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백정태의 승부수
“그건, 나도 몰라. 오히려 파일을 열어 본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우리 국내 공작 팀은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백정태는 멈추지 않고, 권덕용의 아픈 심장에 결정적 비수를 박아 넣었다.
“박혜선 씨가 낳은 아이, 그러니까 이효수 박사도 몰랐을 것으로 추측되는 아이, 그 아이를 왜 공원 화장실에 버렸습니까?”
“아, 아, 아! 자네, 정말 잔인하구만.”
“이게 내가 알고 싶은 가장 큰 퍼즐입니다, 권 과장님.”
“박혜선 씨는 이 박사가 출국하고 나서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상부에서는 절대 이 사실을 공개할 수 없었지. 이를 빌미로 이 박사를 협박해 보자는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자신이 없었을 거야. 겨우 막아 둔 둑이 터져 버리면 감당이 안 되니 말일세.”
“당신이었군요, 최종적으로 뒤처리를 맡은 사람이.”
“…그래, 내가 그랬어. 박혜선 씨를 한강으로 던진 사람도 나고, 차마 같이 찬물에 밀어 넣지 못한 채 한강 공원 화장실에 아이를 유기한 사람도… 나다.”
모든 전모가 드러났다.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다.
백정태도, 권덕용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백정태도 블랙 요원 출신으로 수많은 공작에 투입되었고, 그 과정 중에 거뒀던 목숨이 수십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건 비열한 작전이란 생각에 입을 깨물었다.
“대가는 필요 없어. 단 한 푼도 받고 싶지 않아. 단 두 가지, 자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주게.”
“안 됩니다.”
“……!”
“박혜선 씨의 현재 상황 그리고 한강 공원 화장실에 버려졌던 아이가 누구인지… 이걸 알고 싶겠지만, 다 잊으십시오. 권 과장님의 손을 떠난 일입니다.”
“잘… 있기는 하나?”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너무 잘살아서 문제죠. 권 과장님 생각보다 훨씬 잘살고 있습니다.”
“박혜선 씨와 그 아이는 같이 있나?”
“말할 수 없습니다.”
“따로 모르는 상태로 살고 있다는 뜻이군. 그런가?”
“……!”
“…큭큭큭, 내가 모자를 갈라 놓은 꼴이 되고 말았군. 차마 내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 버렸어. 방긋방긋 웃더군. 너무 예쁜 아이였네.”
이것 보세요, 권덕용 과장. 그때 확실히 죽이지 그랬습니까? 잘살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괴물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내 목숨을 주머니 속의 땅콩 꺼내듯 위협하고 있어요. 한국 굴지의 대재벌 삼송그룹조차 놈이 두려워 떨고 있다고요.
지금까지 안기부 비밀 파일을 열고, 당신 이름을 알아 내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린 이유… 거의 알고 있던 사실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신을 만나는 이유…….
다 그놈 때문이야, 이 양반아.
“수고했네, 백 이사.”
“네, 회장님.”
“이 카드를 어떻게 써야 할까?”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네, 사람에게 천륜만큼 큰 인연이 있겠습니까? 김시혁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회장님께서 쥐고 있는 카드는 김시혁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고 봅니다.”
“흐음, 그래서?”
“군의 전술에 선즉제인(先即制人), 즉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오! 먼저 공격하라? 그러면 자연히 방어도 될 것이다?”
“네, 회장님. 김시혁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뭘?”
“저도 모르겠습니다. 김시혁의 정확한 의중을… 그놈은 이미 육식 공룡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중입니다.”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공룡 맞다.”
“그런데도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죽일 듯 말 듯 희롱하는 것인지, 아니면 심중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가 공격하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솔직히 버티지 못한다. 삼송에서 이씨는 깡그리 멸족 당할 거야.”
“그렇다면 회장님, 공격하셔야죠. 언제 당할지 모르는 이 치욕스런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공격입니다.”
백정태의 조언을 듣는 이건호 회장의 표정은 참담했다.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팩트다. 하루하루 언제인지 모를 놈의 공격을 기다리면서 가슴 졸일 수 없음이다. 그래 봐야 명줄을 조금 더 늘이는 것에 불과하다.
아버지 대부터 시작된 삼송이라는 찬란한 이름을 자신의 대에서 몇십 배 크게 키웠다. 이제는 현도와 다우에 이어 대한민국의 세 번째 그룹이 되었다.
