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저절로 굴러 들어온 꿀단지
시혁은 거의 매일 메트로폴리탄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거의 모든 의료진이 마이다스 킴을 알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의 유명인사 아닌가?
이 병원은 시혁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입원을 하더니, 전 세계 넘버원을 놓치지 않는 메릴랜드의 존스홉킨스 병원 의료진이 통째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최신 의료 장비도 그대로 따라왔다.
메트로 폴리탄 병원에도 VIP용 별실이 있지만, 지금은 단 한 명의 환자를 위해 통제되었다. 주위는 이중 삼중의 방어선이 펼쳐졌고, 모르고 접근한 NYPD(뉴욕 경찰)가 바로 돌아갔다. 백악관 SS(비밀 경호국)라는데 누가?
“킴 특보님, 죄송합니다.”
“최대한 얼마까지 가능합니까?”
“현재 의료 수준이란 게 감기도 완전히 못 고칩니다.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모친께서 지금까지 생존하신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건 환자 스스로 반대하잖습니까?”
“네, 한국에서 어쩌다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오셨을 때 그런 의견을 남기셨답니다. 수명이 다하면… 그냥 죽도록 해 달라고.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니 더 좋다고.”
말을 하고 보니 울컥 치솟는다. 어머니는 유언처럼 그렇게 기록을 남기셨다. 그리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손을 쥐어도, 눈앞에서 눈물을 흘려도 알아보지 못하신다. 서럽다.
“회장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응. 어디로 모셨나?”
“네. 102층 서재입니다.”
마침내 시혁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고 말았다. 뉴욕 최고의 랜드마크 빌딩이자 미국 마천루, 역사의 상징적인 건물.
1931년 지어진 이래 39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위용을 과시하던 곳. 미국인들에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자긍심을 고취하는 최애 장소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킹콩’이 빌딩 꼭대기로 올라가는 명장면과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주인공 남녀가 뉴욕 야경을 배경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곳으로 등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항상 만성적인 공실률에 시달리는 빌딩이었다. 지랄맞게 비싼 임대료 때문이다. 거기다 미합중국 육군 소속 B-52 폭격기가 짙은 안개로 빌딩을 들이받는 사고도 있었다.
이 사건이래 보기는 멋진데 막상 입주하기는 꺼림칙한 건물로 인식되어 임대가 안 되는 데 한몫했다.
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브로드웨이까지가 뉴욕 맨해튼 5번가로 불린다. 평방미터당 수억을 호가하는 곳이다.
그래도 시혁은 결국 뉴욕시와 협상 끝에 악명 높은 95번 고속도로를 확장해 주는 조건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손에 넣었다. 이젠 엠파이어 스테이트 & K 미르 빌딩으로 바뀌었다.
그 꼭대기 102층.
“멋있는 곳입니다, 마이다스 킴.”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뉴욕과 맨해튼의 야경을 보면서 책을 읽는다… 진짜 낭만적입니다. 꿈을 이루셨군요.”
“미스터 찰스 커럼 로스차일드. 아랍식 커피 한잔 드시겠습니까?”
“…….”
“모욕을 주려는 건 아닙니다. 이슬람과 적대적인 것도 압니다. 그래도 제가 꽤 아랍식 커피를 꽤 잘 내리죠. 한잔 드셔 보겠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아랍 사람들.
물과 커피 가루를 같이 끓이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커피 원두 2스푼 정도를 긴 손잡이가 달린 구리 용기(ibriq)에 물과 함께 끓인다.
이때 원두를 살짝 가볍게 볶는 정도로 로스팅을 한다. 끓이면서 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브리크에 담긴 커피가 거품과 함께 끓어오르면, 한 번 살짝 저은 후 내려놓는다. 이를 세 번 반복한다. 진짜 성질 급한 사람은 못 하는 작업이다.
“드시죠. 향이 깊고 강합니다. 반면 우리가 알고 마시던 커피와는 다릅니다. 쓴맛 뒤에 올라오는 구수한 느낌, 이게 일품이죠.”
“네, 듣고 보니 또 그렇게 생각되기도 하네요.”
“급하게 마실 수 없는 커피입니다. 가루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려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안에 가루가 빨려 들어와 귀찮죠.”
