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왜 가슴이 이렇게 따뜻할까?
“믹스 커피, 괜찮아요? 김 회장님은 루왁 커피 같은 것만 드셨을 텐데,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아무것이든 상관없어요. 입맛이 싸구려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김 회장이라는 호칭보다 이름을 불러 주시죠. 쑥스럽군요.”
“네. 그럴게요, 시혁 씨.”
대뜸 이름을 부른다. 쿨한 성격이다.
“좋네요, 혜림 씨.”
“예상 밖이에요. 저는 다른 분으로 알고 있었답니다.”
“아! 소고기 말이죠? 예상한 그분이 맞습니다. 저와 같이 일하고 있거든요.”
“그 할아버지 잘 계시죠?”
“할아버지라고 하면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 겁니다. 제가 삼촌으로 모시는 분이랍니다. 하하.”
“네… 그런데 시혁 씨가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시혁 씨 삼촌의 기부금을 거절했기 때문에 소고기를 보낸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또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미리 말씀드리지만 정중히 사양합니다.”
볼수록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자다.
명확히 선을 그어 놓는다. 소고기같이 아이들 건강에 도움이 되는 기부, 감사하다. 그래도 돈으로 희망 어린이집을 덮으려 하지 마라.
“예, 더 이상 혜림 씨의 숭고한 뜻을 훼손할 마음 없습니다.”
“어머! 제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훈훈한 광경이다. 둘 다 선남선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시혁은 진짜 묘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엘리가 미리 예방주사를 놨지만, 설사 아무 말이 없었다 해도 지금 같은 묘한 느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근거림. 첫눈에 반하는 것과 또 다른,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깊은 울림… 묘하다. 뭘까?
“근데, 우리 어디서 봤나요?”
“……!”
권혜림도 그랬나 보다. 상투적으로 우리 전에 봤지 않았나요? 이런 게 아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아뇨, 저는 지금 혜림 씨를 처음 봅니다.”
“근데 왜 이렇게 편하죠? 저는 시혁 씨가 오래 봐 온 사람 같아요. 흔히 말하는 교회 오빠? 그런 느낌이랄까요? 헤헤헤.”
“저도 그렇습니다. 혜림 씨를 본 순간 잃어버린 심장 한 조각을 찾은 것 같아요.”
“…….”
달달한 커피 믹스, 한국이 개발한 제품이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바리스타가 환상적인 맛이라고 감탄했다는 그 제품.
첫 모금부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변함없는 맛을 가진 커피 향이 좁은 원장실을 가득 채웠다.
“여기서 주무시기도 하나 봐요?”
“네… 어쩔 수 없어요. 거의 이 방에서 머무는 편이예요. 새벽에 아이를 데려가는 어머니가 많고, 또 아침 일찍 아이를 맡기는 맞벌이 부부도 있으니까요.”
“그러면 잠은 언제 주무세요?”
“제가 좀 튼튼하고, 또 간간이 쪽잠을 잘 활용하는 편이예요. 헤헤헤.”
해맑게 웃는 권혜림을 보는 순간… 시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알겠다!
그냥 나와 닮은 게 아니었어. 여기서 그 얼굴이 떠오를 줄이야.
내 딸! 차마 홀로 두고 눈을 감지 못했던 내 딸 혜림이.
그 애가 잘 자랐다면, 딱 이 모습 아닐까? 이름도 공교롭게 똑같다.
김혜림, 권혜림.
그래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이토록 사랑스러웠나? 그래서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혜림이였구나.
세상에 아무리 닮은 사람도 많고, 우연도 많다지만… 이럴 수 있을까? 신이 배려한 필연은 아닐까?
“시혁 씨, 왜 그러세요?
“…예쁘네요, 혜림 씨. 눈물이 나도록.”
“예……?”
“그냥 그렇다고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성적인 감정은 아닙니다.”
혜림도 시혁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맑은 눈, 웬지 아련한 표정, 조금도 음탕한 느낌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슬픈 눈으로 쳐다볼까? 왜 나를 쳐다보는 저 눈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봄바람이 살랑인다.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조금씩 봄의 훈풍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원장실에도 따사로운 봄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시혁 씨, 이제 용건을 말해 보세요.”
“예?”
