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화
사방이 적?
괴르게이가 총사령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그런다고 전황이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여전히 부다를 향해 맹공을 퍼붓는 중이었고 크로아티아에서 기회를 넘보던 옐라치치의 부대도 빠르게 북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대로 가면 아군의 주력이 포위되어 강 건너에 있는 페스트까지 적에게 넘어갈 겁니다.”
“적의 동계공세가 시작된 이래로 아군은 전력의 50%를 잃었습니다.”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다들 새롭게 총사령관이 된 괴르게이의 앞에서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슬쩍 후퇴를 종용하고 있었다.
괴르게이 또한 부다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우며 슬슬 물러나야 하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부다를 버리고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좋아. 귀관들의 조언에 따라 각 병력은 자력으로 강을 건너서 페스트 인근의 이셔셰그에서 재집결하는 것으로 하지.”
“이셔셰그라면…….”
“페스트에서 걸어서 다섯 시간 거리가 아닙니까?”
“그건 너무 애매한 거리인데…….”
이셔 세금은 부다와 페스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소도시로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인지라 방어에 쉬운 곳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헝가리 장교들은 그의 결정에 한마디씩 거들며 반발했다.
“다들 진정하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곳에서 재집결하는 것이지 방어선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렇다면 그곳에 집결하여 무얼 하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해야지.”
“???”
적에게 반격을 가할 것이란 그의 말에 다들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당장 적의 공격을 막는 것도 힘든데, 역으로 적에게 반격을 가한다니?
괴르게이를 제외한 회의 실내에 있는 누구도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괴르게이는 그런 장교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남몰래 미소 지었다.
결국, 보다 못한 괴르게이의 부관이자 2군단의 지휘관이었던 죄르지 클럽커가 물었다.
“저……. 각하, 제가 어리석어서 각하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허, 그래서야 쓰나!”
“죄송합니다만……. 각하의 생각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하하하, 자네가 그리도 간절히 애원하니 내 친히 알려주도록 하지.”
모호한 명령을 내려놓고는 이런 것도 모르냐는 괴르게이의 태도에 장교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번 오스트리아의 동계공세는 어디까지나 다음 공세를 대비하는 성격이 강하네, 이것보다 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적들은 다음 공세에 앞서 헝가리 내부에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것이야.”
“교두보…….”
“그렇다는 말씀은 적들은 추가적인 공세를 계획하고 있다는 뜻이로군요. 그게 언제일까요?”
“응? 아니지, 그게 아니야 클럽커.”
“예?”
괴르게이는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이 말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녀석들이 ‘언제’ 공격해 오는지 같은 게 아니라 ‘왜’ 지금 교두보를 마련하는지가 중요한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에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적들은 다음에 있을 공세를 위해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 아닙니까?”
괴르게이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오른손 검지를 그의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었다.
“그걸 왜 지금 해야 했는가?”
“그거야……. 저희는 적들이 겨울에 부대를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그 틈을 노리고…….”
“그래, 자네 의견은 아주 훌륭해. 하지만 자네가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군.”
“제가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면…….”
순간 괴르게이의 눈썹이 비 오는 날 세상 밖으로 기어 나온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지금 오스트리아는 우리 말고도 수많은 적과 싸우는 중이 아닌가.”
“아, 그럼……!”
그때까지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괴르게이를 지켜보던 클럽커가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자 그의 곁에 있던 다른 장교들도 하나둘씩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래, 이제야 큰 그림이 보였던 모양이로군.”
괴르게이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지도를 펼쳤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주 전선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지, 하나는 이곳 헝가리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사르데냐와 대립 중인 밀라노다.”
“저들은 양면 전선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로군요!”
“그렇지, 역사적으로 양면 전선을 강요받은 국가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제풀에 무너지기 마련이었으니……. 오스트리아가 이 양면 전선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괴르게이는 오른손을 들어 손날로 자신의 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끝이지.”
“그, 그렇다면 적군이 겨울에 대대적인 공세를 기획한 것도…….”
“봄에 있을 대대적인 공세에 대비해서 아군의 전력을 갉아먹기 위한 것이지.”
“아아……. 그렇군요.”
괴르게이의 말이 끝나자 회의장은 정적에 잠겼다.
다들 그의 추측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장교 중에서 침묵을 깨는 이가 있었다.
“각하, 질문이 있습니다.”
“음……. 자네는 기병대 지휘관인 안드라시 가스파르로군. 좋아! 질문이 뭔가 안드라시.”
“각하께서는 조금 전에 적들이 아군의 전력을 깎아 먹기 위해 헝가리 내 교두보를 마련하는 작전을 기획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그럼 적들은 봄에 추가적인 공세를 벌이는 겁니까? 아니면 공세는 뒤로 밀리는 겁니까?”
안드라시의 말에 괴르게이는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그를 칭찬했다.
“구두장이의 아들치고는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네! 안드라시 가스파르.”
“……!”
괴르게이는 자기 나름대로 그를 칭찬한 것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가스파르는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며 볼살을 파르르 떨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괴르게이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혼자 신나서 떠들어댔다.
“저들은 이번 동계전역에서 제법 재미를 보았으니 봄에도 비슷하게 치고 들어올 것이야.”
“그럼 아군의 다음 목표는 방어입니까?”
“어허, 클럽커 자네는 금붕어라도 되는 건가?”
“그, 금붕어?”
괴르게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방어가 아니라 대대적인 반격이라고 했잖나.”
“하지만 적들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괴르게이는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금 지도에서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을 확인한 클럽커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셔셰그?”
“적의 주력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저들을 한 번에 쳐부순다! 간단하지?”
