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한 발 더 들어간 비밀
1993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전대협이 해체되고 한총련이 발족하면서 학생운동의 새 장을 여는 해였고.
노태후 대통령이 퇴임한 뒤, 김양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32년간의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고 비로소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김양삼은 취임한 지 11일 만에 군부 요직을 독점하고 있던 하늘회 소속 장군들 목을 날렸다. 총 40개의 별이 떨어졌다.
그리고 1급 이상 고위 공직자는 재산을 무조건 공개하도록 했다. 거기다, 총리도 배제한 채 대통령이 직접 금융실명제를 발표해 버렸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담화로만 한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 긴급 명령(16호)을 발동해 버린 것이다. 은행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었다. 사바사바해서 뒤로 돈을 빼 줬다가는 은행장이 수갑을 차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가 한동안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껏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거나 입출금 시 신분증 같은 건 필요 없었던 시절. 익명도, 차명도, 심지어 가명으로도 통장을 만들 수 있었다.
이젠 신분증이 있어야 단돈 1원이라도 은행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산일보, 중양일보, 동화일보를 비롯한 전 언론이 나라 망한다고 난리를 떨었지만, 김양삼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상식을 상식화한 성공적 정책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불똥이 튄 곳은 대기업 재벌들과 사채 업자들.
“난리났다. 저 영감이 완전 미쳤구나.”
“아무도 예상 못 했습니다. 뒤에 서 있는 총리 표정 보셨습니까?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어요.”
“우리 돈은?”
“…….”
“뭐야? 왜 시원한 대답이 없어?”
“대충 40% 정도 회수될 것으로…….”
“이 미친. 나머지, 나머지는?”
“확인 중입니다. 차명으로 해 놨던 놈 중 상당수가 전화를 안 받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부동산이 더 큰 문제다. 여기도 빨리 사람 보내서 명의 돌리도록 해!”
“벌써 배 째라는 놈이 태반이고, 생각해 보겠다며 은근 대가를 바라는 놈도 나오고 있습니다.”
“아이고, 머리야. 결국 절반 이상 날아가겠구나, 이 또라이 같은 영감탱이.”
차명으로 해 둔 예금과 부동산은 거의 절반도 못 찾는 게 예사였다. 덕분에 전국적으로 갑자기 졸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실제 이때를 기점으로 현도 자동차 그렌저의 판매가 몇 배나 늘었다.
“몇 놈이나 잠수 탔능가?”
“형님, 숫자를 셀 수 없당게요.”
“워메, 잡것 좀 보소. 다 잡아서 손모가지를 썰어 주랑께?”
“형님, 고것이 쉽지 않어라. 이 긴급명령이라는 것이 무서운 법이어라. 무조건 구속을 원칙으로 하는디… 괜시리 잘못 건들믄, 국세청이랑 검찰이 탈탈 털어 묵는다 안 허요?”
“뭐시 그런 법이 있당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랑께? 내 돈인디, 다 내 돈인디 말이여.”
“고걸 밝히지 못항께 탈 아니오? 형님이랑 제가 콩밥 먹는 동안 다 도망가 불믄 어차피 못 찾지라.”
“다른 놈 이름으로 된 거는 그렇다고 쳐야. 근디 가명으로 만든 건 워찌 된다냐?”
“더 힘들어라. 자수하고 벌금 물믄 된다지만, 내가 사채업자여… 이렇게 까발리는 꼴이 된당게요.”
“흐미. 썩을 것, 애먼 놈들 부자 맹그러 줬구마. 아이고, 복장 터져 죽겠네잉.”
“…평소 그렇게 살살거리던 황 사장은 아예 파출소 옆집으로 이사를 했당게요. 여차하믄 바로 뛰어갈라고.”
“고 새끼 이름으로 얼마나 꼬불쳐 뒀당가?”
“제일 많어라. 워낙 입속의 사탕처럼 꼬리를 흔들어 쌌기에 의심도 안 했당게요.”
해테 그룹의 강남 사옥은 한바탕 난리를 겪고 있었다.
“장 이사, 이게 뭔 짓이야?”
“보는 그대롭니다.”
“사표라는 건 알겠는데, 왜 그래? 갑자기.”
“내가 심신이 지쳐서요. 그만 퇴직하고 호주로 이민 준비 중입니다.”
“……!”
“퇴직금은 주든 말든 됐고요. 건물이나 빨리 비워 주십시오.”
