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6화
음모?
야전에서 병사들과 함께 식사한 뒤로 내 이미지에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다.
“폐하, 오늘도 같이 식사하시지요!”
“제 아버지께서 잘츠부르크에서 음악을 가르치시는데 폐하께 손수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이번에 그라츠에 계신 저희 부모님께서 폐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사과를 몇 개 보냈는데, 맛이나 보시지요.”
예전에는 다들 길 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지나갔는데, 이제는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며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도 어느 이름 모를 병사가 건네준 새빨간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고민에 잠겼다.
“으음……. 이거 아무래도 병사들이 너무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누차 말했네만 자네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네, 자네가 저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까이 지내버리면 저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깃들걸세.]
“생각? 무슨 생각이요?”
[저 녀석도 나와 다를 바가 없다. 왜 저 녀석은 황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저리 잘 나가는데, 나는 이리 어렵게 사는가?]
영감님의 지적을 들으니 뭔가 속이 답답한 것이 왠지 불편함을 느꼈다.
“그럼 영감님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저들에게 준 호의가 적의로 되돌아온다는 말이로군요.”
[불행히도 그렇다네.]
“하지만 오늘 봤던 병사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던데…….”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것들이 쌓여간다고 생각해 보게.]
“으음…….”
영감님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는 잘 알았지만,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다.
“현대에서도 왕실은 여전히 존속되고 사람들의 지지도 많이 받던걸요.”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그만큼 왕실을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하는 자들도 생겨났지.]
“그건 그렇지만…….”
뭔가 알 듯하면서도 깊게 파고 들어가니 머리만 복잡해지는 이야기였다.
“쯧…….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고민해 보고 지금은 전쟁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영감님 때문에 속이 복잡했다.
내가 저들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저들은 나를 미워하게 된다니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수긍하게 됐다.
한창 복지공무원으로 살 때도 비슷한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세상 친절하던 사람들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본성을 드러내며 추악하게 변하는 모습 말이다.
그런 모습을 하도 보다 보니 나중 가서는 인간불신과 혐오에 빠져들었다.
“씁…….”
영감님의 잔소리 때문에 괜히 쓸데없는 기억까지 되살아나서 기분이 심히 불쾌해졌다.
[그게 왜 내 탓인가?]
‘지금 혼자 사색에 잠기는 중이니까 영감님은 조용히 좀 해주세요.’
[에잉……. 젊은 녀석이 쓸데없이 생각만 많아서는……. 쯧쯧.]
영감님의 잔소리에 기운이 쭉 빠질 무렵.
요전번에 봤던 젊은 소위가 천막의 문을 열어젖히며 조심스레 들어와서는 경례를 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그래, 무슨 일인가.”
“작전 회의에 다들 모였다는 걸 알려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이리된 것인가?
괜히 영감님 때문에 쓸데없이 답도 없는 고민을 한다고 시간을 버린 기분이었다.
[쓸데없는 고민이라니 쯧쯧쯧…….]
귀가 밝으신 영감님은 내 마음의 소리까지 들으시고는 연신 잔소리를 늘어놓으셨으나 영감님의 어떠한 말도 더는 내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일단은 말이다.
“잠시 준비할 테니 밖에서 기다리게.”
“예, 폐하!”
* * *
“적들이 저 요새에 알아서 기어들어 갔으니 당장에라도 코마롬을 공격해서 적군을 분쇄해야 합니다!”
“아직 적의 주력이 어느 쪽으로 오는지도 모르는데, 벌써 요새를 공격하자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릴!”
작전회의장은 오일장이 열린 시장바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오죽했으면 내가 들어와서 관심 좀 달라고 헛기침까지 했음에도 다들 눈이 돌아가서는 나한테 관심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크흠……. 가톨릭의 수호자이시어 보이자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등등의 주인이신 프란츠 요제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결국, 보다 못한 근위병 하나가 우렁찬 목소리로 내 등장을 알리고 나서야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었다.
“흠흠……. 황제 폐하 만세!”
“커 흠……. 황제 폐하 만세!”