“어, 음……. 그렇군요.”
전혀 간단하지 않았지만, 클럽커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동계전역의 승전보가 빈에 전해졌다.
다들, 이 승리로 매우 급했던 상황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한숨 돌리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만 빼고.
“폐하, 그라츠 경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이제 헝가리 쪽 전선에도 여유가 생겼으니 이탈리아 쪽에 주력해야겠습니다!”
다들 그라츠가 보내온 승전보를 듣고는 헝가리의 반란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듣자 하니 반군의 총사령관인 헨리크 뎀빈스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그 뒤를 이은 것이 고작 서른 살밖에 안 된 새파랗게 어린놈이라더군요!”
“그뿐입니까? 아니 글쎄 새로운 지휘관이라는 녀석은 군사훈련은 어렸을 적에 몇 년 정도 배운 게 전부라더군요.”
“그전까지는 화학 쪽에 관심을 두고 논문이나 몇 개 쓴 게 전부라더군요.”
그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괴르게이가 고작 서른 살에 헝가리군 총사령관에 오른 것을 비웃는다면 열여덟의 나이에 황제가 된 나는 뭐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장 그를 불렀다.
“이보게 바흐.”
“부르셨습니까? 폐하.”
“서른 먹은 애송이가 군대를 지휘하는 게 우습더라……. 그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앗! 그것이 제 말은 그 뜻이 아니오라…….”
“후우……. 자네는 자중하게.”
“죄, 죄송합니다. 폐하.”
지금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알렉산더 폰 바흐라는 인물로 현재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맡은 인물이었다.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에 가깝지만 프란츠 요제프의 초기 신 절대주의적 중앙집권체제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했을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인물이었다.
[바흐 남작은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사후에 뒤를 이어 내무장관직을 맡은 친구인데……. 뭐 그럭저럭 제 밥값은 하는 인물이었다네.]
‘평가가 좀 미묘하군요.’
[음……. 그 친구가 말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그렇다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친구 잘못은 아닌데 말이야…….]
‘그럼 내치에도 실패한 것 아닙니까?’
[전혀! 그는 충직하게 내가 내린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는 유능한 인물이었어.]
‘그 명령이 뭐였는데요?’
내 질문에 영감님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답했다.
[땅에 떨어진 내 권위를 바로 세우고 제국을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일이지.]
‘하나님 맙소사…….’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놓고도 왜 오스트리아가 휘청거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건 영감님의 뜻이었습니까?’
[그렇다네.]
‘예, 그렇군요.’
내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자 영감님은 멋쩍어하며 내게 말했다.
[그때는 나도 젊었으니 그런 것이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신 것이로군요.’
[글쎄……. 정확히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했던 거지……. 결국엔 성대하게 실패해 버렸고 말이야.]
‘저런!’
이후 영감님의 자조 섞인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대충 혼자서 떠드시게 놔두고 다시금 바흐 장관에게 집중했다.
“바흐.”
“예, 폐하.”
“헝가리 쪽에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나왔던가?”
“반군 측에서는 일체의 협상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겠지……. 쯧.”
역시 괴르게이나 코슈트는 쉽사리 협상장에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춘계공세 때 또 낭패를 볼 텐데…….’
이번 동계공세가 원 역사보다 잘 풀려서 이득을 많이 보긴 했으나 상대는 괴르게이 어르투르였다.
그는 서른 살에 헝가리군 총사령관직에 올라서 불리한 전황에 놓인 헝가리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위협한 인물이었다.
원래는 이쯤에 러시아와 이야기가 얼추 끝나서 한창 오스트리아가 밀릴 때쯤에 그들이 개입했어야 했으나 지금은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영감님,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음……. 나는 군문에는 문외한인지라 자네에게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네만…….]
‘저도 군대는 말년병장으로 전역한 게 끝인데요.’
[그건 나도 봤다네, 자네가 신 병장이라는 인물에게 갈굼 받고 화장실에서 서럽게 울었던 것은 아주 인상 깊었…….]
‘아니 그걸 왜 봐요!’
영감님은 떳떳하다는 듯이 말했다.
[본인은 황제라네, 황제는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하……. 됐고, 쓸 만한 정보 같은 거라도 있으면 말해주시면 좋겠네요.’
[쓸 만한 정보라……. 음……. 고민을 좀 해봐야겠군.]
잠시 고민하던 영감님은 이내 허허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없는 것 같군.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기에 나는 별로 한 것이 없어서 말이야.]
‘끄응……. 영감님께서 못 찾으신 게 아니고요?’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아, 그러고 보니…….]
영감님은 무언가 떠올리시고는 내게 말씀하셨다.
[괴르게이는 내가 죽기 정확히 여섯 달 전에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네.]
‘예?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고요? 그럼 도대체 몇 살에 죽은 겁니까.’
[그게 아마……. 98세쯤이었던 것 같군.]
‘허……. 얼마나 욕을 먹으셨으면 그런 겁니까?’
[응? 욕을 먹는다니 그게 무슨 말인고.]
‘제가 살던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사람이면 오래 산다는 미신 같은 게 있었거든요.’
내 말에 영감님은 잠시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하시더니, 이내 웃으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하긴……. 그 친구는 워낙에 제 잘난 맛에 살던 친구였으니 주변에 적이 많았을 거야.]
‘……주변에 적이 많다고요?’
[그렇지, 헝가리 임시정부인지 뭔지 하는 반군 수뇌부와 군부 간의 갈등은 꽤 유명한 일화였다네, 그중에서도 코슈트 러요시와 괴르게이는 서로 죽여 버리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들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지.]
‘그렇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