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엘리 로스차일드
벌써 2년이 흘렀다.
그동안 시혁의 동선은 고정되었다. 한 번도 외부 출입을 하지 않았다. 오직 어머니 곁에만 머물렀다.
한국 현도 병원 원장과 의료진, 뉴욕 매트로폴리탄 병원 의료진, 거기다 매릴랜드의 존스홉킨스 의료진까지 최고의 의사들이 24시간 지켜보는 중이다.
“원장님, 오셨습니까?”
“네, 회장님. 오늘도 자리를 지키십니까?”
“아들이니까요.”
“물론 회장님의 사랑과 정성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이 슬픈 말은 간병하는 사람도 조금씩 쉬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환자를 위한 말도 됩니다. 이렇게 버티는 상황이 환자에게 과연 행복할까? 아닐 수 있습니다, 회장님.”
고마운 사람이다. 정조영 회장에게도 건강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를 안 하는 고집스런 명의다. 원장의 말은 그만 보내 주는 것이 환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인간적 고뇌가 내포된 것이다.
“지금 모친은 의학적으로 식물인간과 똑같습니다. 코마(coma)라고 하죠. 눈은 뜨고 있지만, 의식불명에 혼수상태로 봐야 합니다. 솔직히 왜 눈을 뜨고 있는지조차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현상입니다.”
“그럼 아예 산소 마스크마저 떼자는 말입니까? 원장님 같으면 그럴 수 있으세요?”
시혁이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원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시혁 회장님, 나도 어머니를 그렇게 보냈어요.”
“……!”
“몇 달을 고민했죠. 그래도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가진 상태로 모시는 게 더 효도 아닐까……? 결론은 ‘아니다’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신체 장기의 활동이 거의 멈췄는데 억지로 산소를 주입해서 심장을 돌린다? 이건 거꾸로 생각하면 고문과 다름없어요.”
“…….”
“그만 보내 주세요. 그게 진짜 효도예요.”
“안 됩니다, 원장님.”
“그 결정은 누구도 못 해요. 오직 가족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박혜선 환자의 유일한 혈육은 김시혁 회장이시고.”
안락사와 뭐가 다르랴? 시혁은 도저히 원장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손을 잡으면 온기가 느껴지는데… 정신은 없지만 눈을 뜨고 있는데… 그걸 보고 느끼면서 어찌 산소호흡기를 떼란 말인가?
공사홍이 들어오며 시혁과 원장의 대화는 끊겼다. 타인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인 까닭이다. 원장은 다시 한번 시혁에게 애잔한 눈길을 보내고 병실을 나섰다.
“삼촌, 다녀오셨어요?”
“응, 어머니는 여전하시니?”
“네. 잠자는 숲속의 왕비처럼, 하하하”
웃음이 너무 공허하다. 공사홍은 시혁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기 힘들었다.
“가신 일은요?”
“음… 뭐라 그럴까? 수많은 대상을 모른 척 살펴봤다. 좋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숨은 의인도 많고.”
“암요. 그런 분들이 사회를 받치니까 그나마 대한민국이 건강하게 돌아가는 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공직자와 성직자 그리고 유명 사회 복지 법인의 이사장 중에는 적절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한결같이 뒤가 구리다. 썩은 내가 진동해.”
“…….”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사람들, 그런 분들이 훨씬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더구나.”
“지난 2년 동안 수십 번 다녀오면서도 아직 결정을 못 했습니까?”
“시혁아, 자그마치 10조 원의 자금을 기반으로 출발하는 재단이다. 여기 수장을 잘못 앉히면 후폭풍이 정말 만만찮을 거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네 뜻이 왜곡될 수 있어.”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의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자본금이 얼마냐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김시혁이 돈만 긁어모으는 샤일록이 아니라 이를 통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첫 단추를 꿰는 재단이다. 한국에서 시작하지만, 미국에서도, 나아가서는 세계 곳곳에 지부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그런데 탐욕과 개인적인 욕심을 가진 인사가 이사장에 선출되면 엉망이 되고 만다. 이걸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가뜩이나 신중한 삼촌의 눈에 차는 사람… 쉽지 않을 것이다.
“시혁아, 잠시 한국에 다녀오지 않을래?”
“왜요……?”
“긴 병 끝에 효자 없는 법이다. 네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휴가를 달리 가더냐? 재충전을 하기 위해서다. 좀 쉰다 생각하고, 세 명으로 압축해 놓은 사람들 네가 직접 면담해 봐라. 이제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
“모친은 원장님이 워낙 바늘도 안 들어가는 꼬장꼬장한 분이니 잘 보살필 것이다. 좀 쉰다 생각하고 최종 면접을 봐 줬으면 한다. 더 미룰 수 없어.”
