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4화
고민?
“사과꽃이라…….”
그라츠는 조금 전에 어린 황제가 자신을 해임하며 해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과꽃이 진 자리에는 과실이 맺힌다…….
거의 30년 동안 군에 몸담으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처음 군에 입대했을 때는 한창 전쟁 중인지라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쳤고 그 이후에는 흘러가는 대로 살아오다가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가 여태껏 이룬 것이라고는 손에 쥐어진 지휘봉과 제복 앞섬에 달린 훈장 몇 개가 전부였다.
세간에서는 이걸 보고 성공한 군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지만, 그라츠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것들은 그저 치열한 세상살이 속에서 얻은 부산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허허……. 과실이라…….”
그리고 지금.
남이 깔아준 철로 위에서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살아왔던 그라츠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목표가 생겼다.
인생이란 소설을 써 내려가다가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착 가라앉았던 기운이 다시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들 주목.”
어린 황제를 떠나보낸 그라츠는 남아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던 장교들에게 말했다.
“자네들도 조금 전에 들었겠지만, 본인은 조만간에 사령관직을 물러나고 후방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물러날 생각은 없는바. 아직 내게 지휘권이 남아 있을 때 자네들과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데……. 같이 해주겠나?”
그리고 이내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 된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 * *
한편 괴르게이는 코마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바츠라는 도시에서 부대를 점검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적진을 돌파하여 적들에게 포위당한 코마롬을 구원하러 갈 것이다.”
상당히 위험한 길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던 만큼 괴르게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준비를 철저히 했다.
적들을 속이기 위해 숫자는 많지만, 신병들이 대두분인 병력을 부다로 보내 적들이 주력군으로 착각하게 했고 그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은 전쟁 초기부터 함께하던 정예병으로 구성했다.
그렇게 바츠에서 진군 준비를 마친 괴르게이에게 한가지 첩보가 들어왔다.
“코마롬에 오스트리아 황제가 친히 싸움터에 나왔다고 합니다.”
“직접? 허……. 겁쟁이는 아니라는 건가?”
“……생각보다 거친 싸움이 될 것 같군요.”
예상치 못한 오스트리아 황제의 등장이 당혹스럽긴 했지만, 괴르게이의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코마롬으로 쳐들어가 방심하고 있을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쫓아내고 요새를 구한다.
간단하지만 그만큼 정교함을 필요로 하는 작전이었다.
“클럽커, 가스파르, 담야니치 자네들만 믿겠네.”
그렇기에 괴르게이는 능력도 출중하며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교들로 인선을 꾸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괴르게이에게 가장 신뢰받는 인물 중에는 그를 미워하는 이도 있었다.
“가스파르.”
“예, 각하.”
“일개 구두장이의 아들이 여기까지 왔군. 이제 고지가 코앞이니 기분이 아주 좋겠어?”
괴르게이는 나름대로 그의 긴장을 풀어준다고 한 말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를 조롱하고 비꼬는 말로 들릴 뿐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내 일을 망쳐 버리지 말고 제대로 해보자고.”
“알겠습니다.”
가스파르는 이미 하프톤에서 슐릭의 부대를 놓친 일 때문에 괴르게이에 쓴소리를 들었다.
그렇기에 가스파르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괴르게이에 증오를 넘어 적대감마저 느끼는 상황이었다.
‘제 잘난 맛으로 사는 재수 없는 새끼.’
괴르게이의 말마따나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이 자리까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올라온 가스파르는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제 잘난 맛으로 사는 괴르게이는 이런 가스파르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존재였다.
“이보게 가스파르.”
“무슨 일인가.”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또 각하께서 자네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신 모양이로군.”
“……별일 아닐세.”
“별일 아니기는……. 각하께서도 자네에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눈치가 좀 없으신 것일 뿐이니 자네가 이해하게.”
클럽커도 이러한 상황을 대강 눈치채고 있었기에 괴르게이가 시원하게 그의 속을 긁고 가면 이렇듯이 위로해 줬지만 그런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네도 내가 구두장이의 아들이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럼 그렇게 해야지. 구두장이 아들이 코마롬으로 가는 길을 열어두겠으니 그곳에서 보자고.”
