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7화
해임?
공격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바삐 움직이는 장교들과 줄 맞춰서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들을 지켜보며 앉아 있으니 영감님이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진짜 전쟁을 처음 보는 것이겠군.]
‘뭘 오그라들게 그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자네가 큰 충격을 받을까 염려되어 그런 것이지.]
‘제가 충격을 받아요? 하! 영감님이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는 밤마다 슬레셔 영화 한 편씩 보던 사람입니다.’
[으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상의 것과 진짜 현실은 다른 법일세.]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영감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거나 하진 않을 것 같네요.’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영감님은 방긋 웃었다.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러고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셨다.
“정말 바람 같은 노인네야.”
“누가 말입니까?”
영감님이 사라지니 이번엔 그라츠가 내게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나저나 이번 공격으로 저 요새를 점령해야 할 텐데 말이야.”
나는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그러자 그라츠도 더는 묻지 않고 답했다.
“이번 공격은 본격적으로 요새를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방어수준을 파악하는 것에 가까운지라 아마 점령은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적의 대응능력을 알아보려고 병사들을 밀어 넣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그럼 자네 말은……. 이 공격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되었건 본격적인 공세 이전에 적의 대응능력을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그게 그거잖나!”
내가 말꼬리를 잡으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 그라츠는 당황하며 내게 물었다.
“음……. 폐하께서는 이번 공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군요.”
“아니, 그럼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던지겠다는데 누가 좋아하겠나?”
내 말을 들은 그라츠는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허허허……. 폐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며 작전을 구상했다가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으음…….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병사들을 소모하는 것도 승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라츠 경.”
“이미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이건 무의미한 소모전이 아니라…….”
“적의 대응 수준을 알아보는 전초전이라는 거지. 그 정도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중요한 것은 그의 태도였다.
분명 자신이 구상한 작전으로 병사들이 죽어 나갈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게 왜 중요하냐는 듯이 내게 되묻는 저 태도가 몹시나 불쾌했다.
거기에 현재 아군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무의미한 작전을 반복하려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게 말씀해 주시면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그건…….”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지만, 정확히 이게 뭔지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영감님이 다시금 내게 말을 걸어 오셨다.
[그라츠 경은 전형적인 귀족의 모범이지.]
‘아니, 귀족이면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여겨도 된다는 겁니까?’
[그럼 아닌가?]
‘뭐라고요?!’
영감님은 한결 무거워진 어조로 내게 물었다.
[자네의 말처럼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럼 자네는 왜 다른 이들의 위에서 그들을 부리는 건가?]
‘그거야…….’
[자네가 나를 자연스럽게 연기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자네도 은연중에 다른 이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던가.]
영감님은 내 역린을 마구 파고들면서 내 기분을 단숨에 진창에 처박아버리셨다.
‘으음…….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 취급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 그 둘은 나눠서 생각해야 하는 문제야.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여기서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건 모르겠군.]
‘으음…….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데요. 저보고 칼을 차고 말에 올라 미친 척하고 요새로 뛰어들란 말씀입니까?’
[내가 그런 위험한 일을 자네에게 권할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그럼 저보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옆에서 살살 긁으면서 속을 뒤집어놓는 영감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영감님은 이런 내 모습도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씀하시길.
[잘 생각해 보게, 이미 그라츠는 파면된 상태야. 지금은 그저 후임자가 오기 전까지 군을 지휘할 수 있는 상태지.]
‘……그래서요.’
[그런데 그라츠가 후임자와는 상의가 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그건 제가 권유해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라츠는 자네를 말릴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렇지 않았네, 왜 그랬을 것 같은가.]
‘그거야…….’
말문이 턱 막혔다.
그라츠가 날 막아설 수 있었다는 영감님의 말에 조금 전의 일을 곱씹어봤지만, 딱히 그런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았다.
[에잉……. 모자란 사람 같으니라고.]
‘씨……. 그래서 결국 이게 무슨 상황인데요!’
[뭐긴, 그라츠가 은근슬쩍 자네의 권위를 빌려서 이번 전투의 책임을 황제에 물리려는 것이지.]
‘그라츠가요?’
아무리 그라츠가 해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엄연히 오스트리아의 군인이었다.
그런데 황제와 국가에 충성해야 할 사람이 의도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을 만들어 그 잘못을 내게 뒤집어씌운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야……. 그라츠 경은 저와 제국에 충성하는 군인이잖습니까. 왜 지난번에 영감님께서 그는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군부의 인물일세.]
‘군부요?’
영감님은 친절하게 내게 설명해 주셨다.
[그는 이미 두 번의 실패로 자네에게 해임당한 상황인 데다가 자네의 눈치까지 보고 있지.]
‘그래서요?’
[군부의 최고실세이자 원로인 그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 버린다면 뒤에 남아 있는 이들은 어찌 되겠나?]
‘그야 제가 하나하나 둘러보고 쓸 만한 녀석들만 솎아내겠……. 아!’
이제야 영감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라츠는 제가 군부에 손을 대는 것이 싫은 모양이로군요.’
[그렇지, 아무리 황제에게 충성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라츠 ‘개인’의 충성이지 군부라는 ‘집단’의 충성과는 거리가 있지.]
‘으음……. 어렵네요.’
뭔가 알 듯 말 듯 간질간질한 것이 괜스레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원래 정치라는 것이 흑과 백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사이에 무수히 많은 회색분자가 섞여 있다네, 그 회색들마저도 저마다의 색이 다르니……. 무슨 말인지 알겠나?]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요컨대 영감님의 말은 이랬다.
