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 자본, 내 맘대로 세상 만들기-150화 (150/150)

150화 원수냐 은인이냐?

“어떤 일이든 크고 작음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하죠. 모두 한국 대학교를 나오고, 판사나 검사가 되고, 대통령과 장관을 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겠습니까?”

“그건 시혁 씨의 억지죠. 사회는 어차피 클라스가 존재합니다. 인류는 경쟁을 통해 성장해 왔어요. 그 약육강식의 무리 속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는 계단을 나누고, 조금이라도 상위 계단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이 생겨날 수밖에 없죠.”

의외다. 이렇게 현실과 타협하는 말이 권혜림의 입에서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다.

“세상은 시혁 씨처럼 다 성공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실패하고 좌절하는 사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 열심히 노력했지만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 환경 때문에 어둠으로 숨어드는 사람이 더 많아요.”

“…….”

“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불합리한 세상의 질서가 싫어요. 왜 항상 강한 자만 성공하는 거죠? 왜 약한 사람들은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걸까요?”

옳지, 이제 조금씩 속마음이 나온다. 더 들어 보자.

“인권이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공정과 상식을 외치는 사람들은 모두 다 가진 기득권층입니다. 약한 사람들은 그런 걸 주장할 수도 없어요. 당장 가족들과 오늘 하루를 근근이 버티기 바쁘니까요.”

“…….”

“시혁 씨 말대로 돈만 덜렁 보태 주는 게 최선이 아니란 점, 공감합니다. 진짜 복지는… 숨을 쉬게 해 주는 거라고 봐요. 최소한 숨은 쉬어야 다시 자맥질해서 물고기를 잡을 거 아니겠냐고요,”

“네.”

“시혁 씨, 저는 대단한 사회 운동가가 아닙니다. 원대한 이상을 품은 혁명가도 아니고요. 그저 불쌍해서, 여기 버려지는 아이들, 본인이 원치 않은 출생으로 출발선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출발하는 아이들, 작은 숨구멍을 터 주기 위해 있는 거예요.”

“네.”

“그러니까, 시혁 씨의 재단… 그 10조 원 재단은 그에 걸맞은 이상과 사회에 큰 애정을 가진 분에게 맡기세요. 저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잘것없는 저를 예쁘게 봐준 건 감사히 생각할게요.”

“고맙습니다. 혜림 씨, 나중에 취임사 때 그 말 그대로 하면 딱이겠네.”

“……!”

“이미 다 말하셨잖아요? 왜 강한 자만 성공하느냐고? 왜 약한 사람은 항상 실패하는 거냐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그래서 하라는 겁니다. 무조건 퍼주는 것이 아니라, 딱 숨을 쉴 수 있도록, 그들이 다시 호흡을 하고 강한 자와 맞붙어 볼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죠.”

“그게…….”

“그렇게 하시라고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어린이집이나 10조 원 재단이나 똑같다는 겁니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 거냐? 이 돈이 쓰여졌을 때 힘없는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있느냐? 이것만 결정하면 돼요. 똑같은 이치를 지금 혜림 씨가 말한 것 아닌가요?”

혜림은 반박하고 싶었다.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자신은 그럴 그릇이 되지 않는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간질간질한지 지금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

혜림은 자신을 한없는 애정으로 길러 주신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 입학하면서 제출하는 서류에 기재된 혈액형이… 달랐다.

혜림은 B형, 아버지는 A형,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은 A형, 결코 친딸이 될 수 없었다. 총명함을 넘어 천재였던 혜림은 그때 이미 결정했다, 자신의 미래를.

아버지에게는 한없이 예쁜 딸로 남자. 그리고 나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자.

찐 천재였건만 적당히 성적을 중간 정도로 유지했다. 실제 아이큐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천재성을 숨겼다. 그리고 근처 시립도서관을 놀이터 삼아 갈증을 해소했다.

조금만 집중하면 읽은 책들이 사진을 찍은 것처럼 기억되었다. 흔한 회화 테이프조차 들어 본 적이 없건만 수많은 나라의 언어가 책 몇 권만 읽으면 원어민처럼 해석되었다.

