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한부철강, 그 비극의 씨앗
“험, 험, 쉽게 갑시다.”
“정 회장님, 아무리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지만,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뭐요? 다 정해진 결론 아니외까? 일개 은행장이 비토한다고 바뀔 내용이 아니에요.”
“…….”
누구길래 시중은행장을 앞에 두고 ‘일개 은행장’이라 부르며 모욕할 수 있을까? 또 그걸 당연한 듯 듣고 있는 은행장도 놀랍다.
“제이 은행과 조홍 은행 컨소시엄에서 책임지시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요.”
“회장님, 처음에는 1조 원만 있으면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미 1조 원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런 판국에 또 2조 원을 달라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 은행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게 아닙니다. 한계에 봉착했단 말이에요.”
“하여튼, 다음 달까지 내주세요. 안 되면 우리 한부철강은 부도를 내겠습니다.”
“아이고, 회장님. 제발 그놈의 부도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무슨 전가의 보도도 아니고 뻑하면 부도낸다고 윽박지릅니까?”
웃긴다.
은행에서 돈 몇 푼 빌리려면 갖은 서류를 다 떼서 바치고, 행원들에게 사바사바해야 한다. 담보로 부동산을 맡겨도 그냥 주지 않는다. 현장 답사를 한답시고 나오면 슬그머니 뒷주머니에 봉투를 꽂아 줘야 한다.
대출이 나오는 순간 차장과 지점장에게 따로 수수료를 준다. 거의 공식적으로 5%를 떼먹는다. 그 돈도 온전히 나오느냐?
아니, 10%는 정기적금 형식으로 꺾어 버린다. 소위 꺾기 대출이다.
그렇게 험한 장애를 넘어 손에 쥐는 사업 자금이라야 겨우 80% 남짓. 이게 웃픈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건 저 밑바닥 서민이나 중소기업 사장들의 입장이다. 고래가 되면 다르다. 갑과 을이 뒤집힌다.
대오그룹 김오중 회장이 말했던 유명한 말, ‘대마불사(大馬不死)’… 말들이 모여 큰 무리를 이루면 절대 죽지 않는다는 바둑 용어였지만, 기업에도 적용되곤 했었다.
작은 조약돌에게 은행은 절대 갑이나, 대마에게는 오히려 은행이 을로 전락하는 희한한 상황이다.
지금이 딱 그 모양새였다.
재계 서열 14위, 한부그룹의 정태순 회장은 배째라 신공을 발휘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아무 대기업이나 이런 대담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다 연줄이 있어야 가능한 일. 쉽게 말해서 뒷배가 여간 든든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 위에서 지시가 안 내려왔습니까? 내가 듣기로 얘기가 됐다던데?”
“물론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는 말씀은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무리한 금액일 줄 몰랐어요. 회장님, 재고 바랍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미리 세금 다 냈으니 알아서들 하시오.”
미리 세금을 다 냈단다. 정치자금이 되었건, 뇌물이 되었건 물 칠 곳에 다 뿌렸단 말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행장인들 버틸 수 없다. 은행장을 나라에서 직간접적으로 임명하는 시절이다. 더 버티면 자기 목을 내놔야 한다.
제이 은행장과 조홍 은행장은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빨리 돌아가서 여신 부서장을 불러 또 조져야 한다. 하아… 할 짓이 아니다. 제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 쓰듯 정치인들 입맛대로, 청와대 마음대로 휘둘리는 이 신세.
“아버지, 말들이 많습니다.”
“시끄러, 어떤 놈이 감히 입방정을 떨어? 찢어 버릴 테다.”
“지금 수서지구 특혜를 두고 뒷담화가 장난 아닙니다. 그런 판에 무리하게 한부철강을 밀어붙이십니까?”
“이놈아, 언제 백운 거사 말이 틀린 적 있더냐?”
한부그룹 회장 정태순은 원래 하급 세무 공무원 출신이다. 그는 뼛속까지 무속 신앙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백운이라는 점쟁이의 말대로 했던 사업은 다 성공을 거뒀다. 덕분에 재계 서열 14위의 대그룹을 일궜다.
-정 처사.
-예, 백운 거사님.
-당신은 공무원이 안 어울려.
-그럼, 제가 뭘 해야 됩니까?
-당신은 무조건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할 상이야.
정태순은 백운 거사의 말 한마디에 바로 세무서를 나왔다. 그러잖아도 눈에 봐 둔 먹잇감이 있었던 차였다. 광산주가 급사하는 바람에 폐광이 된 물건을 겨우 두 달 치 월급을 주고 인수했다.