거기다 지금 역점을 두고 있는 반도체 사업은 눈부신 성장 중이다. 이대로 십 년만 더 가면 명실상부 대한민국 1위의 그룹으로 우뚝 설 것이 틀림없다.
이걸 다 넘겨줘야 한다. 김시혁이 칼을 뽑는 그 순간.
“자네, 내일 나와 미국으로 가세. 공룡과 딜을 해 보자.”
“네. 회장님. 제가 먼저 간을 보겠습니다. 회장님의 조커 카드가 최대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판을 깔겠습니다.”
* * *
“아이고, 총재님. 힘든 걸음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쭈구리?”
“왜요? 격하게 환영하고 있는데?”
“그사이 살이 피둥피둥 쪘잖아? 재수 없어.”
“…….”
“나는 3킬로가 빠졌다고요. 그런데 피부 반짝이는 거 봐. 세상에 잘난 것들은 다 죽어야 해.”
“내가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까?”
“보스! 나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눈 밑이 시커멓게 판다처럼 변한 거 안 보여요?”
“산드라, 지금 딱 좋아. 드디어 50킬로 밑으로 내려갔잖아? 유럽 중앙은행 총재님이 여신이 된 거야. 더 이상 좋을 수 없지, 안 그래?”
“나는 매미 같은 삶이 될까 봐 두려워요.”
진짜 오랜만에 시혁과 마주한 산드라 리페어 몽고메리.
투정을 하고 있지만,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이 사람을 만나 비로소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 인연이다. 김시혁이 자신을 발탁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런던의 뒷골목에서 그저 그런 변호사로 먹고살았을 것이다.
매미는 나무 껍질 안에 알을 낳는다. 알은 1년을 버티다가 알에서 부화한 후 나무 밑 흙 속으로 파고 들어가 뿌리 수액을 먹으며 몇 년을 살아간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나무 위로 기어올라 마지막 탈피를 하게 된다. 갑옷 같은 등이 부서지면서 빛나는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매미가 되는 것이다.
우화등선과 똑같다.
슬픈 건, 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버티고 버텨 세상으로 나오지만, 20일 만에 산란을 해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일생을 마감한다. 너무 짧은 생이 아닌가?
“산드라, 절대, 절대로, 당신은 매미가 아냐. 당신은 찬란한 다이아몬드라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영원히 빛나게 될 거야. 내 장담하지.”
그랬다. 이 사내의 말은 다 이뤄졌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성사시켰다.
이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윌슨도, 공사홍도, 박하송도, 이현도, 퍼피와 김보성도, 그런 산드라를 바라보며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 유로가 자리를 잡았어. 유로는 달러와 함께 세계 기축 통화가 될 거야. 산드라의 역할이 한층 더 커질 테니 당분간만 더 고생해 줘.”
“보스, 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예요? 여기서 멈출 보스가 아니잖아요?”
“당연히… 이제 달러를 먹어야지.”
“엥? 그건 정말 위험한 발상인데? FRB는 미국 정부도 함부로 손 대지 못했던 성역, 지금 유태인들과 한판 뜨겠다는 거예요?”
“아니, 안 싸워. 그들이 스스로 손을 든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받아먹으면 돼.”
“이해가 안 돼요. 도대체 보스의 머릿속 생각을 알 수 없어.”
“곧 알게 될 거야. 유태인들과 싸우는 건 너무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해. 나는 그냥 기다리면 돼. 그들이 백기를 들고 투항할 때가 멀지 않았거든.”
또 시작이다. 킴스트라 다무스의 예언.
문제는 그의 예언이 적중율 백 퍼센트라는 것.
그때, 갑자기 김보성의 인이어로 소식이 들어왔다.
윌슨은 전체를 관장하는 보안실장이고, 김보성은 수행팀장을 맡고 있다. 김보성에게 직접 연락이 왔다는 건, 시혁과 관련된 일이란 말이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1층 안내 데스크 보안 요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누군가?”
“윌슨 실장에게 무수히 들었던 이름입니다. 백정태라는 놈이 찾아왔습니다.
“허어! 진짜야?”
“예, 명함에는 삼송그룹 비서실 부장으로 되어 있다 합니다.”
“미쳤군, 백정이… 제 발로 왔어?”
