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48화 (148/150)

148화 반쪽 심장

시혁은 엘리와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항상 예측을 벗어난다. 그만큼 신선하다.

“다 좋아, 그럼 첫 번째 여자분을 선택한 이유도 들어 볼까?”

“맑아요.”

“에게? 그게 전부야?”

“회장님, 어둠을 몰아내는 게 밝음이죠? 맞죠?”

“그런데 밝음과 맑음은 다르지 않나?”

“너무 밝아도 사람은 못 봐요. 태양 빛을 정면에서 마주하지 못하듯이. 맑다는 말은 깨끗함과 통하는 말이고, 밝은 빛을 압축하면 오히려 맑아져요, 물처럼.”

“호오, 삼빡한 해석.”

“이분은, 제가 보기에는 천재예요. 아이큐 160은 멘사 회원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들어요. 그런데, 대학을 안 갔네요? 고등학교 성적도 중간 정도? 이건 말이 안 돼요. 일부러 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설명으론 부족해.”

“관련 자격증은 학점 은행을 통해 1년 만에 취득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어린이집을 차렸어요. 돈은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네요. 지금도 매달 갚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 어린이집은 거의 24시간 문을 열어요. 주변 환경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걸로 보여요. 오로지 혼자 힘으로, 몇 명의 자원봉사자와 같이 이걸 꾸려 왔어요. 8년간 변함없이.”

“그래도 어린이집 수익이 괜찮나 보네? 물론 고생은 많이 했겠지만.”

“천만에요, 회장님. 이 자료 좀 보실래요? 제가 따로 인터넷에서 찾은 겁니다.”

엘리가 내미는 자료는 책의 제목이었다. 한두 권이 아니다. 수십 권의 책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게 뭐?”

“제목만 보지 말고 저자 밑의 역자(번역가) 이름도 보시라고요.”

“……!”

이건 정말 반전이다. 모든 책의 역자는 한 사람이다.

“예, 이분은 언어에 상당히 특화된 것 같아요. 영어는 기본이고,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까지 모두 번역할 수 있는 능력… 찐 천재라고 봐야죠. 아마 이 번역비로 어린이집을 운영했다는 데 백 달러 걸 수 있어요.”

사실이라면… 엘리의 말대로 진짜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삼촌이 거금을 제시했지만 거절당한 것을 미뤄 보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꾸려 온 것이다.

삼촌이 2년 동안 수천 명의 의인들을 검증하면서 항상 이분을 첫 번째 상위에 놓은 이유를 알겠다.

“…그런데 회장님, 이분 얼굴 좀 자세히 보세요.”

“응, 봤어. 웬만한 모델은 오징어가 될 거야. 대단한 미인이야.”

“그게 아니고요. 회장님하고 닮았어요. 신기해요.”

“하하하. 내가 좀 생기긴 했지.”

“재수없어. 이래서 세상에 잘난 것들은 다 죽어야 해.”

아아아, 엘리. 제발 산드라 성격을 닮으면 안 돼. 왜 점점 당신 모습에서 산드라가 겹쳐 보일까? 그러지 마.

“분위기, 생김새 그리고 이마와 콧대 그리고 턱선까지. 꼭 회장님의 여성 버전 같아요.”

“닮을 수도 있지. 또 한국인은 서로 비슷해.”

“그 정도가 아니니까 그렇죠. 이건 마치 수채화 물감으로 찍은 데칼코마니 비슷해요.”

시혁도 파일에 첨부된 사진과 그동안 생활상을 찍은 사진을 다시 보았다.

닮긴 닮았네. 꼭 거울을 보는 듯.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한번 보자.

“회장님, 한국 대학교 복학은 완전히 접은 거예요?”

“응,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기본적으로 대학 졸업증은 필요할 텐데.”

“그 기본은 누가 정해? 아깐 그 여성분도 스스로 대학을 안 갔다며? 훌륭하다 하지 않았나?”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아쉬움이 있기는 하다. 나중에 태어날 아이가 아버지의 학벌을 고졸로 알면 어떻하지?

이것도 편견. 시혁은 이미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외무고시까지 수석 삼관왕을 달성한 몸이다.

대학 졸업장이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성공도, 인품도, 삶도… 무엇보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대학 졸업장이란 것이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아는 시기가.

그 지옥 같은 시절이 2년 후면 열린다.

