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필연은 꼭 이어진다
공사홍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확연히 전과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감개무량하다.
처음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에서 귀국을 결심했지만 모두 말렸다. 귀화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일본에서 살라는 일본 정부의 요청도 있었다.
그가 게이오 대학 재학 중 발표한 몇 건의 논문이 지금 일본 정부의 회계 기준이 될 정도로 탁월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사홍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공항에서 바로 연행되었다. 신분증도 제시하지 않은 시커먼 양복들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곳은 악명 높은 남산.
말도 설명도 없었다. 내게 ‘빨갱이, 간첩 활동 했던 것을 자백하라…….’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 근거는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조총련(재일 조선인 총연합회) 가입. 아버지의 고향이 함경북도였고, 아버지가 조총련에 가입하면서 공사홍의 이름을 같이 올린 것이다. 공사홍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모진 매질 끝에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치료 따위 일체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했다. 오해는 풀렸고, 석방이 되었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관할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시시때때로 찾아와 동향을 체크했다.
거의 노숙자로 살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가게의 점원자리도 잘해 봐야 한 달, 정보과 형사가 다녀가면 공사홍은 쫓겨나길 반복했다.
지친 마음에 잠시 쉬려고 들렀던 연신내의 불광 자비사. 여기만 오면 마음의 위안을 받곤 했기에 자주 들렀지만, 형편이 그래서 불전함에 동전 한 푼 넣어 본 적이 없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이상한 절이다. 아담한 대웅보전 달랑 하나, 구석에 지어진 창고 같은 요사채(승려 숙소) 하나, 그런데 대웅보전의 몇 배는 됨직한 보육원… 너른 마당을 뛰노는 아이들.
부모에게 버림받은 놈들이 어찌 저리 씩씩할까? 신기했다.
“뭐하누?”
멍하니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공사홍의 등 뒤에서 불쑥 들리는 소리.
“…네, 스님. 그냥 있습니다.”
“그냥? 바쁘지 않다는 소리네?”
“…네, 바쁠 게 없는 인생이라.”
“그래, 나 좀 도와줄텨?”
공사홍은 스님에게 끌려가 하루 종일 뺑이를 쳤다. 보육원에 자잘한 일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빨래만 해도 산 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이불과 똥기저귀까지 박박 빨아야 했다.
장작을 다 패고 한숨 돌릴까 했더니, 스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는 걸 보면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스님을 따라 올라간 지붕에서 군데군데 천막을 다시 걷고 비가 새는 곳을 막았다. 한구석에 있는 작은 옥탑방 거미줄도 걷어 내고, 비닐 장판을 새로 깔았다.
그리고 부르는 소리에 나가 보니 스님은 지붕 턱에 앉아 개구쟁이처럼 다리를 까닥이고 있었다. 손짓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앉을 수밖에 없었던 공사홍.
“어때? 좋지?”
“예?”
“여기서 보면 세상이 다시 보이지 않냐고.”
“……!”
“저기 땅하고 여기 지붕하고 겨우 몇 자나 차이가 날까? 그런데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 법이여… 하늘이 더 가깝고, 구름도 손에 잡힐 것 같고, 멀리 보이던 북한산은 눈앞으로 다가오고, 그렇지?”
“아… 네, 좋네요.”
“다 부질없다네. 내려놓고 나면 별거 없어. 하루하루를 산다는 건 억겁의 윤회를 겪는 생과 비교하면 연기와 같은 걸세.”
평소에 눈이 마주쳐도 빙긋 웃어만 주던 스님이 오늘 왜 이러실까.
“저 아래 사바 세계에서 고약한 놈이 한 번씩 자네 소식을 묻더군. 여기 와서 누구 만나느냐? 달리 접촉하는 보살님은 있느냐? 무슨 말을 하더냐?”
“……!”
“다시는 안 올 거야. 내가 그놈 서장을 좀 알거든. 또 형사를 보내면 저주할 거라고 공갈을 쳤어. 그 서장 놈이 그런 걸 유달리 믿는 사람이라서… 헐헐헐.”
“죄송합니다. 제가 청정 도량을 어지럽혔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스님.”
“뭔 소리야? 일해야지.”
“예……?”
