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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5화 (5/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5화

목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덮친 혁명의 물결은 이미 다른 곳에서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역사 속에 등장하여 세상을 휩쓴 1848년의 혁명으로 그동안 억눌려 있던 이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프랑스, 독일 지역의 여러 소국, 폴란드, 헝가리 등등 수많은 국가에서 봉기가 벌어졌고 개중에 몇몇 국가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절대주의가 무너지고 자유의 시대가 찾아오는 듯했지만…….

어느샌가 하나둘씩 무너지더니 결국 살아남은 것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다시금 공화국이 된 프랑스와 독립을 위해 들고일어난 헝가리뿐이었다.

그들이 망한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시민의 암묵적인 동맹이었던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며 시민계층과 마찰을 빚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의 반목은 군주주의자들이 세력을 결집하여 반격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혁명은 실패했으나 혁명은 유럽을 바꿨다.

유럽을 뒤흔들었던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나폴레옹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오스트리아의 주도하에 세워진 빈체제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빈체제 속에서 금기시되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헝가리 반군은 주변의 여러 혁명세력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헝가리인, 마자르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똘똘 뭉쳐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상황이었다.

[알겠느냐?]

‘갑자기 왜 또 인강모드가 되셨어요.’

[자네에게 이 상황을 헤쳐나갈 만한 조언을 해주고자 그런 것이니 조금만 더 참고 듣게.]

‘조언이요? 잔소리가 아니라?’

[조언일세.]

영감님은 심통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쯧쯧……. 내가 소싯적에는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주변을 배회했었어! 자네는 복 받은 줄 알게나.]

‘저는 듣기 싫은데요.’

[후우……. 자네에게 해줄 이야기가 몹시 많지만, 지금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바로 설명해 주겠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지금 그라츠 원수가 계획한 동계공세는 부분적인 성공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네.]

‘원 역사랑 다르게 좀 더 철저하게 준비했는데도?’

[고작해야 몇 주 정도 유예기간이 생긴 것일 뿐이야. 그사이에 바뀌어봤자 얼마나 바뀌겠나?]

영감님의 말이 맞았다.

내가 그라츠의 계획을 조금 바꾸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것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네.]

‘내전 도중에 외국군대를 끌어오자고요?’

[그게 아닐세, 나도 이때 러시아군을 끌어들인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하네.]

‘그럼 러시아의 적절한 개입은 뭡니까?’

영감님은 특유의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한번 맞춰보게.]

‘아니, 좀 한 번에 알려주면 어디 덧나십니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지 않은가?]

‘이걸 재밌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한번 맞춰보게.]

영감님의 고약한 취미에 인상이 찌푸려지며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이 아니라 다른 개입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일 것 같은가?]

‘음…….’

원 역사에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러시아군과 막대한 금액의 차관을 도입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그러면 여기서 군대를 제외하고 차관만 도입하겠다는 것일까?

[차관도 좋지만 결국 러시아는 우리 오스트리아와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적이라는 것을 기억하게나.]

‘그럼 뭡니까?’

[군사적인 교류라고 해두지.]

‘군사적인 교류요?’

[러시아에서 우리에게 관전무관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게 만드는 거지.]

‘?’

영감님은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설명하는 듯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현재 유럽 전역이 혁명으로 불타오르고 있을 때, 러시아는 강 건너에서 불구경을 하고 있지, 왜 그런 줄 아는가?]

‘그야 러시아는 아직도 중세시대를 크게 못 벗어났으니 그런 것 아닙니까?’

[하하하, 바로 맞췄군. 그 러시아 놈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그들도 유럽과 비교하면 많이 뒤처지고 낙후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그렇군요.’

또 요제프의 지루한 역사강의가 시작되려는 기미가 보였다.

‘바쁘니까 요점만 말해주세요.’

[에이 쯧……. 지금부터가 중요한 건데…….]

‘조금 있다가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제게 보고를 올리러 올 겁니다. 그러니 빨리 설명해 주세요.’

[……결론은 러시아가 우리 오스트리아의 전력을 오판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네.]

‘반란 이후의 일을 설계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래, 어차피 헝가리의 반란 이후로 우리는 유럽의 패권국에서 멀어졌네, 다시 패권국으로 도약하려면 기나긴 준비가 필요하고 말이야.]

‘그사이에 나쁜 놈들이 뭐 얻어먹을 거 없나 하고 뜯어먹으려 들겠지요.’

[그게 기회일세.]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영감님은 반란 진압 이후에 오스트리아가 다시금 패권국으로 올라갈 방법을 구상하고 있으셨다.

[자네 머릿속을 뒤져보니 이런 말이 있더군. 다시 시작하되 놓아줄 때를 알아라.]

‘그거 게임에서 나온 말 아닌가요?’

영감님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자기 할 말만 했다.

[어차피 이 제국은 그리 오래갈 만한 것이 아니었어…….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많지 않았던가? 그러니 멸망한 것이겠지.]

‘망하려면 아직 수십 년은 남았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야. 예전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잖나.]

영감님의 말에서 슬픔이 묻어나왔다.

[그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겠지.]

그 뒤로 영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그 뒤로 영감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으셨다.

마치 내가 얼마나 잘하는 것인지 뒤에서 지켜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이번에 그라츠 경이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를 공격하려 한다지?”

“예, 뭐……. 그렇죠.”

“대관식 날 쓰러졌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이리도 늠름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나.”

그라츠의 동계공세 준비 동안에 여유가 생기자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이자 바이에른의 공주인 조피 대공비가 내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래도 영감님의 어머니였던지라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다만…….

