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용들의 화해
“감사합니다. 이 회장님 덕분에 관련 사실을 알았고, 어머니도 찾게 되었습니다. 과정 중에 조금 방법이 거칠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장장 한 시간에 걸쳐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조문호가 발견한 작은 단서를 가지고, 이건호는 전력을 기울여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안기부에 봉인된 절대 비밀 파일을 열었고, 두드릴 수 있는 모든 라인을 동원해 파헤쳤다.
여기에 적지 않은 자금이 들었을 것이고, 수많은 인맥을 동원했다는 것도 불 보듯 뻔한 일.
여기에 거짓말을 보탤 이유가 없다. 팩트인 것이다.
“그동안 서로 믿지 못했습니다. 저도, 이 회장님도. 그래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겠죠. 그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대감과 증오는 많은 것을 장막 뒤로 숨겨 버립니다. 지혜를 이해하는 데도 지혜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
이 말을 이건호 입에서 또 들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로스 페로에게 미망에서 깨어나라며 했던 말이다.
“제 아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인 걸 기억합니다. 그래서 데리고 왔습니다.”
“…….”
“자룡이가 그렇게 총명하지 못합니다. 제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삼송의 후계자는커녕 말단 사원도 하지 못할 그릇이라는 점도 압니다.”
진솔하게 치고 나온다. 아버지의 신랄한 비판에 이자룡은 좌불안석이었다.
“하지만 제 아들입니다. 저는 아들이 이놈 하납니다. 어차피 자룡이가 삼송을 물려받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 김 회장께서 작정하면 우리 부자와 이씨 성을 쓰는 모두가 짐을 싸야겠지만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현실이니까요. 백화엽 씨는 삼송에게 많은 것을 줬습니다. 삼송은 그 대가를 치뤘고요. 이를 모두 김 회장님이 물려받은 이상, 저는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
“저는 항상 궁금했습니다. 굳이 백화엽 씨의 유산이 아니더라도 김 회장님은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송은 김 회장님의 공격을 받아칠 힘이 없습니다. 왜 그동안 지켜보기만 했습니까?”
“…….”
“저와 처음 한국대 총장실에서 만났을 때, 김 회장님은 노골적인 적의를 감추지 않았어요. 그리고 말씀하셨죠. 삼송을 꼭 갖겠다고… 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참은 겁니까?”
“…….”
“만약에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의 심정이었다면, 차라리 목을 무십시오. 저와 자룡이는 깨끗이 승복하겠습니다. 하지만 삼송은, 삼송이라는 이름은 계속 지켜 준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대차다. 이건호답다.
비록 궁지에 몰려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시혁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 공이 있다 해도 여전히 약자. 그럼에도 망설임이 없다. 진짜 짐을 쌀 각오가 없으면 하기 힘든 기세다.
“이 회장님, 협박과 강요는 제 특기입니다. 블러핑 하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실망인데요? 김시혁 회장님이라면 제 가슴을 열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바로 받아치는 이건호.
진심에는 진심으로.
그리고 이번에 큰 빚을 졌다. 이건호 회장이 한 일은 시혁의 인생을 바꿀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를 모를 시혁이 아니다.
“저는 삼송을 무너뜨릴 마음이 1도 없습니다. 오히려 알게 모르게 도왔던 적도 있습니다. 삼송이라는 이름은 미래 대한민국의 가장 큰 기둥이 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왜 삼송을 적대시하겠습니까?”
“역시 삼송이 아니라면, 저와 자룡이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인정합니다. 지극히 제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솔직하게 물어보는 이건호, 쿨하게 대답하는 시혁.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할까요?”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 않습니다. 추측할 뿐이죠. 제 추측이 틀리기를 바랍니다.”
“그 추측이 틀리려면 저와 자룡이가 어찌해야 합니까?”
“흠, 같이 가면 됩니다, 기차 선로처럼.”
“평행선을 이루란 말입니까?”
“네, 저는 삼송의 경영권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삼송이 평행선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기차가 선로를 벗어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해석은 제 몫이 아닙니다.”