“여기 형편이 썩 좋지는 않아. 월급을 많이는 못 주네만 밥 걱정, 잠자리 걱정은 안 해도 될 게야. 오늘 수리한 옥탑방에서 지내게.”
그렇게 절의 식구가 되었다. 스님은 기인이었다. 어떨 때 보면 도력이 한량없는 분인가 하면, 또 어떨 때는 개구쟁이 빰 치는 분이셨다.
평온한 삶이었다. 귀국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유.
공기가 손에 잡힐 듯 피부를 간질이는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대웅보전 한쪽 끝에 달린 풍경이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움직이며 소릴 낸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노래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산사에 녹아든 어느 날, 스님이 작은 강보에 쌓인 핏덩이 아이를 하나 안고 오셨다. 그날부터 스님과 공사홍은 하루의 절반을 아이와 함께 울고 웃었다. 기저귀를 갈고, 똥오줌을 받고, 아이와 함께 세월을 보냈다.
이 아이는 스님과 공사홍에게는 아들이요, 조카요, 친혈육이 되었다.
“어서오십시오. 공사홍 부회장님. 귀빈실을 통하면 번거롭지 않으실 텐데, 매번 이리 오십니까?”
공항 관리 공사의 사장이 손을 비비며 공사홍을 반겼다.
“아닙니다. 우리 회장님도 이쪽으로 입출국을 하는 마당에 전들 도리가 있습니까? 그냥 편하게 해 주시죠.”
“아이고, 여부가 있습니까? 한국을 빛내는 분들인데요.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고국의 하늘은 정겹군요.”
그래… 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아이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여전히 다리를 절름거리며 거리를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공 처사, 인연은 멀리 있는 게 아니야. 너는 장차 크게 쓰일 것이다. 자신을 항상 갈고닦아라.’
스님은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나 같은 퇴물에게 수많은 책을 사다 나르며 정진하도록 채찍질했었다. 그게 지금 공사홍의 철학을 더 튼튼하게 만들었다.
공사홍은 마중 나온 K 미르 그룹의 차를 타고 수행원들과 삼성동으로 향했다.
* * *
“지금 K 타워에 입주한 기업이 7,000개로 늘었군.”
“네, 부회장님. 지시대로 계속 충원을 한 것도 있지만, 벌써 졸업을 하고 독립한 기업들과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인 통계를 주시게.”
“네, 여기 있습니다.”
“호오, 괜찮네. 의외야, 벌써 상장을 성공시킨 회사가 90개라… 대단한데?”
“초창기와 다르게 지금은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졌습니다.”
“정 이사, 너무 걱정 마. 조만간 제2의 증권시장이 한국에도 생길 거야. 미국 나스닥처럼 말이야. 그때를 대비해서 내실을 닦도록 입주 기업들을 준비시키게.”
“제2의 증권시장이 생긴다고요?”
“그래, 회장님의 말씀이니 틀림없을 게야.”
그랬다. 시혁은 알고 있었다.
1996년 증권 협회와 증권 회사들이 공동출자 한 ㈜코스닥 증권시장이 발족한다.
초창기에는 기존의 증권거래소와 분리된 장외거래 주식시장으로 출발하는 코스닥. 증권거래소 건물 안에서 중개인을 통해 직접 주식 거래를 하는 방식을 탈피해 오직 장외에서 컴퓨터와 통신망을 이용해 불특정 다수가 거래에 참여하는 방식.
미국의 나스닥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물론, 먼 미래에는 코스닥과 코스피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우수한 기업들이 코스닥에서 쏟아져 나오게 되고, 코스피와 똑같은 장내 주식으로 변환하고,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지만… 처음 의도는 전혀 달랐었다.
“부회장님, 장외에서만 거래된다면, 그게 무슨 주식시장입니까?”
“지켜보게. 세상의 흐름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속화될 거야. 제2의 주식시장이라고 하지만, 결국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 우리는 미리 대비하면 돼. 회장님의 최우선 지시니 명심하게나.”
“넵. 알겠습니다.”
공사홍은 따로 편철이 된 파일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아직 때가 아닌가?”
“네……?”
“한글로 컴퓨터, 나이버, 낙센… 이 회사들 말이야.”
“…….”
“지금 상황이 어떤가?”