시혁이 만나고 있는 사람은 찰스 커럼 로스차일드. 전 세계 유태인의 정신적 지주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당대 가주다. 대충 봐도 90은 훌쩍 넘긴 나이… 시혁이 청한 게 아니라 가주가 요청한 만남이었다.
“우선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우리 독일의 본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네. FRB와 한 약속이었으니까요.”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약속을 깨는 쪽은 항상 강자였습니다. 약자는 깰 방법이 없죠. 그런데 승리를 움켜쥔 이후에도 철저히 그 약속을 지켜 준 것에 감사드리는 겁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러나 시혁은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는 로스차일드 가주를 향해 거꾸로 되물었다.
“무슨 뜻인지……?”
“저는 10조 달러(1경)을 동원했습니다. 그중에 독일을 회생시키는 자금은 2조 달러였죠. 귀 가문에 그 돈이 없었습니까?”
“……!”
“대충 로스차일드 가문의 전 세계 자본은 50조 달러(5경)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조 달러 정도는 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 보는데요.”
상당히 충격이었나 보다. 로스차일드 가주는 입을 닫아 버렸다.
“복수였습니까?”
“…….”
“제가 오히려 방해한 것인가요?”
“…….”
“맞군요. 이제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만나자마자 아랍식 커피를 권하더니, 단숨에 속살을 파헤치고 소금을 뿌린다.
그를 만났던 많은 이들이 충고를 해 왔다.
‘속일 상대가 아니다’, ‘그와는 싸울 생각하지 마라’, ‘친구가 안 된다면 최소한 적으로 만들지 말아라.’
들은 그대로다.
“마이다스 킴, 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 다 맞습니다.”
“네.”
“우리 유태인들은 디아스 포라(세계 각국에 흩어진 유태인) 상태로 2천 년을 살아왔습니다. 겨우 이스라엘을 건국했지만, 너무 뼈 아픈 박해를 받아야 했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태인 대학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600만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인 중 70%가 숨진 거죠.”
“네.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우리도 독일이 패망한 후, 복수를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명 ‘담 예후 디 나캄(유태인의 피에 대한 복수) 작전’이라 명명되었습니다. 독일의 상수도에 독을 풀어 최소 60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을 죽이려 했습니다.”
“…….”
“실패했어요. 한 요원이 변심했습니다. 나치와 무고한 독일인까지 다 죽어야 한다는 어쭙잖은 인간애의 갈등을 이겨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투입된 50명의 유태인 중 몇 명을 제외하곤 또 다들 죽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살아남은 나캄(복수) 대원이었군요. 미스터 찰스 커럼 로스차일드.”
“그렇소. 바로 내가 살아남은 나캄의 비밀 요원이었소.”
슬픈 역사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이 아랍식 커피, 은근 중독성 쩌네요. 한 잔 더 마실 수 있습니까?”
“네, 얼마든지.”
둘은 한동안 커피를 마시는 데 열중했다. 가루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며 한 모금, 한 모금.
“왜 제가 편하고 맛도 훌륭한 서구식 커피를 드리지 않고, 복잡하면서 불편한 아랍식 커피를 대접했는지 이해하십니까?”
“모르겠습니다, 마이다스 킴.”
“분노는 가라앉히기 힘듭니다. 분노는 복수의 근원, 모두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
“커피 가루가 가라앉지 않으면 마시기 힘든 게 아랍식 커피예요. 복수… 저도 한동안 매달렸던 일입니다. 너무 처참하게 당했거든요. 그렇다고 아랍식 커피처럼 가루까지 마시는 건 지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루는 가라앉히고, 맑은 물만 마시기로 말입니다. 가루는 나중에 똥통에 버리면 됩니다.”
“…….”
“모든 독일인을 죽인들 유태인의 복수가 완성될까요? 600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죽었으니, 그 이상을 죽여야 시원할까요? 마지막 순간에 독을 풀지 못한 나캄 대원… 혹시 당신 아닙니까?”
말문이 딱 막혀 버린 찰스 커럼 로스차일드.
마치 귀신을 보는 표정으로 변했다. 어쩜 이렇게 콕콕 집어 내는 것인가?