이건호는 먼저 일어나 이자룡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기차가 출발하려면 네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 삼류 깡패를 보낸 걸 정중히 사과해라.”
“아, 아버지!”
“내가 어쩌다 너 같은 똥개를 낳았는지 모르겠다만, 너는 삼송가의 유일한 후계자다. 당당하게, 피하지 말고… 제발, 이 애비의 얼굴에 더 이상 먹칠하지 말거라, 자룡아.”
그제서야 고개를 까닥 숙이는 이자룡,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면 진심은 아니다. 시키니까 한다는 식이다.
“미안하다, 김시혁. 내가 순간 분을 못 참고 실수했다. 이해 바란다.”
참, 이걸 사과라고 하는지… 이를 악물고 내뱉듯이 던지는 저 말, 이해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철썩-!
시혁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건호 회장이 벼락처럼 이자룡의 뺨을 갈겨 버렸다.
“못난 놈! 사람이기에 누구나 허물이 있을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어. 문제는 그다음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끝까지 뻔뻔하게 우기든가, 졌다 싶으면 깨끗이 승복하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든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네 행동은 비겁하다. 초라하다. 병신 같다. 나는 아들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아, 아, 아버지…….”
“다시! 진심으로 해라. 어설픈 사과는 안 하는 것보다도 못하다. 이 바보 자식아!”
갈기를 세운 사자처럼 거칠지만 입술을 깨물고 으르렁거리는 이건호. 진짜 목을 물어 죽일 것만 같았다.
“이 회장님, 그만하시죠. 제가 이해하면 됩니다. 회장님께서 삼송을 대표해 사과를 먼저 하셨습니다. 아직 자룡이는 정글을 겪어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차차 체득하게 되겠지요.”
이걸로 됐다. 진심을 알았으면 된 것이다.
서로 신뢰가 없다 보니 시혁이 나서서 전격적으로 어머니를 모셔와 버렸지만, 결론적으로 큰 선물을 안겨 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은원을 정확히 정리하고자 하는 이건호의 뜻을 시혁은 마음으로 받았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했는데, 선물과 동시에 사과까지 얹어 주는 사람이라면… 된 거지.
왜 삼송이 들불 번지듯 성장을 구가하는지 충분히 알겠다. 저런 지도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약속드리죠. 이 시간부로 삼송에 대한 모든 은원, 자룡에 대한 모든 감정, 다 잊겠습니다. 도울 부분이 생긴다면 영원한 백기사로 조력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김 회장님.”
“그리고, 자룡아. 우리는 어찌 되었건 동창이다. 다 이해하마. 지난날은 흐르는 강물에 놓아 주자. 좋은 아버지를 둔 것, 축하한다. 너는… 진짜 복 받은 놈이다.”
이건 정말 부러웠다.
첫 만남부터 적대감을 감추지도 않았었다. 그동안 은근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공포에 질리도록. 언젠가 부숴 버릴 생각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화해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만들어 놓고, 선물을 안겨 주고, 자식을 준열하게 꾸짖는 아버지… 나는 없지만, 너는 있구나. 꼭 삼송의 회장이 아니라도 복받은 거지, 새끼야.
“그래, 시혁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네 말대로 나는 정글로 나가 보지 못 했어. 워낙 큰 존재에 짓눌려 주눅 들어 살았는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런 복에 겨운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
“이번에 깨달은 바가 너무 크다. 바닥부터 박박 기어서 내 힘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룬 삼송을 이어받도록 할 거다. 절대 아들이라서 물려받은 게 아니라 모두 인정하는 능력을 보여 줄 거야.”
이건호도 깜짝 놀랐나 보다. 이자룡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다. 너무 큰 존재에게 짓눌렸다고? 그냥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고?
“지금은 너와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 정도겠지만, 죽어라 노력하면 적어도 네 어깨까지는 갈 수 있겠지. 지난날 깡패들을 보낸 건 진심으로 사과한다.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 그냥 동창이 아니라 좋은 친구로.”