“2년 동안 할아버지를 통해 저를 보살펴 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정말 이상하게 무언가 필요하다 싶으면 생기더라고요. 겨울에 애들 겨울 잠바가 필요한데… 고민하면, 리어카에서 겨울 잠바를 팔던 아저씨가 그냥 남는 거라 가져왔다며 주시고.”
“…….”
“여름에 애들 식당에 에어컨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 또 구청에서 지원품이라고 떡하니 에어컨을 설치해 주고. 이틀에 한 번씩 넘치게 보내 주는 소고기는 거론할 필요도 없고요.”
“…….”
“뭐, 너무 많아서 다 말을 못 하겠어요. 아! 기분 나빴다는 게 아니에요. 그건 감시가 아니라 보살핌을 받은 거니까. 너무 감사했죠.”
“…….”
“그랬던 시혁 씨가 지금 갑자기 등장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세요.”
총명한 여자다.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사홍이 사람을 시켜 필요한 것을 표 안 나게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사하며 거절하지 않았다. 오로지 애들을 위한 거니까.
“그래요, 혜림 씨. 제가 알려진 대로 돈이 많아요. 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계산하기 힘듭니다. 어쩌면 개인으로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부자일 겁니다. 가문이나 단체를 합해도 손가락 안에 들어갈 거예요.”
“예, 저도 한국인으로서 시혁 씨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돈을 버는 데만 집중했어요. 그 과정 중에 비정하고, 잔인했으며, 교활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머니 게임은 지면 모든 것을 잃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 하지만… 옳지 못했습니다.”
“……!”
“한 번도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고민을 안 해 봤습니다. 오로지 삐딱한 눈으로 빌어먹을 세상, 손아귀에 넣을 생각만 했어요.”
“…….”
“아직 제 야망이 끝난 건 아닙니다. 몇 번의 더 큰 승부가 남아 있긴 합니다.”
여기까지 들은 권혜림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김시혁을 ‘빌런의 왕’이라고 표현한 어떤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살았기에 악당 중에서도 왕초라 하는 것일까?
“적이라 생각하면 무자비했습니다. 결코 용서하지 않았어요. 거꾸로 내 편,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은 철저히 감싸고 살았죠. 그러다 문득 태식이라는 동생의 말에서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
“세상 사람들이 저를 향해 여러 별명으로 부른 답니다. 악독한 자본가 라커펠러(록펠러)의 환생, 돈 많은 샤일록, 유로의 주인, 유럽 정복자, 미국과 중국, 한국을 아우르는 권력자… 하하하.”
“음… 그중에 잘못된 표현도 많은 것 같아요.”
“왜요? 다 맞는 말 같은데?”
“록펠러는 전 세계 석유의 95%를 장악하기 위해 30센트 하던 석유값을 5센트로 내렸어요. 그 바람에 경쟁자들이 다 망했죠. 그러나 록펠러는 그 가격을 10년 동안 단 한차례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경쟁에서 승리한 겁니다.”
“……!”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소설 속 이야기지만 유태인 사채업자 샤일록도 철저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라고 봐요. 오히려 약속을 저버린 주인공, 판사로 변장해 꼼수를 쓴 주인공의 친구, 이 두사람이 사기꾼 아닌가요? 약속을 저버린 이들만 찬사를 받는 건 부당해요.”
우화! 자신이 태식에게 해 줬던 말 그대로를 권혜림에게 들을 줄 몰랐던 시혁은 정말 감탄했다. 생각까지 서로 똑같이 할 줄이야.
“헤헤헤, 제가 주제 넘었나요? 중간에 끊어서 죄송! 하시던 말, 마저 하세요. 들을게요.”
저 웃음, 너무 귀엽다.
꼭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 아닐까?
시혁은 혜림의 머릴 쓰다 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양손을 꽉 쥐었다. 무의식적으로 저 단정하게 빚어 내린 생머리를 헝클어뜨릴 뻔했다.
“후우… 예, 마저 말씀드릴게요.”
“예.”
“제 조국은 영원히 대한민국입니다. 저를 미국 국적자로 오해하는 분들이 간간이 있지만, 저는 지금까지 한국 여권을 가지고 다닙니다. 이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
“그래서 한국부터 시작해서 미국과 전 세계를 아우르는 복지 재단을 세우려고 해요. 세상에서 제일 큰 자산을 가진 재단이 될 겁니다.”
“그런데요?”
