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44화 (144/150)

144화 새가 된 백정태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

“지나가다가 좀 도울 일이 있나 싶어서.”

“여기는 어린이집인데요?”

“그냥 돈 많은 영감이 좋은 일에 돈 좀 쓰려고 왔어.”

“할아버지, 그 돈은요. 사회 복지 재단이나 병원 같은 곳에 쓰시면 안 될까요? 여기는 별도 기부를 안 받거든요.”

“왜?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아이들 잘 먹이고, 좀 더 나은 환경으로 바꿔 줄 수도 있고 말이야.”

“음… 맞는 말씀인데요.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헤헤헤. 애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랍니다.”

“……!”

“예, 여기 학부모들이 조금 안 좋은 환경에 처해 있는 건 맞아요. 그렇다고 아이들이 모두 불행한 건 아니거든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

“할아버지의 마음만 받을게요. 너무 감사합니다.”

이 아이, 속칭 588의 천사라는 권혜림이라는 아이, 속이 꽉 차 있다.

조금 더 자극해 보자.

“내가 아무 조건 없이 10억 원을 줘도?”

“…할아버지, 진짜 돈 많으시네요. 부럽다. 그래도 제가 그 돈을 받을 이유는 없어요. 우리 사회에 그런 도움 절실한 곳이 널려 있습니다. 국가가 운영하는 모금회도 있고요. 모르시면 제가 알려 드릴게요.”

“현금을 주지. 영수증도 필요 없고, 그 돈을 어디에 쓰던 일체 상관 안 할게. 어때?”

그제야 얼굴 표정이 조금 바뀐다.

옳지! 어서 속마음을 보여라.

“할아버지, 점심 아직 안 드셨죠?”

“…으응, 아직 안 먹었지.”

“겨우 애들 밥 다 먹였거든요. 찬은 별로 없지만, 같이 드실래요?”

나쁘지 않지. 밥을 먹으면서 좀 더 설득하면 넘어올 것 같다.

“이 멸치볶음하고 장아찌는 길 건너 반찬가게 아주머니가 주신 거고요. 배추김치랑 알타리김치는 김치 공장 사장님이 매주 보내오세요. 그리고 돼지고기도 정육점 아저씨가 듬뿍 주세요. 저는 된장찌개 하나만 끓이면 끝… 헤헤헤. 너무 날로 먹고 있죠? 그래도 많이 드세요.”

“맛있군, 다 정성이 듬뿍 들어간 맛이야. 미원도 안 넣나 봐?”

“예, 애들 입맛과는 조금 안 맞아도 어릴 때부터 조미료에 길들여지면 안 되니까요.”

“아직도 내 돈 받을 생각이 없나? 적다면 더 줄 수도 있네. 말로 끝나지 않고 바로 지점장을 불러 주겠네.”

“네, 전혀 받을 이유가 없어요.”

“왜? 그 돈이면, 걱정 없이 사람들을 고용해서 편하게 애들 잘 먹이고 키울 수 있을 텐데?”

“할아버지 돈은… 꼭 조미료 같아서요.”

“엥?”

“저 반찬을 보내오는 아주머니도, 청량리에 있던 분이세요. 비록 애를 여기 보내지는 않지만, 아픔을 같이 느낀 분이죠. 김치 공장 사장님도, 정육점 아저씨도 모두 청량리에서 손을 끊고 자기 일을 하는 분들이랍니다. 그분들은 이 반찬과 고기와 김치만 보내는 게 아니에요.”

“…….”

“아까 말씀드린 사랑을 같이 담아 보내는 거죠. 헤헤헤.”

세상에 이런 아이가 있었다니… 너무 놀랍다.

단단하고, 야무지면서, 확고한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공짜라고 무조건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금을 눈앞에 디밀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일단 합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이렇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왜, 꼭 오래 봐 온 아이처럼 생각되는 것일까? 분명 처음 보는 아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따뜻해지고,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울까?

“부모님은 뭐 하시나?”

“어머니는 저를 낳으시고 별이 되셨어요. 항상 저를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음… 아버지는 동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이세요.”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것은 익히 알고 왔지만 한 번 더 물었다.

“그래, 만약에 우리 아가씨에게 엄청난…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헤아릴 수 없는 거금이 생긴다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도 행복하게 모실 수 있을 텐데.”

“아이고,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는 제 그릇을 잘 알아요. 딱 지금이 좋습니다. 아이들을 더 받고 싶어도 하나하나 못 챙길까 봐 조심하는걸요.”