“너, 너, 이 새끼. 뚫린 입이라고 말이면 단 줄 알아?”
“네, 회장님. 그동안 제가 사람이었습니까? 그냥 개였죠. 회장님이 공 물어오라면 쫄랑쫄랑 뛰어다니던 개. 이젠 사람답게 살아 보렵니다.”
“내가 당장 검찰청에 연락해서 잡아 처넣고 말겠다. 이 새끼.”
“그러시던가요? 지금 서슬이 시퍼런 긴급명령 위반죄로 9시 뉴스에 나오면 보기 좋겠습니다. 이 건물 급매물로 내놨거든요. 계약 기간도 마침 끝났네요. 아시죠? 원상 복구 비용은 세입자가 부담하는 거.”
해테 회장은 끝내 목을 잡고 넘어갔다. 꼼짝없이 사옥을 비워 줘야 할 판이다.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런 회장을 바라보는 경리부장의 눈초리는 싸늘했다. 그에게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는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 통쾌한 복수다.
“할아버지.”
[오냐, 시혁아.]
“대통령 긴급명령 담화 보셨죠?”
[클클클, 지금 온 산에 불이 붙었다. 호랑이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만, 고라니들은 다 풀숲으로 숨었구나. 미칠 지경일 게다.]
“할아버지야 미리 준비하셨으니 걱정 없지만, 아드님들은 괜찮나요?”
[일없다. 당해 봐야 아픈지 알겠지. 나는 한마디 언질도 주지 않았다.]
“예, 그런데 성희 씨는 별도로 주신 것 없으세요?”
[많이 줬다. 장손녀이기도 하고, 워낙 이쁜 짓을 많이 했거든. 또 너한테 직접 경고를 들었으니 잘하겠지 싶어서.]
“판교 땅은요?”
[그 5만 평도 자기 이름으로 다 해 놨으니 걱정 없다. 내가 아예 돈을 증여하면서 세금까지 다 냈으니, 아무리 검찰이 뒤져도 문제없게 처리했어.]
“아시죠? 그 땅, 절대 팔지 말라고 하세요. 그 땅만 정리해도 부친이 하는 현도자동차 공장 몇 개 지을 돈이 나옵니다.”
[오냐오냐. 네가 준 약혼 선물인데, 그걸 팔겠냐? 클클클.]
“에이… 씨, 그만 포기하면 안 돼요?”
[이놈아, 나이는 성희가 조금 많다만, 그 아이가 딱이야. 너같이 역마살 낀 놈은 집을 지키고 있을 현모양처가 필요하다니까.]
“생각해 볼게요.”
[엥? 그, 그, 그 말, 진심이냐?]
“몰라요. 하도 할아버지가 그러시니까… 생각해 본다는 거죠.”
시혁도 정성희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처음 만났을 때 가슴이 울렁이지 않았다는 것. 한눈에 뻑 가는 심장의 떨림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주저한 것이다.
그러면서, 또 가슴 한편에서 떠오르는 여자.
노예지.
노태후의 막내딸로 지금 사법 연수원에서 열공 중이다. 성적을 보건대 판사는 따 놓은 당상이다. 둘 다 어디 내 놔도 한 치 밀리지 않을 조건과 미모를 가진 여자들.
하지만 가슴이 뛰지 않는다, 둘 다.
이게… 문제다.
* * *
“그… 아이는 잘살고 있는가?”
“네, 너무 잘살고 있어서 탈이죠.”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내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악이었어. 정말… 다행일세.”
“권 과장님, 이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차례입니다. 거의 90%는 다 밝혀졌어요. 권 과장님의 증언이 10% 퍼즐 조각을 채워 주면 모든 게 명백해집니다.”
“흐흐흐, 대통령 각하와 이건호 회장이 파일을 봤다며? 그러면 된 거지. 뭐가 더 궁금한가?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시키는 대로 했다는 일, 그 과정을 듣고 싶은 거죠.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릴 수 있습니다. 따님과 제3국으로 가셔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도록.”
“우선 내가 먼저 물어봄세. 왜 삼송 같은 재벌 그룹 회장님이 이 일을 알려고 하는가? 삼송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 아닌가?”
“노코멘트. 그건 제가 대답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
“우리는 지금 거래 중 아닌가요? 나는 따님의 비밀을 지켜 드리고, 과장님은 과거의 기억을 알려 주시고. 송무처장과 같이 500만 달러를 현금으로 드리겠습니다.”