그렇건 말건, 2년 만에 귀국하는 하늘은 맑고 청명하다. 아직도 귀국길은 가슴이 설렌다.

* * *

“너무 심한데?”

“소통령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 소리 내가 몇 번째 듣더라?”

“죄송합니다.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한 번만, 딱 한 번만… 사람들은 호의가 지속되면 권리로 알더라고. 한부그룹도 그렇나?”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 한부그룹은 소통령님의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꼭 보은하겠습니다.”

“어떻게?”

“우선 화끈하게 세 배로 올리겠습니다.”

“어쭈?”

“이번 추가 차관만 받으면 한부철강은 준공될 수 있습니다. 세 배에다 지분도 태워 드리겠습니다.”

한부그룹의 정태순 회장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중 셋째 아들 정부근이 소통령 김형철과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이다. 공범이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거래를 트면 다음은 너무 쉽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 아무나 준다고 덥석덥석 주머니에 넣을 수 없다. 그런데 한 번 거래를 했던 이라면… 거기다 더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지랄이다. 정말 개지랄이다.

금감원을 동원해서 은행의 목을 조르지 않았다면, 절대 한부그룹 같은 부실 집단에게 그 많은 차관을 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치욕스러운 국가 부도 사태를 막았거나, 최소한 미리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너희가 지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각하, 제발 제 말씀 좀 들어 주십시오.”

“고마 시끄럽다.”

“형철이를 유학 보내야 합니다. 너무 말들이 많습니다.”

“니 뭐라카노? 내 아들이 뭐라꼬? 어떤 시건방진 놈들이 내 아들을 씹는단 말이고?”

“각하, 이러다간 나중에 감당 못 할 상황이 옵니다.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서 형철이를 외국으로 보내야 합니다.”

“덕영아, 니는 내가 정치에 데뷔시킸다. 소위 가신이라는 작자가 대통령보고 아들내미를 쳐 내라 말하는 기가?”

“…각하, 저는 충심으로 고언을 드리는 겁니다. 장관들이 형철이 전화 한 통화면 알아서 긴답니다. 안기부도, 경찰도, 검찰도 형철이 눈치를 봅니다. 온갖 이권에 형철이 이름이 나옵니다.”

“이 자슥이… 고마하라니까, 즈그 할아버지가 부자다.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놈이라 말이다. 그런데 형철이가 뭐시 부족해서 이권에 개입한단 말이고? 씰데없는 소리 하려면 앞으로 청와대 들어오지 마라.”

“……!”

작심하고 독대를 청한 민공당 사무총장 김덕영은 기가 막혔다. 아무리 자식 사랑이 각별한 김양삼 대통령이지만, 이토록 귀가 멀었을 줄이야.

그러나 이미 김양삼 정권도 서서히 레임덕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권은 채 2년도 남지 않았다. 그동안 납작 엎드려 있던 언론들이 벌써 논조를 바꾸고 있다. 검찰도 캐비닛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며 시기를 재고 있을 것이다.

항상 정권의 충견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던 검찰과 안기부. 새 정권이 시작되면 바로 전 정권의 치부를 꼰지른다. 힘이 있을 때는 충견 노릇을 하면서 그동안 취득한 정보를 캐비닛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그러다 정권 말기가 되어 힘이 빠지면, 사정없이 칼끝을 돌린다. 어쩔 수 없는 생리다.

“각하, 나중에 제 원망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진심으로 고언을 드린 겁니다.”

“덕영아, 우리 야당으로 서럽게 싸울 때 누가 도와준 놈이 있드나? 알아서 밥해 묵고, 알아서 짱돌 들었지. 그때 가장 정확하게 앞길을 진단하고 정책을 만든 놈이 형철이다. 지금 여의도 정치 연구소도 그래서 만든 거 아이가?”

“형철이의 공을 제가 폄훼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조선 시대도 아니고 황태자 노릇을 방치하면 큰일 납니다. 각하, 제발 눈을 뜨십시오.”

“이, 이, 이 자슥이. 내가 그리 말해도 몬 알아 처묵네? 니 앞으로 청와대 출입 금지다, 알겠나?”

벌거벗은 임금님은 동화가 아니다. 성인들의 이야기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을 대통령 혼자 애써 외면한다. 귀와 눈을 닫아 버렸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김덕영 사무총장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분명 사달이 난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여기저기서 받아 주머니를 채우면, 무조건 골인이다.