“사랑?”

“그렇죠… 과하면 물은 넘치니까요. 아이들은 유리 그릇처럼 예민한 존재랍니다. 금방 알아차려요. 자기가 진짜 사랑을 받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대하는지. 저는 우리 아이들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과연… 청량리 588의 천사라 불릴 만하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늙은 나보다 훨씬 꽉 차 있다. 무엇보다 이 아이의 가슴에는 사랑이 넘실거린다. 편부 가정에서 자란 아이치고는 세상을 너무 따뜻하게 보고 있다.

오늘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식사를 했다. 모두 사랑으로 버무린 음식들이라 그런지… 어떤 오성급 호텔 음식보다 맛있었다.

“아버지 조회가 안 된다고?”

“네, 부회장님.”

“평범한 동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이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경찰청에 협조를 구했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서도 이상하다고 합니다. 전산 조회를 해 봐도 달랑 이름 석 자 말고는 더 접근이 안 된다고 하네요.”

“말단 공무원이 아니란 말이군.”

“그것까지는…….”

“뭔가 음성적인 일을 하거나,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대한민국 정부가 그렇게 말랑말랑한 곳이 아니거든. 특히 지난 정권 동안 사람을 통제하는 데는 도가 튼 정부 아닌가?”

“…….”

“주민등록 제도도 그래. 어느 나라가 이토록 개인 정보를 세밀히 분류하고, 이를 신분증에 기재한단 말인가?”

“주민등록증 말입니까?”

“자네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군. 앞면에는 사진, 식별 번호, 본적, 주소, 호주까지 적혀 있어. 또 뒷면을 봐, 오른쪽 엄지 지문이 찍혀 있고 그 왼쪽 편에 특기 번호가 적혀 있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발급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구 좋으라고?”

“예?”

“개인 신분을 확인하는데 왜 저토록 세밀한 정보를 기록하느냐 이거지. 병역 사항은 남북이 대치하고 있으니까 이해를 한다고 쳐. 왜 삼청교육대 다녀온 사람들도 특수 번호를 주는 건가?”

“……!”

“다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쉽도록 만든 거야. 어느 나라든 가장 기본적인 정보 외에는 각 관련 부서에서 따로 취급해야 하는 게 정상일세. 우리 나라가 특별한 거야.”

“부회장님… 저는 어느 나라나 다 하는 줄 알았습니다.”

“대부분 그리 생각할 거야. 개인정보와 생체 정보를 가장 악용하는 나라 1위가 중국일세. 우리나라는 몇 위인 줄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7위일세. 전 세계 모든 나라 중 7위, 자랑스런 순위가 아냐. 부끄러운 일이지.”

실로 그랬다. 미래에 변경되지 전까지 대한민국의 주민등록 제도는 인권과 거리가 멀었다. 이사를 가도 뒷면에 새 주소를 적어 넣던 시절이었다.

이 주민등록증 하나만 보면 개인 신상을 넘어 가족관계와 고향, 병역 사항과 살던 곳까지 다 알 수 있었다.

“잠시 이야기가 딴 데로 샜지만, 권혜림 씨 아버지가 조회조차 안 되는 사람이라… 많이 이상하네.”

* * *

“회장님, 김시혁과 화해를 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자네도 고생 많았네.”

“저는 삼송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고맙네.”

“저… 회장님, 조문호는?”

“조문호? 이라크 지사로 발령 냈어.”

“…이라크, 말입니까?”

“응, 안 되나?”

“아, 아, 아닙니다. 그놈은 그렇게 당해도 쌉니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삼송 직원이 어디로 발령을 받건 직분을 수행하는 거지. 당해도 싸다니?”

정작 백정이 묻고 싶었던 말은 차명진의 행방이었다. 갑자기 차명진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장교로 팀장을 맡았던 백정태 휘하에 중사로 근무했던 차명진. 오랜 세월 함께 호흡을 맞춰 온 사이다. 절대 말 한마디 없이 종적을 감출 놈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슬쩍 조문호 얘기를 먼저 꺼냈건만, 이건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라크 지사로 발령을 냈다고 한다.

이라크? 몇 년 전 쿠웨이트를 점령했다가 미국에 개처발리고 코를 빠트린 나라 아닌가?

미국에 잔뜩 독기를 품고 있는 이라크, 그 맹방인 한국인에게 우호적일까 싶다. 그런 곳으로 조문호를? 버린 것이다. 완전히 폐기 처분 수순 아닌가?

