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화
방심?
근래 코슈트 러요시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후우……. 군부 놈들이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지휘권을 쥐여주다니……. 도대체 어쩌려고…….”
그건 괴르게이에 대한 것으로, 평소에 괴르게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코슈트는 그가 군의 통솔권을 가진 것에 불만이 많았다.
일단 그가 어렵게 모셔온 뎀빈스키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불화를 겪다가 그를 내쫓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는 본질에서 코슈트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코슈트 러요시나 괴르게이 어르투르 둘 다 조국인 헝가리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그 방향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괴르게이는 제 잘난 맛에 살며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깔보기 일쑤였지만 그와 반대로 타인을 배려하며 잘 다독이는 자신과는 상극과 같은 인물로 실제로 둘은 이미 여러 번 다툰 전적이 있었다.
“쯧……. 괴르게이 녀석을 어떻게든 쳐내야 하는데…….”
그렇기에 코슈트는 자신의 눈엣가시 같은 괴르게이를 쫓아낼 만한 방법을 고민하며 매일같이 그가 실수하기를 기원할 정도였다.
때마침 그런 코슈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각하, 편지입니다.”
“편지? 아, 부인이 보낸 모양이로군.”
“아닙니다. 이건 빈에서 왔습니다.”
“빈에서? 씁……. 또 어린 황제가 내게 협상하자고 편지를 부친 모양이로군.”
안 그래도 짜증이 가득했던 코슈트는 편지 칼로 거칠게 편지봉투를 잘라내고는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귀찮게 이런 건 왜 보내는…….”
편지를 읽던 코슈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보낸 편지 내용에 집중했다.
겉으로는 이번 동계전역의 승리를 자랑하며 정중한 어조로 코슈트에 협상할 것을 권하는 듯했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지금 나와 거래를 하자는 건가?”
황제는 구차하게 항복이나 협상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요청하고 있었다.
“괴르게이를 버리라니……. 허, 아무리 내가 그 녀석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이런 술수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우습군.”
코슈트는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넣으려 했으나 그 순간 그의 보좌관이 문을 두드렸다.
“각하, 안에 계십니까?”
“자, 잠깐 기다리게!”
코슈트는 부모님의 지갑에서 돈을 빼다가 걸린 아이처럼 다급히 황제의 편지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독였다.
“흠흠……. 들어오게.”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그래, 자네도 무탈했는가?”
코슈트는 보좌관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황제의 편지가 신경 쓰였다.
보조관이 돌아간다면 당장에라도 편지를 불태우겠다고 생각하는 코슈트에 보좌관이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각하, 괴르게이 장군께서 봄에 대대적인 군사작전이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게 끝인가?”
“예?”
“그 녀석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이건 군대를 전부 말아먹든 간에 내게 이를 승인해 달라고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 그것이……. 괴르게이 장군께서 어제 일방적으로 통보하신지라…….”
“쯧……. 이래서야 원……!”
코슈트는 제멋대로 날뛰는 괴르게이의 모습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찌 되었건 괴르게이는 헝가리 방위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이었고, 그의 모든 행동은 오스트리아의 침공으로부터 헝가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동계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참패를 당한 헝가리 군부가 절치부심하여 준비 중인 춘계공세의 총책임자인 괴르게이를 잘못 건드렸다가 괜히 군부와 말썽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코슈트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말이다.
‘그래,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지켜보지.’
코슈트는 책상 서랍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고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니지, 이건 아니야. 아무리 그 녀석이 싫다고 해도 해서는 안 될 것이 있지.’
그런데도 코슈트의 시선은 여전히 책상 서랍을 향하고 있었다.
* * *
헝가리 쪽 전선은 연일 교착 상태였다.
반면에 이탈리아 쪽은 나폴레옹 전쟁 때부터 오스트리아군을 떠받치던 요제프 라데츠키가 신나게 사르데냐 군을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이제 제국의 혼란도 끝나가는 모양입니다.”
거기에 그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휴가를 보냈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도 업무에 복귀했다.
이런 상황이니 다들 현 상황을 집권 초기의 혼란이 얼추 수습되어가는 중이라 판단했다.
“너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네.”
“제 부족한 식견으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폐하.”
“아직 적들은 포기하지 않았지 않나.”
“그것도 조만간이지요. 제가 군문에 무지한 것은 사실이나 이 정도로 유리한 상황에서 우리 군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이상, 반군은 끝이지요.”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말이 맞았다.
지금 군 전력의 절반을 날려 먹고 수도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헝가리인들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반군의 사령관이 괴르게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보게 슈바르첸베르크 공, 자네는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네! 당장 그라츠에게 위험을 알려야 해!]
‘영감님 그렇게 소리치셔도 제 귀만 아픕니다.’
[끄응……. 자네가 저 친구를 좀 설득시켜보게, 이대로 가면 또 낭패를 당할 것이야!]
영감님의 설레발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올라 영감님께 말했다.
‘그라츠라면 괴르게이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거기에 옐라치치와 프란츠 슐릭 같은 유능한 장교들이 붙어 있고……. 병력도 적의 세 배 가까이 되는데 설마 이걸 지겠습니까?’
[그건 자네가 괴르게이를 몰라서 하는 말이네.]