썩 좋지 않구나. 회장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아는 정 이사는 좌불안석이었다. 뭐라 보고를 해야 할지 걱정인 것이다.
“가감없이 다 말해 보게.”
“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거긴 회사라기보다 그냥 놀이터 같습니다.”
“놀이터?”
“네. 하루 종일 컴퓨터를 붙잡고 뭔가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저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고… 회사 분위기가 그냥 놀고먹는 한량들같이 보입니다.”
“푸하하하, 어찌 그리 한 치도 틀리지 않는 것인지.”
“네?”
“회장님도 그리 말했거든. 거긴 그냥 놀이터라고. 그냥 두게.”
“네…….”
“자네, 이런 말 들어 봤지? 아무리 노력해도 머리 좋은 놈을 못 따라가고, 또 머리 좋은 놈은 즐기는 놈을 못 이긴다고. 그런데 말이야. 즐기면서 머리까지 좋은 천재는 진짜 감당 안 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단 말이야.”
“…….”
“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무제한으로 지원하도록 하게. 다만, 자금을 주면서 철저히… 응? 아주 노예로 만들라는 은밀한 지시야. 알겠어?”
“……!”
“왜……?”
“어째서 그 허접한 회사들에 공을 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검증된 기술을 갖춘 회사가 수천 개 있습니다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자네가 회장님일세.”
“…….”
“하여튼 여기 나온 명단 머릿속에 박아 두게나. 이찬정, 김범소, 김정중, 김택장 그리고 송재강과 이해찬. 이 사람들이 관여한 회사에는 무조건 퍼부어 줘.”
“…모두 한국대 85년, 86학번 출신 공대생들이군요.”
“특히 김범소 이 사람이 개발하는 깨톡 메시지 프로그램, 김정중이 개발하는 게임 바람의 국가, 김택장이 만드는 게임 라니지, 마지막으로 이해찬… 이 양반이 지금 시험 공개한 검색 포탈 나이버, 이 회사들은 철저히 사들이게. 노예로 만들란 말이야.”
“윽, 소름 끼칩니다, 부회장님.”
“응, 나도 그래. 회장님은 될성부른 싹을 아예 모종 때부터 낼름 삼키는 것을 좋아하시거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철저히 경영권은 보장해 줘. 절대 그들의 기술 영역에 간섭한다든가, 그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개입할 생각하지 마. 그냥 하나를 달라면 열 개를 준다는 각오로 마구 퍼 줘. 그리고 서서히 회장님의 노예로 만들란 말이야.”
한국 K 타워의 재무이사는 다시금 되새겨 이름들을 외웠다.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에게 찍힌 저 사람들.
“이건 뭔가?”
“네. 그때 재단법인을 맡아 줄 사람들에 대한 리스트입니다. 학벌, 나이, 출신 성분, 모두 배제하고 사회적인 평판, 하는 일 위주로 분류했습니다.”
“오! 그래, 내가 이번에 귀국한 제일 중요한 이유가 이거지. 수고했어.”
“사회 저명인사도 꽤 있습니다. 의외의 인물들도 있고요. 전직 고위 관료, 종교인, 사회 복지 법인 이사, 체육인, 고를 수 있는 모든 인재 풀을 다 뒤졌습니다.”
“내가 좀 자세히 보고 다시 이야기함세.”
공사홍은 다시 천천히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재무이사는 공사홍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방을 나갔다.
장장 500명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였다. 이 자료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철저히 비밀로 하고 대상자들의 주변인들을 살폈다. 주변 사람의 평판이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우니까.
그렇게 사각거리며 파일을 넘기던 공사홍은 얼마 가지 않아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이제 겨우 26살에 천사라. 그것도 험하기로 소문난 청량리 588의 천사.
-고졸, 성적은 중간 정도. 그런데 학교 다닐 때 아이큐가 145라.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보육교사 자격증에 어린이집을 운영한다?
-이건 마치 ‘내 갈 길이 이쪽이다’라고 애당초 작정한 사람 같은데?
정작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왜 이렇게 낯이 익을까?
-굉장히 친숙한 얼굴이야. 아름다운 건 둘째치고, 분위기가 비슷한걸?
조용히 파일을 덮은 공사홍의 생각이 깊어지고 있었다. 뭔가 간질간질한 이 기분.
한번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