“한국에 세울 복지 재단의 자산이 현금으로 10조 원입니다.”
순간적으로 혜림은 시혁이 말하는 돈의 단위를 헷갈렸다.
자신은 아직까지 1억 원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혜림에게 시혁이 말한 돈의 단위는 꿈속에서라도 상상해 보지 않은 액수였던 것이다.
“시혁 씨, 비로소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마음먹은 것을 축하합니다. 10억 원이면 정말 멋진 일을 많이 할 수 있겠어요.”
“…….”
“그래서 2년 전 할아버지가 저에게 1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하셨구나? 이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저는 이 어린이집을 떠나 그런 큰 금액을 운용할 능력이 없답니다.”
“…….”
이 순진한 여자, 시혁은 혜림을 설득하기 만만치 않겠다 싶었다.
“저… 미안하지만, 삼촌이 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재단의 자본금은 10억이 아니라 10조… 인데요?”
“예, 10억, 커헉! 10억, 아니 뭐라고요? 10조? 지금 10… 조라고 말한 거 맞아요?”
“네, 10조 맞아요, 초기 자본금만.”
“…….”
아무리 식었다 해도 커피를 단숨에 원샷 해 버린 혜림. 정신을 차리려고 했나 보다. 사래가 들려 바로 켁켁거린다.
또 무의식 중에 등을 두드릴 뻔했다. 조심해야지. 오늘 이상하다.
겨우 다시 물을 한 컵 마신 후에야 기침을 멈춘 혜림.
“미쳤어요?”
“…….”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한국 주식시장 부동의 1위가 한국전력이에요. 그 한전도 시가 총액이 7조 원이 채 안 되요. 그런데… 10조?”
“네, 10조.”
“맞구나,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10조였구나, 10조!”
“네, 10조. 맞아요. 혜림 씨.”
“시혁 씨, 제정신이에요?”
“네, 멀쩡합니다. 저 안 미쳤는데요?”
“이상해요. 왜 듣는 제가 미친 것 같죠?”
또 물을 벌컥 들이마신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국민 기업 한전이 시총 1위다. 그 시가 총액이 7조 원이 안 된다. 2위 삼송전자도 6조 원 언저리에 머물고 있던 시절이다.
“시혁 씨, 차라리 한전을 사요. 그리고 전 국민들 전기료를 공짜로 하는 게 더 낮지 않아요?”
“아닙니다. 헤림씨, 그런 방법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전에 삼촌이 주신다고 했던 10억 원을 왜 안 받았습니까? 아이들 행복을 해칠까 봐 그런 것 아닌가요?”
“…….”
“돈질은 어설프게 하면 적선이 됩니다.”
“아!”
“또 그냥 퍼주는 식으로 하면 그 사람의 성장을 멈추는 결과를 부릅니다. 흔한 말이지만 물고기를 주는 건 하책, 물고기 잡는 그물을 주는 것도 중책, 진짜 상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고, 더 나아가 그물을 빌려주는 겁니다. 그냥 주면 안 돼요.”
“왜요? 어차피 줄 그물인데?”
“공짜로 얻은 그물은 막 사용합니다. 아낄 필요가 없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제공받은 그물로 많은 고기를 잡아 그물값을 갚고, 자신이 성공한다는 의식을 심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합니다. 사람이니까.”
왜 이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지 알겠다.
왜 이 사람이 혈혈단신 고아로 태어났지만 세상을 호령하는지 이해하겠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쌀 몇 포대, 라면 몇 상자 들고 와 사진을 찍으려는 부류들과 너무 다르다.
너무 크잖아? 너무 멋있잖아?
혜림은 시혁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핑크색 커튼 너머로 비치는 봄 햇살이 마치 후광처럼 보였다.
“후우… 알겠어요. 시혁 씨의 숭고한 뜻은 아주 조금 알겠는데, 그래도 저는 못해요.”
“저는 아직 아무 제안도 안 했는데요?”
“여기 어린이집 한 달 운영비가 200만 원도 안 돼요. 태반이 몇만 원 내는 것도 버거워하는 부모님입니다. 저는 그런 작은 일에 쓰임이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껏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재단을 맡아 달라고 말하는 거 아닌가요? 그… 휴우, 입에 담기도 힘든 10조 원짜리 재단을?”
“예, 저는 혜림 씨가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재단 이사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