분위기가 싸하지만 물어봐야 한다. 차명진에게 맡겨 둔 폭탄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라도.

“저, 회장님. 외람되지만, 제 팀에 있던 놈 하나가 조문호 감시자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만…….”

“그래? 모르겠는데? 따로 채널이 없었나?”

“네, 매일 정기적으로 보고를 하던 놈이 갑자기 연락 두절 상태입니다.”

“저런저런, 부하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가? 나중에 비서실장에게 물어 보게나.”

“……!”

이건 좀 아니다.

이건호 회장이 차명진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미국의 한국 대사관에 붙들려 있던 놈을 안기부장에게 직접 전화해 석방시킨 당사자가 바로 이건호 회장이다.

그런 이건호 회장이 차명진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말을 돌려?

제기랄. 뽀록 났구나. 저 담담한 표정 뒤에 숨기고 있는 건… 적의다.

“김시혁과 관련된 모든 작업을 접게. 우리 삼송은 김시혁과 반목한 적이 없어.”

“네……?”

“김시혁 회장의 출생에 대해서도 우리는 관여한 적이 없네. 명심하게.”

“…네.”

“자네는, 이사 대우 부장 직책은 그대로 유지하고, 삼송전자 미국 지사장 보좌역으로 여기 남아 있게.”

“…회장님!”

“국내 정세가 잠잠해질 때까지 그리하게나. 그동안 안기부와 정부를 너무 자극하지 않았나?”

하! 사냥이 끝났나?

그래서 이제 사냥개를 삶겠다는 말인가?

‘흐흐흐, 백정태 꼬라지 뭐 됐네.’

이쯤 되면, 이판사판이다.

“회장님, 저는 비서실 소속입니까? 아니면 미국 지사 소속입니까?”

“무슨 소리야?”

“저는 여전히 회장님의 하명을 수행하는 비서실 특수부 소속인 겁니까?”

“당연하지. 자네와는 같이 일을 도모했던 사이 아닌가?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미국 지사에 있어도 비서실 소속일세.”

거짓말이다. 순간 이건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차명진은 당했구나. 그래서 조문호를 잽싸게 이라크로 던져서 차단한 것이다.

누가 차명진을?

삼송이 아니라면… 남는 건 딱 하나.

김시혁이 선수를 친 것이다. 차명진은 암시장에서 글록을 샀다며 보고를 해 왔다. 차명진도 수많은 사선을 넘은 닳고 닳은 요원 출신이다. 그런 차명진을 제압할 사람, 김시혁의 그림자 조직이 아니면… 없다.

존나 외롭네.

회장의 입에서 인사 명령이 떨어진 이상, 미국 지사에 남아야 한다. 거부하면 삼송을 나가야 한다. 다시 거친 황야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뻔한 결말이다. 결코 해피 엔딩은 아닐 것이다.

김시혁과 이건호는 손을 잡았다. 옆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이자룡의 표정이 증명한다. 전처럼 초조한 모습이 아니다. 다 내려놓은 듯, 숙변을 다 본 것처럼 편안하다.

그럼, 어차피 황야다. 삼송에 있으나, 삼송을 나오나.

* * *

뉴욕의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이건호와 이자룡을 배웅한 백정태는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맨해튼의 시티은행으로 향했다.

“계좌 조회 부탁합니다.”

“오! 블랙 카드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고객님.”

“네.”

가장 급한 것은 자금의 확보다. 신분을 세탁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조력자를 구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고객님, 확인되었습니다.”

“잔액이 얼마나 됩니까?”

“네, 고객님. 2,400만 달러가 있습니다.”

됐다. 아직 이것까지 막지는 않은 것이다.

“전액 인출해 주세요.”

“네……”

“2,400만 달러 전액 현금으로 출금해 달라고요.”

VIP실의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고객님, 이 계좌에 락이 걸려 있는데요?”

“……!”

“현금 인출을 막아 뒀습니다. 다만, 지금 주신 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조건이네요.”

“왜, 어디서 락을?”

“이 계좌가 원래 그렇습니다. 쓴 금액만큼 자동으로 채워지는 리볼빙 개념의 무한대 계좌이긴 하지만… 이 자금을 개설한 삼송그룹 재정 부서에서 조건 변경을 했군요.”

꼼짝없이 잉어꼬리를 잡혔다. 현금 인출은 안 된다. 카드로만 써라. 모든 행적을 감시하겠다… 이거네?

‘흐흐흐, 새 됐네. 백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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