이게 대박이 난 것이다. 마침 미국에서 몰리브덴 생산을 중단하자 이 노다지 광산은 단번에 엄청난 돈을 벌어 주었다. 운빨은 타고났다.
-다음은 뭘 하면 되겠습니까?
-흙 다음은 땅이지.
-땅? 부동산 말입니까?
-내가 그것까지 천기누설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마침 강남이 개발된다는 작은 정보가 있긴 있었다. 정태순은 주머니에 몇 개의 봉투를 넣고 세무 공무원 시절 알고 지내던 경제기획원 직원들을 불러냈다.
-뭐야, 이거?
-어허… 그냥 집에 가서 아이들 장난감이나 사 줘.
-장난감 사기에는 너무 얄팍한데?
-왜? 내가 만 원짜리 넣었을까 봐?
-흐익!
상대는 보통 백만 원을 기대하고 나왔다면 정태순은 거기에 항상 ‘0’을 하나 더 붙인 돈을 안겨 주었다. 효과는 직빵이었다. 흡사 자기 일처럼 일사천리로 처리되곤 했었다.
정태순은 블루오션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경쟁이 심화된 중심가는 쳐다보지 않았다. 변두리 쓸모가 없어 보이는 땅 위주로, 그것도 덩어리가 몇 천 평, 만 평 단위로 사들여 개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블루오션 정책은 대박으로 돌아왔다. 처음 구로구에 아파트를 지어 돈을 조금 벌자, 강남으로 진출해 대단지 금마 아파트를 올렸다.
역시 탁월한 선택, 백운 거사의 말은 틀림없었다. 미분양으로 텅텅 비어 있던 금마 아파트는 2차 오일 쇼크를 맞으면서 안전 자산으로 여겨진 탓에 20일 만에 완판되었다. 금마 아파트에서 근 2천억 원을 벌었다. 연이어 대치동 마도 1차, 2차 아파트도 성공했다. 진짜 운발은 끝장이다.
이제 배가 빵빵해졌다. 재벌 행세도 먹히고, 어딜 가도 상석에 앉을 정도가 되었다.
욕망이 그렇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법이다.
눈을 돌려 더 큰 땅, 더 대단지 아파트를 지을 곳을 찾아 헤매다 발견한 어마무시한 땅, 수서지구.
그런데 강남과 달리 자연녹지 지역이다.
개발제한구역과 자연녹지는 약간 개념이 다르다. 아예 개발 자체를 못 하도록 꽁꽁 틀어막은 것이 개발제한구역, 그에 반해 개발은 할 수 있으나 조건이 까다로운 곳이 자연녹지.
상관없어. 지금보다 더 봉투를 빵빵하게 돌리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가만 보자, 빈틈이… 공영주택 공급을 위한 공공 개발은 가능한 곳이네?
편법으로 정태순은 직장 무주택자 조합 수십 개를 결성했다. 대부분 경제 기획원, 농림수산부 같은 공무원과 산업은행 같은 금융기관 종사자 명의를 빌려 만들었다.
날아다니는 돈 봉투, 전보다 훨씬 더 두툼하게 수표로만 담아 관련 기관에 날렸다. 현금이 아니면 안 받는 공무원들도 정태순의 수표는 받았다. 먹어도 뒤탈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런데.
웬걸?
서울시에서 빠꾸를 맞아?
오냐, 죽어 봐라.
이번에는 청와대와 건설부, 여야 국회의원, 국회 건설 위원회 같은 권력의 실세들에게 또 날렸다. 전보다 더 두툼하게 채워서.
심지어 당시 권력의 최고 정점 노태후 대통령에게도 150억 원을 밀어넣었다.
로비는 결국 성공했다. 3만 5,500평에 아파트 건설 허가를 받아 냈다. 돈 앞에 장사 없다는 철칙이 먹힌 것이다.
-다음에는 뭘 하면 성공하겠습니까?
-정 처사, 당신 사주에 의하면 무조건 쇳가루를 만져야 큰 돈을 벌 수 있어.
-쇳가루? 철 말입니까?
-내가 그런 것까지 천기누설을 할 수 있겠나?
제기랄. 천기누설은 개뿔… 물가에 가면 위험하다, 이 정도 말해 주는 건 길거리 복채 할아버지도 다 한다. 그러나 이미 무속에 깊숙이 빠진 정태순은 일개 점쟁이의 말을 맹신하고 있었다.
쇠? 철을 다루는 사업이라… 그렇다면 무조건 제철소지. 내가 쪽팔리게 철물점을 할 수는 없는 일.
그렇게 시작된 것이 한부철강이었다. 한심하다.