“그래, 자룡아. 동시대를 산다는 건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또 나는 졸업을 못 했다만, 우린 같은 학교를 다녔어. 훌훌 털고 서로 노력해 보자.”
비로소 이자룡도 미소를 띄우고 시혁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따뜻하네. 나쁘지 않아.
옛날 시혁을 내려다보며 그토록 잔인하게 내치던 이자룡의 모습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모른다. 회귀하기 전의 그 이자룡으로 다시 변할지, 아니면 진정 부단한 노력 끝에 삼송을 이어받는 훌륭한 사업가가 될지는.
최소한 그때와 다른 상황이라는 것, 완전히 역전된 지금 그럴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
만약에 다시 예전의 이자룡으로 변한다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고 시혁은 생각했다.
“김시혁 회장님.”
“아닙니다. 이제부터 호칭을 바꿔 주십시오. 자룡이와 화해한 이상 삼송의 이건호 회장님이 아니라 제 친구의 아버님 아니십니까? 편하게 이름을 불러 주세요.”
“…….”
이건호도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사실 백 퍼센트 자신한 것은 아니었다.
권력이든, 금력이든 정점에 선 자들은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시혁은 권력도 금력도 다 가져 버렸다. 개미를 문질러 죽이듯 삼송을 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를 빌미로 화해를 청하려고 찾아왔지만, 이미 김시혁은 행동으로 옮겨 버렸다. 전격적으로 모친을 모셔 간 것이다.
빛이 바래고 말았다. 선물은 열기 전이 설레는 법인데, 상대방은 이미 그 선물을 가져 버렸으니…….
사즉생 필즉사의 심정으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실상 가슴이 답답했었다.
그런데.
이토록 수월하게, 극적인 화해를 할 줄이야. 엄청난 우군을 얻었다. 삼송이 세계로 나갈 때 걸리적거리는 장애를 만났을 때, 이만한 우군이 또 있을까?
“아닙니다. 다음에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을 때 저도 그리하겠습니다. 오늘은 비즈니스로 만났으니 김시혁 회장님이라 부르는 게 맞습니다.”
“네, 그 마음 받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시죠.”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퍼즐이 하나 남았습니다. 그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네. 감사히 경청하겠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이 더러운 공작을 마지막까지 맡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저를 공원 화장실에 버린 사람을 말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를 직접 만나 사실을 확인한 비서실의 백정태 부장을 불러 자세히 들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맞다. 이건 시혁도 아직 알지 못하는 선물 보따리일 수 있다.
“아닙니다. 저는 그 사람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이름도 알 필요 없습니다. 그도 자신의 일을 한 겁니다. 모든 게 슬픈 역사의 결과물, 더 들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
“저는 지금 어머니와 같이 있습니다. 그걸로 됐습니다.”
“왜 버려졌는지, 왜 국가가 이효수 박사와 모친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예, 그냥 덮겠습니다. 만약, 제가 더 깊숙이 알게 된다면 영영 조국을 버릴까 두렵습니다. 저는 아직 대한민국을 놓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 하시죠, 이 회장님.”
아아아! 진짜 크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대범할 수 있는 것인가?
이건호는 새삼 김시혁이 다시 보였다. 그가 홀로 이 세상을 씹어 먹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보다 제도 이 회장님께 드릴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만.”
“예……?”
그리곤 시혁이 꺼내 놓은 작은 만년필형 녹음기 두 개.
“하나는 백정태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백정태의 수하 차명진의 것입니다.”
“…….”
“백정태는 회장님과의 사적 대화를 보험으로 남겼더군요. 그리고 차명진은 백정태와의 대화를 녹음했고요. 서로 물고 물렸습니다. 비겁한 놈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놈 얘기, 듣기 싫다는 겁니다.”
“이, 이, 이, 더러운 잡놈들이.”
“나중에 조용히 듣고 폐기하시지요. 문제는 이런 족속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닐 겁니다.”
“…….”
“걱정 마십시오. 백정태와는 제가 또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그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일,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백정태, 이 더러운 자식. 너 X 된 거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내의 분노를 어찌 감당할래? 복수는 저절로 하게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