그 눈부신 지성을 아직 누구에게도 밝힌 적이 없었다. 그저 가장 험하고 천한 588에 어린이집을 개설한 후 8년간 최선을 다해 왔다.

다행히 아버지는 혜림이 어떤 선택을 하건 이해하는 전형적인 딸바보 스타일이다. 안기부에서 서류 정리하는 업무를 본다고 했지만, 혜림은 바보가 아니다. 아버지는 극히 비밀스러운 일을 하시는 분.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른 척해 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오늘 정말 하늘이 뒤집히는 동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소설도 이만큼 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이름, 김시혁.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슈퍼 코리안이라 지칭하고, 손만 대면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마이다스 킴이라 부르는 그 남자.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그 남자가 나타나 상상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10조 원의 자산을 가진 재단을 맡으라니.

내 맘속에 이런 것들이 있었나? 겨우 작은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번역비로 버텨 왔다. 이미 번역업계에서는 권혜림이라는 이름은 섭외 영순위였다. 하지만 한 번도 대중 앞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국제 회의 통역을 좀 맡아 주면 안 되겠냐는 의뢰가 끊이지 않았지만, 모두 거절했었다. 그걸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 탓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김시혁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가슴이 뛸까? 나도 모르는 깊숙한 심연에는 더 큰 세상을 향한 유토피아가 있었던 건 아닐까?

* * *

“누구시죠?”

“당신들이야말로 누구요?”

“죄송하지만, 왜 어린이집에 오셨습니까?”

“당신들, 누구냐고 물었소.”

김보성은 누군가 희망 어린이집 문을 열려고 하자, 즉시 제지했다. 안에는 지금 보스와 어린이집 원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누구신지, 왜 여길 방문하셨는지 밝히지 않으면 못 들어갑니다.”

“당신 누구냐?”

양측 모두에게 확 돋는 살기. 처음에는 서로 정중하게 말을 했으나 방문한 사내 쪽에서 먼저 거친 반응이 터져 나왔다.

김보성은 무의식적으로 삼단 봉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살기를 감지한 캄퐁과 구르카 전사들도 뒷춤에 꼽고 다니는 쿠크리 손잡이를 잡아 갔다.

동시에 차에서 대기하던 체첸 전사들 다섯 명도 급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나도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구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이 살기를 풀풀 풍기며 길을 막는 거냐?”

권덕용도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리볼버를 뽑아 들었다. 권덕용은 안기부 블랙을 지휘하는 11국의 핵심 2과장이다. 당연히 권총을 소지하고 다닌다.

순식간에 희망 어린이집 앞은 권총을 뽑아 든 권덕용과 삼단봉을 겨눈 김보성, 날이 파랗게 선 쿠크리를 손에 쥔 캄퐁과 구르카 전사 셋, 맨손이지만 언제든 몸을 날릴 태세인 체첸 전사 다섯 명까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권덕용의 등뼈를 타고 또르르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 하나 총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더 깊은 살기를 끌어 올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권덕용은 알 길 없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이대로 격돌하면 두 번째 총구를 당길 여유도 없이 당한다. 이놈들에게 풍기는 진득한 피 냄새. 다들 프로다.

“그만하세요. 서로 무기들 내려놓으세요!”

“……!”

“권덕용 선생님, 저는 마이다스 킴 회장님 수행비서 엘리라고 합니다. 그 총 집어 넣으세요.”

“마이다스 킴? 김시혁을 말하는 것인가?”

“예, 한국 이름으론 김시혁이 맞아요.”

훌륭한 발음으로 한국말을 던지는 엘리.

“왜 내 딸을 김시혁이 만나러 온 것이지?”

“저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그 답은 직접 들으시는 게 좋겠네요. 안으로 드시죠.”

그제서야 권덕용도 리볼버를 가슴의 권총 홀더에 넣고 뒷걸음질로 어린이집 문을 향했다. 그러나 여전히 문을 막고 있는 김보성에게 제지당했다.