그러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서글픈 김덕영 사무총장.

역사의 시계추는 째깍째깍 정점을 향해 변함없이 달리고 있었다.

* * *

세상의 모든 욕정을 받아 주는 곳.

대한민국 최대의 사창가에서 원치 않게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희망 어린이집.

전농동의 희망 어린이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아이들의 쉼터가 되어 주고 있었다. 이곳이 있었기에 그래도 버티며 하루하루의 힘든 삶을 견디는 엄마, 아빠가 있었다.

“아줌마, 오늘도 나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니야, 겨우 일주일에 두 번씩 잠시 도와주는 건데… 내가 미안하지.”

“오늘도 소고기가 들어왔어요. 뭘 해 줄지 고민이에요.”

“또? 지난 2년 동안 누군지 정말 고마운 일이네. 일류 요리집에서나 볼 수 있는 투뿔 등급을 이토록 넉넉하게 보내 주는 독지가가 누군지 정말 궁금하다.”

“대충 알겠는데 확신을 못하겠어요. 호호호.”

“응? 알아?”

“음… 아마, 2년 전에 왔었던 어느 할아버지가 아닐까 싶어요. 성함도 모르는데, 느낌상 꼭 그분 같거든요. 시기도 일치하고.”

“하여튼 애들이 쑥쑥 자라는 것 같아 기분 좋네.”

“예, 아줌마. 저도 애들을 생각해서 거절하지 않고 있어요.”

행복한 웃음이 희망 어린이집을 감싸고 돌았다.

똑, 똑, 똑-

“어머,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었네요. 그런데… 어떻게 오셨어요?”

권혜림은 자원봉사 나온 아줌마를 급히 주방으로 보내고 문을 열었다. 녹슨 창살 사이로 웬 남자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들어가도 됩니까?”

“…누구신데요?”

“오늘 소고기 괜찮았나요?”

“……!”

“안녕하세요? 인사가 너무 늦었네요. 지난 2년 동안 그 소고기 보낸 사람입니다.”

시혁도 권혜림을 처음 보았다. 사진과 크게 다를 게 없는 그 모습. 많이 놀랐는지 귓불이 빨갛게 변했다. 아름다운 얼굴이다.

닮았다. 너무 닮았다. 얼굴은 다르지만 눈동자도, 콧날과 턱선과… 무엇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게 닮았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뛸까? 처음 보는데?’

시혁은 그동안 수많은 미녀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가슴이 뛰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노예지도, 정성희도, 산드라와 엘리조차.

“저… 죄송한데 뒤에 계신 분들, 모두 일행이세요?”

“아! 그렇네요. 너무 사람이 많아 놀랐겠습니다. 김 팀장, 좀 뒤로 물러나 줘.”

권혜림도 시혁과 똑같은 느낌에 소름이 확 돋았다. 너무 잘생겨서? 아니면, 뒤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사람들 때문에?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다.

“들어오세요. 여기 너무 좁아서 다른 분들까지 모시긴 힘들지만, 소고기를 2년 동안 얻어먹었는데 독지가에게 커피 한 잔 정도는 대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헤헤헤.”

“네,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권혜림 씨.”

“그쪽은 성함이……?”

“시혁, 김시혁이라고 합니다.”

“……!”

권혜림은 이제서야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심심하면 TV에 등장하는 슈퍼 코리안,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 그 사람이었구나.

“제가 잘못 본 건 아니죠? 슈퍼 코리안 김시혁 회장님 맞나요?”

“…슈퍼 코리안은 모르겠지만, 제가 작은 기업을 몇 개 하고 있는 김시혁은 맞습니다. 하하하.”

“진짜였네요. 영광입니다, 회장님. 어서 들어오세요.”

처음에 많이 놀랐지만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바로 신색을 회복한다. 표정도 흔들림이 전혀 없다. 그저 2년 동안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소고기를 보내 준 독지가를 대하듯 평온을 되찾았다.

자신과 동갑내기 권혜림을 향해 시혁은 상큼한 미소를 보냈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를 한 잔 청해 볼까요?”

권혜림과 김시혁이 그 먼 세월을 돌고 돌아 드디어 상봉했다. 어떤 운명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지 아직 둘 다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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