원장과 삼촌의 말이 겹친다. 시혁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 * *
전용기의 원형 창문 아래로 구름이 넘실거린다. 토끼 같은 모양, 강아지 같은 모양… 마지막으로 생매장당하던 날 드러누워 쳐다본 하늘도 그랬다.
하지만 이젠 그 구름을 내려다보며 귀국하고 있다.
삼촌의 말이 맞았나 보다. 지금껏 시혁은 편한 전용기에서도 잠들어 본 적이 없다.
일종의 강박이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하고 보다 더 각성하기 위해 편하게 잠들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특히 비행기를 타면 더.
“회장님, 홍차 드세요.”
“응, 고마워. 엘리.”
지난 2년 동안 변한 게 있다면, 수행 비서진에 여자가 한 명 추가되었다는 것.
인형 같은 외모,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얼굴, 키도 거의 시혁의 이마에 닿을 정도다. 예일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에 하버드에서 박사까지 받았다.
산드라 리페어 몽고메리는 지금도 독일의 유럽 중앙은행에서 산더미 같은 서류에 쌓여 있을 것이다. 윌슨을 붙여 놨으니 더 안심이다. 그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워 주는 엘리 로스차일드.
약속한 대로 찰스 커럼 로스차일드 가주는 자신의 손녀를 시혁에게 보냈다. 엘리는 도착한 다음 날부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밑바닥 서류 복사부터 맡기 시작했다. 커피 심부름은 당연한 듯 해냈다.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행동. 집안은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곳이고, 예일과 하버드까지 최고의 교육기관을 마쳤으며, 모델을 오징어로 만드는 외모를 가진 여성이… 거침없이 허드렛일을 수행했다.
자연스럽게 시혁의 주변인들은 그녀를 인정해야 했다.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었으니.
-엘리, 컬컴 기술 분석 보고서 어디 있는지 알아? 파일 말고, 미국 전자협회의 하드카피로.
-네, 94층 자료실 BF 337-28번 섹터에 있어요.
-그럼, 엔바디아의 GPU 마켓쉐어에 대한 향후 전망 요약본은? 이것도 1급 비밀이라서 어딘가 있을 텐데, 목록에서 빠져 있네?
-98층 보안 구역 9803호실, 다섯 층의 선반이 있고요. 그중 두 번째 선반 여섯 번째 열에 가면 있습니다. 다만, 미리 경영전략실장이나 박사홍 대표님의 승인을 받아야 문이 열린다는 사실 명심하세요.
-엘리, 전년도 세븐시스터즈 수익 자료가 조금 틀린 것 같아. 여기 파일에 있는 것과 엘리의 보고서 수치가 다른데?
-총매출 7조 2천억 877만 646달러, 세전 이익은 1조 3천억 949만 206달러, 순이익 8천억 879만 218달러… 이게 맞습니다. 이익 잉여금이 조금 과다 계산되었어요. 그걸 바로잡은 겁니다.
이 정도면 똑 부러지는 게 아니라 거의 AI 수준이다. 그래도 엘리는 근 6개월을 잔심부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혁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엘리가 낙하산이라는 사실은 K 미르 그룹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박사홍이 굳이 감추지 않고 나불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의 직속상관 대리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게 시혁이 정착시킨 그룹의 분위기다.
임원 회의를 하면 전처럼 달랑 몇 명이 마주앉는 게 아니다. 수십 명이 모인다. 또 확대 간부 회의라도 열면 수백 명이 바글거린다.
본부장급 이상이 아니라 일반 직급 과장과 대리까지 다 모으려면 거의 체육관은 빌려야 다 앉을 수 있을 만큼 커져 버렸다.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 정도로 조직의 확장을 이룬 것이다.
엘리도 그런 조직 문화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엘리의 상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낭중치주(囊中之錐)라 했던가? 주머니 속의 송곳은 결국 뚫고 나오기 마련이다.
엘리는 6개월이 지나자 대리로, 다시 3개월이 채 차기도 전에 과장으로, 그리고 1년 만에 부장 타이틀을 달았다. 모두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다.
연신 엘리의 기획안이 눈부신 성과를 냈으니…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꼭 1년을 채우고서야 시혁의 얼굴을 마주한 엘리 로스차일드.
-엘리 로스차일드 부장.
-네, 마이다스 킴 회장님.
-이제야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데… 나, 원망 안 했어?
-아뇨, 재미있었어요. 밑바닥을 경험해 보니 회장님의 마음이 보였거든요.