‘에이……. 지금 상황이면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 할아버지가 와도 못 이깁니다. 프랑스로 비유하자면 파리를 포기하고 싸움에서 이겨서 모두 되찾겠다는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내 말에 영감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상대는 나폴레옹이 아니지만, 그라츠도 웰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잊었는가?!]
‘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 정도 병력 차이면 어택땅만 찍어도 이길 것 같은데요.’
[어택……. 뭐?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괴르게이는 자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네.]
영감님은 호들갑이 너무 심했다.
‘저도 영감님 기억을 뒤져봐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가 허황한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일주일 만에 아군 주력부대를 모조리 격파하고 수도를 되찾는 게 말이 됩니까?’
분명 영감님의 기억 속에 있던 헝가리군의 춘계 대공세는 충격적이었다.
고작 일주일……. 아니, 정확히는 6일 만에 동계공세로 얻은 헝가리 영토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주력군이 모조리 격파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라츠의 방심이 부른 참사로 보일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가! 그렇게 치면 그라츠도 나폴레옹 전쟁 때부터 활약하던 유능한 장군이었어!]
‘방심을 심하게 했던 모양이지요.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게 제가 단단히 일러둘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시지요. 영감님.’
[어이구……. 이런 답답한 자 같으니라고……!]
영감님은 갑갑하다는 듯이 내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어찌 되었건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고 이에 대한 대비도 다 해놨는데, 이게 무너질 가능성은 0에 가까웠으니까 말이다.
* * *
“상부의 지침?”
한편 최전선인 부다에 주둔 중이던 그라츠는 빈에서 온 명령서를 받아들었다.
“빈에서 온 것이로군……. 그럼 폐하께서 보낸 건가?”
명령서를 받아든 그라츠의 이마에 깊은 골짜기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러고는 상부의 명령서를 구겨서는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이제 적들의 본진으로 진격하여 전쟁을 끝내면 그만인데, 진격 정지 명령이라고?!”
“각하, 왜 그러십니까?”
그의 부하인 프란츠 슐릭 장군이 잔뜩 분노한 그라츠를 말렸다.
“일단 진정하시지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는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러시는 겁니까? 밖에 병사들이 들을까 두렵습니다.”
“도대체 빈에서 현장 상황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이런 걸 내게 들이미는 것인지 원……!”
“이게 무엇이길래…….”
슐릭은 반쯤 찢어진 명령서를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라츠에 말했다.
“폐하께서 저희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들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명령서를 보내실 리가…….”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자네는 현장에서 얻는 정보보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빈에서 얻는 정보가 더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건가!”
“음……. 저희가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폐하께서 간파하셨다고……. 생각해야겠지요.”
“으음…….”
슐릭의 말에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그라츠는 명령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지도를 살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이라고?’
그라츠는 그의 나이 열일곱에 군에 입대하여 전 유럽을 지배하려던 나폴레옹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44년간 수많은 전쟁을 겪어온 그가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머리가 한층 어지러워졌다.
아무리 지도를 뚫어지라 쳐다봐도 자신이 보지 못하였으나 빈에 있는 황제가 꿰뚫어 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챌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고작 열여덟 먹은 황제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봤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건 충성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라츠가 군대 밥을 먹은 게 44년이었다.
지금 그의 44년 경력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상황이니 자존감이 높은 귀족인 그라츠가 이걸 인정하는 게 더 이상했다.
“……아니, 전선은 안정되었고 적들은 패주 중이니 동부전선에 이상 없다.”
“각하!”
“슐릭, 부대를 나누겠다. 자네에게 2, 3군단을 내어줄 것이니 도나우강 너머에 있는 헝가리의 주력을 포위하도록.”
“하지만 상부에서는 현 상황을 고수하면서 자리를 지키라고…….”
슐릭의 말에 그라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본관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봤네, 지난 전쟁에서도 현장의 상황을 멀리서 제어하려는 이들 때문에 많은 낭패를 겪었다네.”
슐릭 또한 그라츠의 말을 이해했다.
그의 한쪽 눈을 라이프치히에서 잃은 것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옐라치치에게도 전령을 보내어 자네를 보조하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각하와 함께 싸우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명령대로 헝가리군을 포위하겠습니다.”
“고맙네.”
상부에서는 그라츠에 대기를 명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적은 일정한 규율 없이 수도를 버리고 도주 중이었고, 적의 주력을 궤멸할 기회가 코앞에 있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데, 또다시 상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그라츠의 판단이다.
그리고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괴르게이는 이셔셰그 인근의 언덕에서 협곡으로 몰려드는 오스트리아군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는군.”
“그렇게나 엉덩이를 방실방실 흔들고 있으니 결국 못 참고 달려드는군요.”
“좋아! 클럽커와 안드라시는 출발했겠지?”
“예.”
부관에게 마지막으로 각 부대의 위치를 확인한 괴르게이는 곧장 언덕을 뛰어 내려와 최전선으로 달려갔다.
“얘들아! 그동안 도망치느라 고생 많았다. 지금부터는 우리의 땅에서 적을 쫓아낼 차례다!”
괴르게이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는 가장 뒤에 있는 병사도 볼 수 있게 검 끝에 자신의 샤코를 꽂아놓고는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자, 다들 그러면 있는 힘껏 뒤로 진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