“걱정 마십시오. 저는 과거의 나치와 현재 독일 어느 쪽 편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대화는 이 서재를 나가지 않습니다. 약속하죠.”
“어떻게… 알았습니까? 지금껏 제 아내조차 모르던 일입니다.”
“훗! 동병상련. 우리는 비슷한 병과 아픔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마이다스 킴이 앓고 있는 건 어떤 병이오?”
맨해튼이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그러나 맨해튼의 밤은 낮보다 더 아름답게 빛난다.
그 야경을 바라보며 시혁이 입을 열었다.
“복수라는 병 그리고 허무함이라는 아픔.”
“…….”
“로스차일드는 위대한 가문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유태인의 정신적 기둥이죠. 그리고 실제 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가 유태인이라면 ‘선택과 집중’을 택했을 겁니다.”
찰스 커럼 로스차일드도 시혁의 눈길을 따라 뉴욕 야경을 바라보았다. 둘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한국 말 중에 ‘나는 한 놈만 팬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근데, 실상은 진짜 무서운 말이죠. 두들겨 맞는 한 놈은 얼마나 공포스럽겠습니까?”
“…….”
“독일이 실제 전범으로 처리한 사람이 몇 명이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1급 전범 24명 가운데 13명만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2급 전범 185명 중 25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나치에 소속돼 기소된 350만 명 중에서 250만 명은 그냥 풀려났습니다.”
“…….”
“100만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4년 동안 어영부영하다가 실제 감옥에 수감된 사람… 300명에 불과합니다.”
“마이다스 킴은 저보다 우리 역사를 더 잘 알고 있구려.”
“그때 빠져나간 놈들만 골라서 패세요, 모든 독일인을 멸망시키려 하지 말고.”
이제야 시혁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고개가 번쩍 들렸다.
“통일이 된 독일을 더 혼란에 빠지도록 뒤에서 조장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통일 국채를 매입하는 걸 막지 않았습니다. 그건 옛날 상수도에 독을 풀지 못했던 그 죄의식과 똑같은 마음일 겁니다. 왜 지금 와서 그때도 하지 못했던 실수를 번복하는 겁니까?”
“……!”
“선택하고 집중하세요. 정작 벌을 받아야 하는데 다 빠져나간 놈들이 있잖습니까? 당연히 벌을 줘야죠.”
“암살단이라도 운용하란 말입니까?”
“하하하. 농담이라면 성공했습니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 밝은 세상에서 어찌 복수를 하란 말이오?”
시혁은 로스차일드의 커피 잔을 다시 채웠다.
“돈 많잖습니까? 돈이면 유령도 부린다고 하는데, 왜 그리 쓸 줄을 모릅니까?”
“…….”
“당시 진짜 악질 나치 부역자들을 선별하세요. 그리고 그의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드세요. 그의 인생과 남은 삶을 박박 찢어 주세요. 돈은 총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총질은 숨거나 피할 수 있지만 돈질은 숨지도 피하지도 못합니다.”
“……!”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주위 모든 사람이 떠나고, 홀로 외롭게 죽어 가도록 만드는 거… 어렵나요? 그 많은 돈을 퍼붓는데? 총질 한 방에 죽이는 것보다 두고두고 고통을 겪도록 만드는 거… 이게 진짜 복수죠.”
‘내가 백정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로스차일드는 멍한 표정이다. 입가에 침도 흘린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래서 마이다스 킴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것이었어. 왜 모두가 이 사내를 두려워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절대 이 사내와 적이 되면 안 되겠다. 아무리 로스차일드 가문이 더 돈이 많아도 쓸 줄 아는 사람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백전백패할 것이다.
“마이다스 킴, 내 후손 한 명을 보낼 테니 좀 데리고 있으면 안 되겠소?”
“왜요?”
“돈을 버는 법은 충분히 알지만 쓰는 법을 몰랐구려. 좀 가르쳐 주었으면 합니다. 그 대신 마이다스 킴이 요구하는 어떤 것도 로스차일드는 거절하지 않으리다.”
호오… 스스로 자폭하네?
내 다음 목표는 달러를 손에 쥐는 것. 그런데 어떤 요구 조건도 다 들어준다고?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름까지 걸었다.
꿀이지,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