다들 한창 다투던 와중에도 경례는 잊지 않았다.
그렇게 강제로 싸움을 멈추게 하고 가운데 마련된 내 자리에 가서 앉으니 장교들 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라츠 원수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폐하, 지난밤 무탈하셨는지요.”
“덕분에 편안히 보냈다네 그라츠 경.”
“그렇다니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여긴 왜 이리도 시끄러운 건가? 듣자 하니 저 요새를 공격하네, 마네로 싸우는 것 같던데…….”
원래라면 군대의 일에는 관심을 끊었겠지만, 나이 지긋한 양반들이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호기심이 일었다.
“허허, 다들 지금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를 고민하다가 생긴 작은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사공이 많아 보이는군.”
평소라면 그라츠가 발언권을 주기 전까지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들이 한껏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라츠는 그들을 제지하기는커녕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사공이 많다는 말씀은 배가 제대로 가고 있지 못하다는 뜻처럼 들리는군요.”
“예, 그 뜻이 맞네.”
“그럼 폐하께서는 왜 제가 저들을 제지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신 것이겠고요.”
“그렇지.”
그라츠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미 요새를 공격할 준비를 다 끝내놓았는데 공세를 망설인다니?”
“으음……. 그것이 말입니다…….”
그라츠는 지도에서 요새가 있는 코마롬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빈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얼마 전에 옐라치치가 보내온 첩보에 따르면 세르비아 쪽을 감시하던 반란군의 함대가 돌연 모습을 감췄다고 하더군요.”
“잠깐, 함대?”
바다가 없는 곳에서 함대를 언급하는 그의 발언에 놀라 물었다.
“여긴 바다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인데 함대는 무슨 함대를 말하는 건가?”
내 질문에 그라츠는 잠시 할 말을 잊었는지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양해군이 아니라 강상함대 말입니다.”
“강상함대?”
“굳이 따지자면 함대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만……. 어찌 되었건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의 함대가 아군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강에서 함대를 굴린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들이 사라졌다고 공격을 망설인다고.?
내 머릿속에 의문점이 하나둘씩 꽃피자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영감님이 말을 걸어왔다.
[도나우강은 헝가리를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강이기도 하지만 빈으로도 흐른다는 것을 기억하게나.]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지금 수도인 빈이 위험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않나!]
‘그렇군요. 그래서 왜요?’
[후우……. 자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영감님은 내 질문에 어이가 없었는지 화를 내며 나를 나무랐다.
‘아니 영감님이야말로 생각 좀 해보십시오. 수도가 위험해지는 게 왜 문제입니까?’
[빈은 제국의 중심이자 물류유통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중요인물이 사로잡혀서…….]
‘바로 그겁니다. 중요인물! 지금 제국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지요?’
내 물음에 영감님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지.]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황제인 저를 말씀하셨어야죠!’
[허허, 그럼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겠군. 황제가 이곳에 와 있으니 적들이 백날이고 천 일이고 수도를 공격해 봤자 원하는 것은 이루지 못한다고 말이야.]
‘바로 그겁니다!’
[끄응……. 거참 내가 자네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까지 아둔해지는 기분이 드는군.]
‘원래 단순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휴…….]
영감님은 복장 터지는 한숨 소리와 함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셨다.
“그러니까 경의 말은 적의 함대가 수도인 빈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말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현재 부대를 나눠야 할지 아니면 공세를 계속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라츠의 말에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렇군.”
“폐하께서는 어찌하였으면 좋으시겠습니까? 역시 부대를 돌려야 할까요?”
그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아니, 공격은 예정대로 진행하게.”
“하지만 수도가 위협받는 상황인데…….”
“실제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 않나? 그런 건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내 말에 하이나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그겁니다! 지금은 어머니의 손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밭을 가는 소처럼 우직하게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아잇, 깜짝이야…….”
한번 기세가 오른 하이나우는 그대로 내게 걸어오더니 내 앞에 꿇어앉으며 말하길.
“폐하! 소인에게 청이 하나 있습니다!”
