한 돈, 500만 달러를 현금으로 안겨 주고, 아들의 약점까지 들이밀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강골이라도 넘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허 참! 어쭙잖은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500만 달러 현금은 바로 안기부장 책상으로 직행했다. 거기다 미국에서 약쟁이 아들을 감시하던 차명진은 한국 대사관의 안기부 블랙들에게 붙잡혀 지금도 대사관에 구금 중이다.

송무처장은 당일 안기부에 사표를 제출했고, 안기부장은 그 자리에서 사표를 수리했다. 그리곤 송무처장 부부는 가방 하나만 챙겨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작전은 실패한 것이다. 송무처장의 굳은 의지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가벼이 생각한 대가다.

백정태는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한다. 과정 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다. 성공하면 역사가 되고, 실패하면 야사에 불과하다고 이건호 회장이 말한 것처럼.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이 상황을 보고했을 때, 이건호 회장도 눈빛 한 점 바뀌지 않았다. 안기부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500만 달러는 공작비로 쓰라고, 미국에 구금된 비서실 직원은 나쁜 의도가 없으니 풀어 주라고… 웃으며 통화를 했던 것이다.

유유상종이라… 이건호와 백정태는 같은 과였다.

지금 백정태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공작 중에 실수가 있었지만, 모든 건 결과가 말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공만 하면 다 묻힌다.

이 판도라 상자를 여는 유일한 열쇠가 저 길쭉한 여자의 아버지에게 있으니까. 이 사실 하나를 알아내기 위해 쓴 돈이 얼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접근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방법을 바꿨다. 현직이 아니라 중앙정보부 시절 고위직에 있었던 이들에게 상상도 못 할 돈을 던졌고, 겨우 알아낸 사실. 덕분에 중앙정보부를 퇴직한 고위직 몇 명이 부자가 되었다.

확실하다.

몇 명이 털어놓은 정보를 크로스 체크 한 결과, 오직 한 사람만이 모든 일을 알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금 연기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빨리 소방수가 불 끄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나저나 음료수를 사러 구름다리를 건너간 놈이 오지를 않는다.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며 백정태는 차에서 내렸다. 그랜저가 아무리 편하다 해도 오금이 저렸다. 한 번씩 몸을 풀어 줘야 한다.

그 순간.

백정태는 귀밑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인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노리고 있다. 맹수다. 보통 단련된 사람이 아니다.

“나오시죠!”

“…….”

“대한민국에서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진 못할 테고, 뭘 망설이십니까? 서로 얼굴 보면서 이야기합시다.”

“…….”

“권덕용 과장님, 선수끼리 왜 이래요? 안 나오면 저는 그냥 갈 겁니다. 그럼 지붕 쳐다보면서 달구경이나 하실 텐데… 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정태의 눈은 주위를 흝었다.

제기랄… 음료수를 사 오라고 시켰던 놈은 차 뒤편 바퀴에 머릴 처박고 있었다. 구름다리를 건너가지도 못하고 당한 것이다. 기척도 없었다.

“에이… 왜 이러실까? 코앞이 어린이집인데, 서로 조용히 해결합시다.”

그제서야 그렌저 트렁크 뒤에서 몸을 일으키는 한 사람.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짙은 살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최소한 동급, 아니면 윗줄이다.

백정태도 제일 빡센 훈련을 거쳐 안기부의 블랙 생활도 했던 인물이다. 손에 묻은 피가 얼마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춤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저 사람.

늙었다. 사진으로 본 그 사람이… 맞다.

너무 평범해서 사람 사이에 섞이면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인 그 사람.

지금은 완전히 딴판이다. 당장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살기 띤 모습. 나이가 있으니 맞붙으면 이기겠지만, 자신도 팔 하나는 내줘야 할 것이다.

“권덕용 과장님? 이렇게 보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너, 누구냐? 삼송 비서실에는 너 같은 놈이 없었다.”

“그래요? 당연하죠. 정식 라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분명히 삼송그룹 비서실 부장, 맞아요. 참, 전에 같은 회사 생활도 잠시 한 적 있습니다.”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너… 누구냐?”

“아시잖습니까? 백정태.”

“나는 너 같은 잡놈 모른다.”

“그러시겠죠, 블랙 운용은 각 팀끼리도 비밀이니까. 13과에 잠시 몸 담고 있었습니다. 삼송 비서실에 확인하는 것보다 13과에 물어보시죠. 코드 네임, 부쳐(Butcher)라고 불렸습니다.”

“……!”

“오! 아시는구나, 하긴… 제가 워낙 유명했으니까.”

정체를 모를 때가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누구란 것을 알고 난 다음에 더 무서운 놈도 있는 법이다.

이놈은 진짜 위험한 놈이다. 안기부 블랙 역사상 가장 잔인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한 번도 작전을 실패한 적이 없는 전설을 만든 놈이다.

권덕용은 여전히 손을 뒤춤에서 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노쇠한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놈이다. 첫 발에 못 죽이면… 당한다.

“쏠 자신 있습니까? 저는 매 시간 비서실에 동선을 알립니다. 제가 일주일째 여기 와서 죽치고 있다는 건 회장님도 알아요.”