“예, 제가 알아서 처리할까요? 그 따위 놈, 흔적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캄퐁과 같이 내려가겠습니다.”
시혁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잊을 수 없는 이름 백정태, 일명 백정으라 불리던 놈.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피우던 박하 담배 냄새 그리고 샤넬 넘버 파이브의 쟈스민 향수 냄새, 하반신을 덮고 가슴까지 차오르다가 종내에는 턱을 지나 입까지 올라오던 흙냄새.
시혁도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흙이 눈 위를 덮을 때까지 백정과 마주 보았다.
그 차가운 뱀 같은 눈의 백정. 웃지도 않았고, 불쌍하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시키니까 한다는 기계 같은 놈의 눈빛을 어찌 잊을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백정이 거꾸로 숨이 막힐 것이다. 매일 밤, 악몽을 꾸도록 만들어 주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를 뼈에 새겨 준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제 발로… 찾아왔다고?
“윌슨, 김 팀장, 미친놈 면상 한번 보자. 데리고 올라와.”
“회장님, 쥐새끼를 직접 보실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 궁금해. 놈은… 특별한 악연을 가진 놈이거든.”
* * *
흥미롭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시혁.
그에 반해 열린 회장실 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백정태.
백정태는 알지 못하지만, 시혁의 입장에서 볼 때는 천하의 악연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김시혁 회장님. 백정태 인사 올립니다.”
“조류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닌데… 벌써 잊으셨나?”
“…….”
“분명히 경고를 했는데? 다시 보게 되면 죽는다고. 그만큼 내가 우스웠다는 말이네?”
“아닙니다, 회장님. 심장에 새기고 있습니다.”
“호오! 그런데도 제 발로 오셨다? 뭔가 야무진 걸 들고 있단 말이지… 하하하, 카드 꺼내 봐.”
“……!”
“바보야? 모가지 걸고 오면서 그냥 왔을까?”
과연 김시혁이다. 이놈은 항상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냥 운이 좋아서 저 자리에 도달한 게 아니다.
괜히 머리싸움 해 봐야 쥐만 날 뿐이다.
“김시혁 회장님, 독대를 청합니다.”
“코드네임 부쳐, 네가 82층에서 추락한들 FBI는커녕 NYPD도 오지 않는다. 개지랄 떨지 마라, 바로 죽여 주마.”
발끈한 윌슨에 뒤이어, 캄퐁은 벌써 쿠크리를 꺼내 들고, 김보성은 스미스 & 웨슨 3900 권총을 백정태의 머리통에 붙이고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
시혁의 명이 떨어지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백정태의 주위에서 한발 물러서는 일행. 실로 일사불란하다. 백정태는 한 편의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연극이 아니라는 것이 더 문제일 뿐. 뒷감당 같은 걸 생각할 사람들이 아니다. 김시혁이 저지하지 않았다면 벌서 머리통이 날아갔을 것이다.
모두 일당백, 82층 엘리베이터를 내릴 때 마주쳤던 경호원들, 무표정한 얼굴로 몸수색을 하던 그들 중 만만한 이들이 없었다.
한술 더 떠서 이 방에 있는 이들은 또 다른 경지다. 특히 2미터에 육박하는 저 윌슨이라는 사람은 아무 행동도 없지만, 살이 저린다. 보는 것만으로 찌릿찌릿하다.
진짜 미쳤었군. 저런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다케다 용병 팀을 밀어 넣었으니…….
그러나, 정작 놀랐던 것은 따로 있었다.
탁자 위 작은 쟁반에 담긴 건 백정태의 소지품, 김시혁은 장난치듯 거기 있던 동전을 집어 들었다.
“……!”
종이처럼 구겨지는 동전, 별달리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시혁의 두 손가락 사이에 있던 동전이 반으로 접혔다. 또 하나, 다시 또 하나.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오백 원 동전도.
차력도 마술도 아니다. 미리 준비한 소품이 아니라 백정태 자신이 꺼내 놓은 동전이다. 저건 김시혁 본연의 힘이다.
“독대를 해야 할 정도로 재미있는 내용이어야 할 거야. 아니면, 오늘 너는 제 발로 걸어서 여길 못 나간다. 오케이?”
백정태는 고개를 정신없이 아래 위로 끄덕였다.
‘제기랄, 잘못 왔나?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