“귀 아프니 좀 살살 말하게.”
“이번 코마롬 전투에서 제 병사들을 선봉에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골칫거리가 알아서 사지로 걸어 들어간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는 없어 보였다.
“자네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그리하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회의장 내의 분위기가 요새를 공격하는 쪽으로 기울자 그라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하이나우를 선봉으로 하여 정확히 다섯 시간 뒤에 공격을 시작하겠다.”
그리 말한 그라츠는 헛기침을 하며 내게 물었다.
“폐하께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내가?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
아무래도 내 체면을 세워준다고 그러는 그것 같은데, 나는 이런 것이 영 불편했다.
“흠흠……. 폐하께서 힘이 되는 말을 해주신다면 장교들도 사기가 오를 것입니다.”
“힘이 되는 말이라…….”
갑작스러운 그의 요청에 잠시 고민하다가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본인이 말재주가 부족하여 그대들에게 힘이 돼 줄 만한 어구가 떠오르질 않는구나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하마.”
검지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저 요새에 제일 먼저 입성하여 깃발을 꽂는 부대와 그 지휘관에게는 무한한 영광과 그에 뒤따르는 보상이 있을 걸세.”
영광과 보상이라는 말에 다들 눈빛이 달라졌다.
‘역시 명예와 돈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법.’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는 장교들을 보고 있으니 다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심에 절로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쯧쯧……. 자네는 어째 사람이 그리도 속물적인가?]
‘속물적이라뇨 저는 그저 사람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성과급을 지급하겠다고 한 것일 뿐입니다…….’
[결국, 그게 그거잖나.]
‘일이 잘 풀리면 행정업무에서도 이러한 제도를 도입해 보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만 그건 너무 근시안적인 처사일 뿐이네.]
영감님은 내가 너무 속물적이라고 하셨지만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는 내게 황제라는 이유로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사람은 하이나우처럼 내가 아니라 제관에 충성을 바치는 이뿐이었다.
‘그러니 저도 슬슬 지지기반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후……. 자네는 고작 돈 몇 푼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아닙니까?’
[아닐세.]
‘그렇군요.’
영감님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듯했다.
[쯧쯧……. 그러니 자네는 저들에게 대놓고 이용당했음에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지.]
‘제가 이용당했다고요?’
[으이그……. 그래!]
‘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들이 처음부터 자네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기 싸움을 걸어오는데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자네는 왜 이리도 눈치가 없는가!]
영감님의 말대로였다.
조금 전에 장교들이 보여줬던 모습은 마음속에서 충성심이 끓어올라 황제를 존중한다기보다는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이나우만 제외하고 말이다.
‘뭐 어쩌겠습니까? 정식으로 책봉된 것도 아니고 전대 황제의 실책을 수습하려고 급하게 황제가 된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요.’
[어휴, 나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을 전부 해임하고 그라츠를 당장에 내 눈앞에서 치워버렸을 걸세.]
‘그렇게 할까요?’
[아니, 그건 내 방식이지 자네의 방식이 아니지.]
‘그럼 저보고 뭘 하라는 겁니까?’
내 말에 영감님은 잠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더니 이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무얼 하고 싶은가?]
‘질문이 좀 어렵네요.’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네의 기억을 뒤져보며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 했네만……. 도저히 알 수가 없더군.]
영감님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칭찬인가요?’
[그래, 칭찬일세.]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뭔가?]
영감님도 미소를 지으시며 내게 물었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랬다.
‘뭐……. 대충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확인했으니 우선은 군권을 좀 쥐어볼까 합니다.’
[그럼 조금 전에 자네를 대놓고 무시하던 장교들을 나무라야 하지 않았는가?]
‘에이……. 뭐든지 상황을 잘 따져서 해야지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뭐라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지, 잘 알고 있군.]
‘기회는 곧 찾아올 겁니다. 저는 그때를 노려서 군부를 휘어잡고…….’
[제국을 휘어잡을 생각이로군.]
영감님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웃었다.
그러자 영감님도 따라 웃었다.
하이나우 경은 혼자서 웃고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