이제 곧 원수직을 내려놓아야 하는 그라츠는 자신의 실각으로 군부의 입지가 줄어들 것을 걱정하여 이번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황제의 결정으로 벌어진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내가 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내 눈치만 보던 군부도 다시금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운신의 폭도 조금 자유로워질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그냥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오늘 공격은 취소할 테니 부대를 뒤로 물리게.”
내 말에 그라츠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말렸다.
“폐하, 갑작스레 작전을 변경하시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지금 병사들이 공성 진지로 이동하여 공성준비에 들어갔는데, 지금 병력을 빼신다면 큰 혼란이 벌어질 것입니다!”
“폐하,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다들 당장 병력을 빼면 문제가 생긴다느니 하며 나를 뜯어말렸지만, 그라츠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내게 물었다.
“폐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지금 부대를 뒤로 물리라는 건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이유? 그런 게 필요한가.”
“세상에 모든 사건에는 인과라는 것이 존재하듯이 폐하의 결정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것이 알고 싶은 겁니다.”
그라츠의 말에 내 주변에서 나를 뜯어말리던 장교들도 어느샌가 입을 다문 채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그라츠로군. 고작 몇 마디 말로 분위기를 후려잡고 있어.]
‘영감님, 지금 누구 편을 드시는 겁니까.’
[편을 들다니? 본인은 그저 그라츠의 능력에 감탄했을 뿐이라네.]
괜히 속을 긁어놓는 영감님의 말에 혀를 차면서 말했다.
“이번 공격은 두 가지가 잘못되어 있네.”
“두 가지나 말입니까?”
그라츠는 이전보다 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첫째,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작정 일을 벌이는 것부터가 문제일세.”
“그건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적의 대응 수준을 알아본다고 아군의 귀한 전력을 낭비하는 것은 그대의 무능일세,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이라면 자신이 가진 것과 동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충원 가능한 전력을 구분할 줄 알아야지.”
“무능이라…….”
앞에서 새파랗게 젊은 황제에게 무능하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라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리고 둘째…….”
둘째는 딱히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급하게 떠올려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다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감님! 영감님!’
[왜 부르는가.]
‘두 번째는 뭐로 할까요?! 급해요!’
[……자네가 자신만만하게 말하기에 뭔가 생각해 둔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아, 씨 급하다니까요!’
영감님은 한숨을 푹 쉬시더니 이내 말씀하셨다.
“둘째로는 그대가 임시로 원수직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그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네.”
“!!!”
나는 그리 말하며 그라츠의 앞섬에 달린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검지로 쿡쿡 찌르며 물었다.
“자네가 이걸 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병사가 피를 흘려야 했는지를 기억하게.”
“……알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군막을 걸어 나와 들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역시 영감님이십니다.’
[수십 년간 제국을 통치한 내게 이정도야 우습지.]
‘예 예, 그러시겠죠.’
크게 낙담하는 장교들을 뒤로하며 군막을 벗어나고 나니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찌어찌 잘 둘러대긴 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순 억지가 아닙니까?’
[그렇지.]
‘괜히 쓸데없이 작전을 엎었다고 손가락질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뭐 그런 것을 걱정하는가?]
영감님은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군인이라는 족속들은 앞에서는 살갑게 굴다가도 뒤돌아서면 이빨을 드러내는 족속들이라네, 그러니 자네가 뭐라 하건 가만있건 간에 어차피 손가락질할 위인들이라는 뜻이지.]
‘그, 그렇군요.’
* * *
“적이 병력을 물린다고?”
“총이라도 두고 온 게 아니겠습니까?”
클럽커의 농담에 괴르게이는 그를 쏘아봤다.
“농담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하게.”
“크흠……. 죄송합니다.”
클럽커에게 가벼운 주의를 시킨 괴르게이는 망원경을 들고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이곳저곳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이로군.”
괴르게이가 망원경을 집어넣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면 가스파르가 물었다.
“일단 병사들에게 내렸던 경계 상태를 해체하고 휴식을 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일단 대기하도록.”
그의 대기명령에 가스파르의 눈썹이 장대비를 맞으며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각하, 외람되지만 현재 병사들이 오랜 행군과 쉬지 않고 이어진 경계근무 때문에 많이 지친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알고 있네.”
“그럼 병사들에게 휴식을 줘서 적절히 피로를 풀게 하고 다시금 전열을 재정비해야…….”
가스파르의 말에 괴르게이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짜증 섞인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지금 그들만 힘든 줄 아는가? 나 역시 지난 사흘간 한숨도 자지 않고 지휘소를 지키며 적을 물리칠 작전을 구상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병사들이 지친 것은 알고 있네만 당장은 그들에게 휴식을 줄 수 없네, 그런 줄 알게.”
지극히 괴르게이다운 말이었다.
괴르게이는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타인에게도 똑같은 수준을 요구했다.
솔선수범하는 그의 모습에 병사들은 그를 좋아했고 몇몇 장교들도 그를 따르긴 했지만 이렇듯이 모두에게 자신과 똑같은 수준을 유지하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다들 뭐 하는 건가? 그렇게 멀뚱히 있을 시간이 어디 있나! 다들 움직이게!”
괴르게이의 호통에 다들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가스파르는 가만히 괴르게이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