“……!”

“그리고 여기서 사달이 나면, 따님이 많이 놀랄 것 같습니다만……. 우리 편하게 말로 푸시죠.”

“나에게서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 그만 돌아가라. 다시 얼쩡거리면, 분명히 말하는데… 너, 죽는다.”

그렇게 경고를 날려도 끄덕 없는 백정태.

“송무처장은 정보사 시절 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분의 성품을 알면서 너무 쉽게 접근했나 봅니다. 500만 달러면 평생 벌지 못할 돈이고, 또 금쪽같은 아들내미 미래가 달렸는데, 그렇게 대차게 직진할 줄 몰랐습니다.”

“정보기관에 몸을 담는 순간부터 돈과 출세는 버리는 것이 기본이다. 굳이 애국심이라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게 맡은 소명… 너 같은 쓰레기는 절대 알 수 없겠지, 꺼져라!”

“흠, 쓰레기라… 뭐라 부르건 상관없습니다만. 차 한잔하면서 얘기 좀 하자니깐요?”

“부쳐, 말귀가 어두운 거냐,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거냐?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한마디라도 더 뱉으면, 아가리에 총알을 먹여 주마.”

총을 뽑을 판이다. 설사 자신이 이로 인해 처벌을 받더라도 딸을 지킬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백정태의 한마디에 권덕용은 무너지고 말았다.

“따님도 아나요? 친 아버지가 아닌걸?”

“……!”

“여기서 더 시끄럽게 하면 따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 같은데… 좋게 좋게, 조용조용히 풉시다, 권덕용 과장님.”

“이, 이, 이 새끼!”

* * *

멀지 않은 동대문의 작은 호텔 로비 라운지에 권덕용과 백정태는 마주 앉았다. 미리 연락을 해 둔 덕분에 호텔 직원들이 일반 손님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왜 이효수 박사 건을 뒤지는 거냐?”

“알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그건 묻힌 사건이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절대 뚜껑을 따면 안 된다. 일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 돼. 모르나?”

“알죠, 당연히.”

“그런데 왜 이토록 집착하는 거냐?”

“흠… 우선 밝히는데 삼송은 애국 기업입니다. 국익을 해칠 생각, 전혀 없습니다. 단, 이효수 박사와 관련된 것 중에서 딱 하나의 팩트만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왜 나냐?”

동문서답.

백정태는 물끄러니 권덕용을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를 권덕용이 아니다.

“나는 평생 국가를 위해 헌신해 왔다. 이제 곧 퇴직을 앞두고 있어.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다. 나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을 생각, 하지 마라.”

“네, 압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저도 한동안 가슴에 품었던 말이죠. 멋진 말입니다.”

“…….”

“그런데!”

“…….”

“권덕용 과장님의 최대 보물이 뭘까? 에이… 이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따님 권혜림 씨, 맞죠?”

“……!”

“국가? 애국심? 사명감? 하하하하! 권 과장님… 배 아픕니다. 그만 웃기세요. 따님의 손톱 하나만도 못한 그딴 것들… 웃깁니다, 웃긴다고요.”

“부쳐! 그 입… 닥쳐라!”

배를 잡고 웃는 백정태를 향해 권덕용은 이를 갈았다.

아아아… 어쩌다 이리되었나? 그토록 오랜 세월 숨겼던 사연을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알고 있다니. 혜림이, 내 딸 혜림이가 이 사실을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거래하시죠. 588의 천사 권혜림 씨도 보호하고, 권 과장님의 안락한 노후도 보장하고, 나는… 퍼즐을 맞추고.”

“불가! 설사 혜림이가 내 친딸이 아닌 걸 알게 되는 한이 있어도 내 입을 열진 못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그건 안 된다.”

어쩔 수 없다.

가슴으로 키운 딸아이가 받을 충격이 크다 해도, 그로 인해 딸과 어색하게 될 지라도, 그 어떤 비밀 한 자락도 흘릴 수 없다. 최악의 순간에는 이놈을 쏴 죽이고… 나도 스스로 죽어야 한다.

“그런 마음이라면 권 과장님도 모르는 사실, 내가 먼저 말씀드리죠.”

“…….”

“이효수 박사가 사랑했던 연인 박혜선 씨,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시고 있어요.”

“마, 마, 말도 안 돼, 분명 한강에 몸을 던졌는데…….”

“예, 그랬었죠.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만, 아직 살아 있어요.”

“으흐흐, 그랬구나. 천지신명이 도우셨다. 정말 다행이다. 평생 지고 살던 짐을 하나 내려놓았어.”

권덕용은 진심으로 감격에 겨웠다. 이야기의 주도권이 한순간 백정태에게 넘어왔다.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셨나요? 지금까지는 워밍업에 불과했거든요.”

그리고, 연이어 백정태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결정타를 날렸다.

“그때, 권 과장님이 버린 아이, 공원 화장실에 버렸다고 보고한 그 아이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폭탄이 떨어졌다. 권덕용의 가슴에 무거운 돌 하나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