“안 됩니다. 어떤 분인지 모르겠지만, 그 리볼버는 보스가 다시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맡아 두겠습니다.”

“미친, 여긴 한국 땅이야. 나는 한국 정부의 공무원이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내 총을 달라는 거냐?”

“나는, 당신이 누구건 상관없어요. 당신은 지금 미국 정부의 차관인 대통령 정책 특보님이 계신 곳으로 가면서 총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 총, 넘기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가겠다면?”

“당신은 죽습니다, 그 자리에서.”

“……!”

“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엘리 비서가 당신을 허용해도 보스의 경호를 맡은 우리 팀은 당신을, 아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총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총을 넘기세요.”

“나도 김시혁 회장을 안다. 그가 대학 초년생일때도 만나 봤고, 그가 올림픽 위원 통역할때도 내가 안내했다. 안심해도 된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우린 절대 보스가 계신 곳으로 총을 가진 당신을 들여 보낼 수 없습니다.”

벌써 말을 하는 중에도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캄퐁과 구르카 전사들과 그 외곽을 감싸고 있는 체첸 전사들. 일촉측발이다. 엘리도 입을 다물었다. 저건 자신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

“그만, 김 팀장, 캄퐁도 물러서!”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나 보다. 문이 열리더니 시혁이 등장했다. 상황은 일거에 정리되었다. 보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김보성과 캄퐁 일행은 썰물 빠지듯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이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이게 누구십니까? 권덕용 선배님 아니세요?”

“…김시혁, 진짜 뜻밖이군.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그러잖아도 여길 방문하면서 긴가민가 했습니다. 혜림 씨의 부친 성함이 선배님과 같기에 설마 했었죠.”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

하지만 체온이 다르다. 시혁은 진정으로 반가운 표정인 반면, 권덕용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 결국 이렇게 만나고 말았다.’

끝까지 피하고 싶었건만… 만나고 말았어.

“들어가시죠. 혜림 씨 아버지가 선배님이실 줄 정말 몰랐습니다.”

“으, 응, 그래. 들어가세.”

시혁을 뒤따라 나온 권혜림도 갑자기 나타난 권덕용을 보고 놀라 외쳤다.

“아빠,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어? 아빠 얼굴 본 지 벌써 한 달이 다 됐는데, 웬일이야?”

“으, 응. 간만에 우리 꽃돼지 보려고 왔는데, 주변이 많이 복잡하구나.”

“힝! 하숙생 같은 아빠가 할 말은 아니네. 근데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김시혁 회장과 아빠는 일 때문에 몇 번 만난 적 있다. 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참 이상한 인연이다.

시혁은 공사홍 삼촌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노태후에게 삼촌의 여권 발급과 출국 금지 해제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삼촌의 서류 일체를 들고 왔던 안기부 직원이 권덕용이었다.

또 노태후의 부탁으로 중국 올림픽 위원 후진타오의 통역을 맡았을 때, 담당 안기부 직원이 또 권덕용.

일찌감치 시혁의 인재 풀에 이름을 올렸던 그 권덕용 선배가 권혜림의 아버지였을 줄이야. 파일을 보면서 잠시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이렇게 서로 인연이 이어질 줄 몰랐다.

반면, 권덕용은 차마 김시혁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백정태에게 이미 들은 것이다. 그때, 자신이 공원에 버린 아이가 김시혁이라는 것을.

돌고 돌아, 얽히고 설긴 이상한 인연들이 한 자리에서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마침 잘됐습니다. 같이 차 한잔하면서 말씀 좀 나누시지요. 저도 혜림 씨와 못 다 한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아직 진실이 다 드러나진 않았구나. 권덕용은 내심 한숨을 쉬면서도 두려웠다. 자신이 지난날 저지른 일과 저 둘이 서로 관계를 알게 되면 모든 게 끝이다. 과연 자신을 용서할까?

“선배님, 이제 선배님도 진실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헉!”

시혁이 던진 한마디에 권덕용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설마… 벌써 다 알아 버렸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