“이보게 가스파르.”
클럽커가 그를 불렀지만 이미 감정이 단단히 상한 가스파르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 * *
당장 인터넷만 들어가도 즐길 거리가 많은 현대와는 달리 이 시대는 여흥거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는 사람들과 만나서 취미활동을 즐기거나 책을 읽는 정도가 끝이었으니 말이다.
평소에도 그런데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 실낱같은 여흥마저도 즐길 수가 없었다.
“심심해…….”
[황제는 심심할 틈이 없는 직업이라네.]
‘그거야 영감님은 이런 지루함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밥 먹는 시간에도 너튜브를 보는 사람이었다고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식사 중에 다른 것을 병행하는 것은 궁정 예절에 어긋나는 행위이니 어머니께 회초리를 맞기 싫다면 하지 말게.]
‘예, 그것참 도움이 되는군요.’
영감님과 투덕거리는 것도 지루하고 매일같이 병사들의 제식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지루했다.
이따금 근위대 병사들을 데리고 인근 숲으로 사냥을 나가는 것은 그럭저럭 재밌었으나 전쟁터에서 그러는 것은 다른 이들이 안 좋게 볼 것이라는 영감님의 잔소리 때문에 관둘 수밖에 없었다.
“지루해…….”
당장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적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같이 군영이나 돌아다니며 이름도 모르는 병사들의 이야기나 들어주는 것이 일과의 끝이었다.
심심할 때 읽으려고 가져왔던 책들은 웹소설을 비롯한 팝콘 문학에 절인 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엔 너무 정적이고 딱딱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따금 내 눈에 들고 싶어서 내게 아부를 떨며 놀아주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 녀석들도 나를 만족시켜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골방에 갇혀 지루함과 사투를 벌인 지 일주일쯤 됐을 무렵.
그라츠가 날 찾아왔다.
“폐하, 그라츠 원수가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그라츠는 피곤해 보이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폐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반갑다네, 그런데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인가? 한창 인수인계 준비로 바쁜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청할 것이라……. 그게 뭔지 궁금하군.”
이제 총사령관의 자리에서 내려온 그라츠가 뜬금없이 나를 찾아와서 내게 부탁을 한다니 관심이 동했다.
“제가 여러 날을 고민해 봤지만, 적의 침공 루트를 특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군. 그건 어쩔 수 없지.”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위로해 주려 했으나 정작 그라츠는 내 위로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인지 내 말을 잘라먹으며 말하길.
“그래서 제가 고민하다가 괜찮은 생각이 떠올라서 폐하를 찾아왔습니다.”
“괜찮은 생각?”
“예, 일단은 지도를 보며 설명하겠습니다.”
그라츠는 챙겨왔던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치고는 열정적으로 내게 설명했다.
“지금 부다에 있는 아군은 적에게 포위당해 있지만 이보다 남쪽에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부대가 있습니다.”
“그건 어느 부대인가?”
“옐라치치가 지휘하는 크로아티아 병사들과 세르비아에서 넘어온 의용병들입니다.”
그라츠의 말투와 표정을 보아하니 그 병력으로 뭔가 일을 꾸미려는 듯했다.
“그래? 그럼 그들로 무언갈 하려는 것이로군.”
“바로 보셨습니다. 저는 이 병력으로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그라츠의 말은 이거였다.
적의 부대는 둘로 나뉘어 주공이 어느 곳으로 몰려오는지 알 수 없으니 다른 곳에 있는 부대를 움직여서 적의 반응을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적도 그 점을 인지하고 대비하고 있지 않겠나? 내가 알기론 트란실바니아에는 작센인이 거주하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와 연계할 것을 두려워하여 군대를 배치해놓은 것으로 아네만.”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라츠는 기세 좋게 손을 놀려서 지도 위에 있는 한 도시를 가리켰다.
“이곳에 폴란드 군단이 있지 뭡니까?”
“폴……. 뭐라고?”