“그런데 요즈음에 네가 기획한 것 중에서 지방의 여러 소수민족 지역에 도서관과 교육기관을 건립하는 것이 있더구나.”

조피 대공비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만……. 지금은 전쟁 중이란 걸 유념해 줬으면 하는구나.”

“어머니, 그건 제 일입니다.”

“중요한 국정과제를 수행하기엔 넌 너무 어리잖니, 그러니 이 어미가 네 부담을 덜어주마.”

“저도 이제 열아홉입니다. 어머니께서도 제 나이쯤에 아버지와 결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점잖게 이젠 나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니, 어머니께서는 상냥한 손길로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낳았잖니.”

“어머니께서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요제프, 지금이야 혼란한 상황 탓에 너의 행동을 눈감아주는 것이지만……. 지금 상황이 진정되고 혼란이 가라앉으면 누가 네 말을 들어줄 것 같니?”

어머니께서는 그리 말씀하시며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녀의 그러한 행동은 마치 자신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처럼 여기시는 듯했다.

“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렴. 이 어미가 네 앞길에 놓인 장애물들을 모조리 치워줄 테니까.”

나는 어머니의 손을 밀쳐내며 말했다.

“새도 언젠가는 둥지를 떠나야지요.”

안 그래도 영감님이 매일같이 잔소리하며 훈수를 두는데, 한 명 더 추가되는 것은 사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찻잔을 들어 올리셨다.

그러고는 잔에 들어 있는 차를 모조리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차가 만족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내 행동이 마음에 드신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되건 상관없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또 보자꾸나.”

“당분간은 힘들겠네요.”

가볍게 인사를 올리고는 방을 나섰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을 비롯한 수십 명의 궁정 신하들이 자연스레 내 뒤에 따라붙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집무실에서 기다리지도 못할 정도로 급한 건가?”

“아군이 적의 중심지인 부다와 페스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합니다.”

“좋은 소식이로군. 그런데 이걸 내가 복도에서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정색하면서 되묻는 내 모습에 슈바르첸베르크 공장이 크게 당황했다.

“저, 저는 그저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폐하께 알리 고자 했을 뿐입니다.”

“후우……. 그래, 내가 좀 신경이 날카로웠군.”

“아닙니다. 요즘 고된 일에 시달리셨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은 괜찮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의 말투에 서운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세한 건 집무실에서 듣도록 하지.”

“예, 폐하.”

그렇게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집무실로 돌아와서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보고서를 살펴봤다.

“원래 계획보다도 빠르군.”

“그라츠 경께서 도나우강의 배를 동원하여 부다를 급습했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급습했다고?”

“아무래도 육지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시어 일부 병력을 도나우강을 지나는 상인으로 위장시켜 부다로 먼저 보낸 모양입니다.”

“분명 작전계획서에는 함선을 이용한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라츠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 같았다.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전쟁에서 계획이란 것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유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가 된다는 거고?”

“예,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난 책상 서랍 한쪽에 따로 보관해 둔 그라츠의 작전계획서를 꺼내 들어 그의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럼 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는 왜 내게 보고서랍시고 들이미는 건가?”

“아, 폐하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흥분? 난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다네.”

예전에 시청에서 일할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몇 달 동안 잠도 줄여가며 준비했던 행사가 민원인의 신고로 물거품이 된 일이 있었다.

내 몇 달이 고작 한 사람의 말 몇 마디 때문에 엎어진 것이다.

정말 눈 돌아가는 상황 아닌가?

지금 상황이 그때와 완전히 비슷하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참아야 했지만, 지금은 내가 대놓고 뻗대도 꾸중할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

“후우……. 펠릭스 공.”

“예, 폐하.”

“아무리 전장에서 장군의 자율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친 것 같군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끼신 것인지요?”

“전부! 모두 다!”

한번 시원하게 내지르자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폐, 폐하?”

“아무리 전장에서 계획이 바뀌는 것이 늘 있는 일이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계획에 없던 일을 벌이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군요.”

“폐하, 우선 진정하시고…….”

“닥치고 내 말이나 들어!”

“…….”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면 작전은 왜 세우고, 내게 보고는 왜 하는 건가?”

“그것이…….”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내게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주도권은 내게 넘어온 지 오래였다.

“지금 군부의 이러한 행동은 내가 어리다고 대놓고 날 무시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폐하…….”

“군의 자율성? 좋다 이거야! 그런데 그 전에 보고체계가 있는데, 이걸 전부 무시하고 움직여도 되는 건가?”

슈바르첸베르크의 펠릭스 공작은 분명 상황이 좋게 풀렸는데, 자신에게 화를 내는 황제에게 당황했다.

“그래도 허를 찌르는 기습으로 반군의 중심지를 점령하는 큰 공을 세웠잖습니까?”

“공을 세운다고 그들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폐하…….”

이때만큼은 영감님도 내 편을 들어줬다.

[으음……. 그라츠가 실수했군.]

‘쓸 만한 사람인 거 맞아요?’

[사람은 괜찮은데……. 이번엔 좀 보고체계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로군.]

‘문제요? 무슨 문제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뭐……. 현장의 상황이 다급했겠지, 그래도 이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긴 하지만…….]

물론 내가 이렇게나 화를 내는 것은 단순히 옛 생각에 기분이 나빠진 것도 있지만, 온갖 굴욕을 당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에 딱 좋은 건수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이 혼란한 오스트리아 정계에서 군부의 거물인 그라츠 원수의 고삐를 당겨 누가 위에 있는지 알려줄 수 있기도 했고 말이다.

나 때문에 작전에 차질이 생긴다면 어쩌냐고?

어차피 이번 동계공세는 부다를 점령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느냐?

‘목줄을 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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