동대문의 이스턴 호텔, 로비 라운지의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비쳐 들어왔다. 권덕용은 괴로웠다.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한 자락.
지난 26년간 악몽에 시달렸다.
말단 IO(Inteligence Officer: 정보 요원)로 출발한 권덕용은 무소 불위의 중앙정보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남산에서 왔다.’라는 한마디면 날아가는 새도 딸꾹질을 하던 시절.
어느 날 본부에 도착한 권덕용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랐다. 과장도 보기 힘든 중앙정보부 말단 정보 요원 주제에… 하늘 같은 부장님의 호출이라니.
-자네, 일 하나 처리해 줘야겠어.
-네? 네, 넵. 말씀만 하시면 목숨 걸고 완수토록 하겠습니다, 부장님.
-그래, 자네가 그래도 한국대 법대 출신에 영어가 되니까 선발된 거야.
-넵.
-빌어먹을 박사 한 명이 귀국할 거야. 국적은 우리 대한민국인데, 영어로만 말을 해. 정부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거든. 거기다 미국 AID차관 적격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관으로 온다.
-넵, 부장님. 잘 모시겠습니다.
-아니, 자네가 진짜 할 일은 따로 있어.
-……?
-그동안 박사의 모든 습관, 행동 양식, 생각까지 분석하고 파헤쳤다. 그리고 빈틈을 찾았어. 이번에 어떻게든 이효수 박사를 포섭해야 한다. 그를 회유해야 다른 재외 과학자 설득이 수월해진다.
-넵, 내용은 모르겠으나 국가를 위한 일, 어떤 일이건 다 하겠습니다.
-그래, 자세한 작전 내용은 여기 정보 국장에게 전해 듣고… 이건 말이야,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닫아야 해. 알아들어?
“결국, 그 작전은 실패했네.”
“미인계에 동원된 박혜선 씨는 어떻게 선발했습니까? 박혜선 씨도 요원이었습니까?”
“아냐, 그분은 아무것도 몰라. 한국 대학교 물리학과 조교였네. 우리가 그분과 이효수 박사의 동선이 겹치도록 공작을 했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흥미진진합니다.”
“박혜선 씨와 이효수 박사는 서로에게 끌렸지. 이효수 박사의 이상형이 박혜선 씨였고, 또 박혜선 씨는 이 박사의 빛나는 지성을 존경했으니까.”
“그런데 작전이 왜 실패했습니까?”
권덕용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도무지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진전이 없었거든. 이 박사는 신사였네. 어쩔 수 없이 작전 팀은 해서는 안 될 방법을 쓰고 말았어.”
“……!”
“그래, 두 사람에게 약을 썼네. 그 결과…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동침을 했지. 우리는 이 장면을 다 카메라에 담았고.”
“이해합니다. 블랙의 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죠.”
“하지만, 너무 간과한 게 있었어.”
“뭡니까?”
“이효수 박사의 의지, 그가 독재 정권에 가지고 있던 반감, 순수한 학자로서의 자긍심.”
“…….”
“이 박사는 그 사진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우리를 향해 그랬네. 오히려 박혜선 씨의 미국행을 용인해 주지 않으면 미국 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역공했지. 아직 자신의 혈액을 분석하면 약 성분이 검출될 것이라면서. 알았던 거야, 이 박사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백정태도 숨겨진 비사를 들으며 본 적도 없는 이효수 박사를 떠올렸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정보부가 뒤집혔지. 온갖 짓을 다 했는데, 거꾸로 똥물을 뒤집어쓰게 생겼으니까.”
“…….”
“우리는 급히 박혜선 씨를 안가에 가뒀네. 그리고 모든 흔적을 지웠지. 그의 신분 자체를 없애 버리고 친구, 학생, 지인들 모두 입막음을 시켰어. 한국대학교 조교 박혜선 씨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유령이 된 거야.”
“흐음.”
“이 박사는 박혜선 씨를 찾기 위해 미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 말 그대로 커밍아웃을 해 버렸어. 대사관인들 답이 있나? 의심은 했겠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작업한 것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을 터.”
“…….”
“그렇게 이효수 박사는 두 달을 더 머물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네. 가자마자 미국 국적을 받아 버렸어. 진절머리가 났겠지.”
“그래서… 미국에서 죽인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