“폴란드 군단입니다. 지난번 러시아에 맞선 봉기가 실패하고 유럽을 떠도는 불쌍한 이들이지요.”
“그렇군. 그런데 그 친구들이 왜?”
“이 폴란드 군단은 헝가리와 함께하며 우리 군과 싸우는 중입니다. 즉 적의 정규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세력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라츠는 입꼬리를 싹 올리며 내게 물었다.
“이 녀석들이 돌연 바츠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후퇴 중이던 아군의 앞길을 가로막더군요.”
“저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제 앞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호라.”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신나게 말하고 있으니 대충 알아들은 척하며 호응해 줬다.
그러자 그라츠는 한층 더 신이 난 것인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헝가리의 역량이 제국 전체의 역량에도 비벼볼 만하다고는 하지만 군대라는 것이 어디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안 그래도 요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전쟁세를 추가로 징세해야 한다고 내 골머리를 썩이더군.”
“……아무튼, 적의 주력군이 부다 인근에 결집해 있다는 것은 적의 후방인 트란실바니아방면은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듣자 하니 그럴듯하군……. 하지만 그게 확실하다는 정보도 없잖은가. 무턱대고 병력부터 동원했다가 대차게 실패하면 그 실패를 복구하는 동안 아군 전선에 구멍이 생길 것이네.”
“압니다. 그렇기에 제가 폐하께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라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모든 결정은 폐하께서 내려주십시오. 저는 폐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계획까지 전부 세워놓고 결정권을 내게 넘기는 그의 능구렁이 같은 모습에 나는 방긋 웃으며 영감님에게 물었다.
‘영감님 어떻게 가능성이 좀 있어 보입니까?’
[잘 모르겠군. 내 군사적인 능력은 자네와 별로 차이가 없어서 말이야.]
‘영감님이 조언을 못하는 때도 있군요.’
[그렇다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자네에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잖나.]
‘으음…….’
그라츠의 계획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럴듯하게 들린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작전의 성공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의 작전이 실패하면 역으로 우리 쪽의 남부 전선이 뻥 뚫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러시아군만 있었으면 이런 고민 없이 군대를 투입했겠는데…….’
[당장은 그렇겠지만 그들은 앞으로 더 큰 골칫거리가 되어 돌아올걸세.]
‘저도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머리 아프게 고민 중이잖습니까.’
이렇게 말없이 지도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실시간으로 수명이 깎여 나간다는 게 어떤 말인지 절실히 체감했다.
내 말 한마디에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이 결정되고 나아가 국가의 존망이 결정된다.
이건 대학생 시절 조별과제발표랍시고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던 부담감과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때도 긴장해서 말을 더듬었는데…….’
[신중하게 고민하되 결정은 재빠르고 확고해야 하네, 후회가 생겨도 이를 철회해서는 안 될 것이야.]
‘압니다. 안다고요.’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어느샌가 숨도 거칠어졌다.
“으음……. 씁…….”
고민이 깊어지자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내 집중을 방해했다.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온다는데……. 대충 결정해?’
‘나라가 망하면 그냥 다른 국가로 망명가지 뭐.’
‘그런데 어디로 가지? 어머니를 따라 바이에른으로 가야 하나? 그게 아니라면 프로이센으로?’
이런 상황에서 영감님이 내게 호통을 치셨다.
[이놈! 정신 차리지 못할까!]
‘깜짝이야……! 왜 그러세요!’
[쯧쯧……. 자네는 뭐 이리 잡생각이 많은 건가? 이번 일이 잘못된다고 한들 아무도 자네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게. 그 이후의 일은 신에게 맡기는 것이야.]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요.’
[자네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책임지려 했다가는 머리 위의 제관이 자네를 짓뭉개 버릴걸세.]
‘으음…….’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조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뭉개지기엔 자네는 할 일이 많잖나.]
‘그렇죠.’
[그럼 어서 결정하게, 지금 자네 때문에 알렉상드르 뒤마의 시집을 전부 읽지 못했단 말이네.]
영감님의 좀스러운 투정을 들으며 나는 그라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