-그래? 이제 조금 다른 일을 해 보면 어때?
-무슨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수행비서, 엄청 빡셀 거야. 나는 화려한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어. 강행군 할 때면 일주일간 햄버거로 때울 수도 있어, 괜찮아?
-화장실은 보내 주실 거죠?
그렇게 합류한 엘리 로스차일드는 시혁이 어머니의 병실을 지키는 동안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했다. 꼭 시혁이 봐야할 서류와 그렇지 않은 서류로 분류한 다음 공사홍과 박하송에게 넘겼다.
-엘리, 요즘 보고서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그 정도는 회장님이 안 봐도 상관없다 판단했습니다.
-…….
-회장님은 너무 혼자 다 끌어안으려고 하세요. 하부 조직들에게 무한한 자율성을 부여하시면서 정작 본인은 그렇지 못했던 겁니다. 그거 아집이에요. 제가 보기에 90% 정도는 공사홍 부회장과 박하송 대표가 다 처리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회장님, 회장답게 노세요. 그따위로 혼자 다 결정해야 마음 놓인다면 저를 당장 짜르시던가요.
X나 쎄다. 지금껏 이 말을 하려고 1년 동안 박박 기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혁은 바로 꼬리를 말았다. 사실 지금까지 몇 달 동안 전에 비해 10% 정도의 중점 사항만 검토했다. 나머지 90%는 공사홍과 박하송이 다 처리했다.
그래도 K 미르 그룹은 망하지 않았다. 잘만 굴러갔다.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길 재간이 있나? 깨갱해야지.
그런 엘리와 이현 변호사를 대동하고 귀국하는 길.
“한국은 처음 가 보는 거지?”
“네, 회장님. 아름다운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지.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어때?”
“음. 순수하게 자연경관으론 비교할 수 없죠. 그러나 거기는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돌산과 황무지 그리고 모래 바람밖에 없는데도?”
“네, 저는 기초 군사 훈련도 다 마쳤죠. 만약, 전쟁이 또 발발한다면 저는 가장 최전선으로 가게 됩니다. 고향은 그런 곳이니까요.”
“그게 유태인식 노블레스 오블리주인가?”
“아닙니다. 조금 달라요. 유태인은 귀족이 따로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합니다.”
유태인의 고향은 어딜까?
당연히 사람들은 새로 건국한 이스라엘이라고 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세 곳을 꼽는다.
첫 번째가 희한하게 미국이라고 말한다. 그곳을 장악해야 디아스포라(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태인) 상태의 동족들을 보살필 수 있다. 미국이 무너지면 유태인의 안전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럼 이스라엘? 이것도 아니다. 나이가 제법 든 유태인들은 변함없이 독일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독일은 유태인들에게 애증의 땅이다. 나치의 학대를 피해 폴란드로 이주한 아슈케나지(유럽계 유태인)들에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이 독일이 된 까닭이다. 비록 600만 명의 유태인이 나치에게 떼 몰살을 당했지만, 독일은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이스라엘. 지금 엘리는 젊은 세대답게 이스라엘을 고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알았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거 파일 말이야. 만약 엘리 같으면 이 세 명 중 누구를 선택하겠나?”
지금 시혁이 보고 있는 파일. 공사홍이 2년 동안 추리고 추려 최종적으로 선정한 K 미르 재단의 이사장 후보들에 대한 내용. 이미 엘리도 봤으니 의견을 묻는 것이다.
“저 같으면, 무조건 첫 번째 여성을 뽑을 겁니다.”
“…이유는?”
“두 번째 분은 너무 화려한 길을 걸어오셨어요. 현직 대학 총장에, 부총리를 지내셨고, 국회의원도 두 번이나 하셨네요. 좋게 말하면, 노회하달까?”
“나쁘게 말하면?”
“구태, 그런 분은 변하지 않아요. 너무 오래돼서 굳어 버렸거든요, 여기가.”
엘리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웃었다.
“좋아, 세 번째 분은… 내가 봐도 이력이 훌륭한데? 왜 배제한 거야?”
“흠결도 없고, 도덕적이고, 이타심도 뛰어나고, 사회 운동도 많이 하셔서 안 됩니다.”
“엥? 그게 뭔 망아지 방귀 뀌는 소리?”
“그분은 프레임에 쌓여 있어요. 그 틀을 깨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극좌에 쏠린 이분은… 좌익도, 우익도, 특히 중도를 끌어안지 않고 오로지 극좌에 치우칠 가능성 백 퍼센트라고 봅니다. 외골수… 이건 제일 나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