정태순 자신도 1조 원이면 완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부그룹은 철강 사업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점점 건설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조 원을 쏟아부었지만, 전혀 공사는 진척이 없었다. 문제는 이 돈이 백 퍼센트 차관이었다는 것. 은행의 순수한 자기 돈이 아니란 말이다.
“아버지.”
“또, 왜?”
잔뜩 화가 난 정태순. 말끝이 날카로웠다.
“그게 아니라, 형철이와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 얼마나 주랴?”
“조금 많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줘라. 아예 ‘0’을 하나 더 붙여서 줘라. 먹은 놈이 똥 싸는 법이다.”
“그런데… 김양삼 대통령에게 그 돈이 갈까요?”
“뭔 상관이야? 다 한통속이지.”
“제 생각에는 김양삼 성격상 절대 돈을 안 먹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상관없다. 자식 버리는 애비도 있더냐? 거기다 지금 김형철이 만든 ‘여의도 정치 연구소’에서 장관들 면접을 먼저 본다는 말이 돌 정도다. 김형철이 이 정권 최고 실세임에는 틀림없다. 나머지 차관을 얻어 올 수 있다면 뭘 망설여? 막 퍼 줘라.”
결국 한부그룹이 무너지는 1997년 1월까지 한부철강 건설 명목으로 5조 7천억 원의 차관이 들어갔다. 그래도 완공조차 하지 못한 빈 껍데기 공장으로.
97년 당시 5조 7천억 원이면 2022년 기준으로 30조 원이 넘는다. 한 기업에게 이 정도의 차관을 퍼 준 것이다.
누가? 그런 권한을 줬는가? 차관은 빚이 아니던가?
정작 정태순은 이 차관을 한부철강 공장 건설에 쓰지 않았다는 사실. 10%도 채 안 썼다. 모두 땅 사고, 엉뚱한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을 핑계로, 루마니아 광산을 핑계로 뭉텅이 돈을 스위스 비밀 계좌로 빼돌렸다.
결국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전부 정부의 빚을 땡겨 껍데기 공장을 건설한 것이다. 알짜배기 현금은 모조리 외국으로 빼돌리면서.
단군이래 최악의 대출 로비 사건이 이미 씨앗을 태동하고 있었다.
* * *
“돈이 없네? 흐흐흐.”
카드로 특급 호텔을 잡고, 룸서비스를 시켜 먹고, 리무진을 불러 바람 쐬러 나가고… 별 지랄을 다 할 수 있지만, 손에 현금이라곤 동전 몇 센트뿐이다.
시티은행의 블랙 카드는 사용 한도가 있다. 상한선이 아니라 하한선이 있다는 말이다. 웃기는 말이지만 블랙 카드는 전담 직원이 관리한다. 어느 정도 사이즈 있는 지출은 일절 간섭을 하지 않지만, 백 달러, 이백 달러의 결제 승인이 들어오면 바로 확인 전화를 날린다.
-고객님, 이 카드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인가요?
-그렇소만.
-인증번호를 다시 불러 주시겠습니까?
-내 목소리 몰라요?
-압니다. 하지만 블랙 카드로 소액 결제를 하시면 의무적으로 확인하게 되어 있어서요. 규정입니다.
-…….
이런 꼴을 한두 번 당하면 다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속옷도 사야 하고, 한국 음식점도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 현금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술집도 아닌데 골든 벨을 울릴 수는 없는 노릇.
백정태는 그저 호텔에 처박혀 본의 아닌 호캉스를 하는 중이다. 한 번은 답답한 마음에 캐나다행 일등석 항공권을 끊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출국을 제지당했다.
-이유가 뭐요?
-말해 줄 수 없습니다.
-내 여권이 이상한 겁니까?
-귀하의 코리아 여권은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막습니까?
-귀하는 미국을 벗어날 수 없어요. 출국 금지 상태요. 국내선도 탈 수 없습니다.
-X발, 그럼 출국을 금지한 이유나 금지한 기관을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니오?
-그럴 고지 의무가 없어요. 돌아가시오. 거부하면 공항 경찰서에 구금하겠습니다.
이건호 회장의 직통 전화는 아예 번호가 없어졌다. 비서실장 이학소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일반 번호로 비서실에 전화를 하면 일개 대리가 회의 중이라는 앵무새 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미국 지사장도 마찬가지.
아무리 찾아가 악을 써 봐도 요지부동이다. 월급도, 체류비도 백정태 부장의 계좌로 들어가는 것을 어쩌라는 말이냐… 한다.
그 계좌는 시티은행 계좌와 연동되어 있다. 지난날 월급은 쳐다 보지 않았던 백정태. 후회해 본들 답이 없다.
‘존나 외롭다. 꼴 좋게 되었다, 백정태. 큭큭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