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20화
군부?
“……그럼 가만히 있자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
영감님께 물었다.
‘죽일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게나.]
‘적이 코앞까지 밀고 오는데도 가만있자고 하는데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요?’
[슐릭 경도 무언가 생각이 있어 그러는 것일 테니 쓸데없는 생각 말게.]
내심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해서 아군이 얻게 되는 이점은 무엇인가.”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되지요.”
“그게 끝인가?”
“이후부터는 그라츠 각하의 부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후우……. 하나도 모르겠군. 좀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대놓고 눈치를 주니 슐릭도 그제야 내 의중을 파악한 것인지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설명을 너무 간략하게 한 모양이로군요.”
“그래, 자네의 간략한 설명도 못 알아먹었다네, 그러니 좀 쉽게 설명해 주겠나?”
“…….”
역시 군인들은 이게 문제였다.
좀 풀어줬다 싶으면 좋다고 기어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귀족들이 문제인가? 아무튼, 그리 기분 좋은 짓은 아니었기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니 슐릭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예, 폐하! 현재 아군의 상황은 대략 이렇습니다.”
슐릭의 설명은 이랬다.
현재 코마롬 시내에 포위된 아군의 숫자는 반군의 숫자와 맞먹는지라 적들이 빠르게 정리하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적이 아군부대와 교전하면서 전력을 깎아 먹으면 이후에 추가로 부대를 투입하여 적을 정리하겠다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는데…….
“그러면 시내에 있는 아군은 어찌 되는 건가?”
“아마 큰 피해를 보겠지요.”
“허, 그럼 좀 더 빨리 지원군을 보내서 그들을 구해주면 되지 않겠나?”
“그렇게 되면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폐하를 최대한 안전하게…….”
결국, 내 핑계였다.
내 안전? 그래 중요하지.
나도 내 목숨으로 도박하면서까지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찌 되었건 내 목숨을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소수의 적 기병대가 무서워서 대군을 본영에 묶어둔다는 것은 어딜 봐도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라츠가 부대를 나눈 것 때문에 병력 운용에 차질이 있는 모양이로군.]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라츠는 왜 이런 시기에 저와는 상의도 없이 부대를 둘로 나눈 걸까요?’
[으음……. 그 친구가 좀 꽉 막힌 사람이긴 해도 충성스러운 인물이니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 테고……. 뭔가 일을 꾸미려는 모양인 것 같군.]
‘그게 뭘까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간 자네가 그라츠를 너무 억죄려 했다는 것뿐이네.]
‘아니, 제가 뭘 억죄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영감님이 말씀하신 대로만 했는데요.’
[앓느니 죽지……. 어휴.]
영감님의 한숨을 뒤로하고 슐릭에게 물었다.
“좋아……. 넓은 마음으로 전부 이해해 주겠네, 그런데 그라츠는 어디 있는 건가?”
“예?”
“그라츠는 어디 있는 것이냐고 물었네, 조만간 다른 이로 바뀐다고는 하지만 내가 직접 임명한 야전 원수인데……. 정작 모습이 보이질 않는군.”
“크흠……. 그것이…….”
슐릭은 조금 전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 간 것인지 하나 남은 눈동자를 필사적으로 굴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각하께서는 반군의 함대를 따라가셨습니다.”
“뭐라고? 잘 안 들리네만.”
“……반군의 별동대를 요격하시러 반군의 강상함대를 따라가셨습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군대를 움직인 건가?”
슐릭은 대답이 없었다.
이번엔 살짝 목소리를 높여 다시 물었다.
“누구에게 허락받았냐고 묻지 않나.”
“……각하께서는 제국 원수에게 주어진 지휘 권한으로 부대를 동원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내게 보고가 들어왔어야 할 텐데……. 보고서는 어디 있지?”
“급하게 출발하신 탓에 미처 준비를…….”
슐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팔받이를 내리쳤다.
있는 힘껏 내리친 탓에 여리디여린 내 손이 퉁퉁 부어올랐지만, 고통을 참으며 외쳤다.
“그라츠가 또 나를 무시한 것인가! 내 그동안 그라츠의 헌신을 생각하여 한두 번은 눈감아주려 했건만 세 번째는 참지 못하겠군!”
“폐,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옵고…….”
“그럼 여기 있는 이들도 전부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 군부 전체가 나를 통째로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내 말에 하이나우가 화들짝 놀라며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는 단 한 번도 폐하의 권한을 감히 무시한다거나 부정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가? 그럼 자네에게 묻겠네, 전시에 명령 불복종이 벌어지면 장교와 병사를 불문하고 총살하는 것으로 알고 있네, 내 말이 맞나?”
“예, 그렇습니다!”
내 말에 슐릭을 비롯한 다른 장교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폐, 폐하…….”
“조용. 지금 본인이 교지 중인데 끼어드는 건가? 그래, 우리 위대하신 슐릭 경께서 말씀하시겠다는데 본인이 들어줘야겠지.”
“그, 그런 것이 아니옵고…….”
그동안 군부가 날 무시해 왔던 것을 살짝 언급해 주니 본인들도 찔리는 것이 있는지 다들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쯧쯧……. 악독한 자 같으니라고.]
‘신 병장 그 새끼는 이것보다 더 심했거든요? 그리고 자꾸 기어오르려는데 슬슬 기강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게.]
영감님도 이건 아니라고 보신 것인지 오랜만에 내 편을 들어주셨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으니 다들 내 눈치를 살피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다들 그동안 내 만류에도 독단적으로 행동하다가 여러 실책을 벌인 탓인지 내 말에 이렇다 할 반박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팍 숙일 뿐이었다.
“다들 왜 말이 없는가? 본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란 귀족 장교들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겪어보는 갈굼을 견디지 못하고 다들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모두 저희의 잘못이니 분노를 거두어주시옵소서.”
결국, 항복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봐줄 생각이 없었다.
원래 귀족이란 족속들은 한두 번 고개를 숙이는 것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허허, 이 사람들 참……. 본인이 자네들에게 이런 일로 화를 낼 만한 인사로 보이는가?”
내가 웃으며 말하니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고는 다시금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제국을 지탱하시는 귀족 나리들께서 말씀하시겠다는데 고작해야 열여덟 먹은 애새끼가 뭘 하겠나? 됐네, 괜히 본인이 자네들의 심기만 어지럽힌 모양이로군.”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다들 입에서 곡소리를 냈다.
“폐하!”
“송구합니다. 폐하!”
“다 저희의 잘못입니다!”
“폐하께서 그라츠 각하……. 아니, 반역자 그라츠를 잡아다가 총살대에 올리라고 하면 그리하겠고, 대열의 최선두에서 적들에게 돌격하라고 하면 그리할 테니 제발 분노를 거둬주십시오…….”
결국, 장교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한 번에 받아줄 수는 없었기에 좀 더 그들의 애간장을 녹여줬다.
“에이……. 우리 나리들께서 본인의 앞에 무릎 꿇으셔야 되겠소? 다들 일어나시오.”
“폐하……!”
“아, 본인이 너무 버릇없이 서 있었던가? 아이코 이런……!”
내가 무릎 꿇으려 하자 근위대장인 한스 남작이 나를 뜯어말렸다.
“폐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허 이거 놓으시게 한스 경, 우리 귀족 나리들께서 본인의 사과를 바라고 있잖나.”
이쯤 되니 회의장에 있는 장교들은 슬슬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그들로서는 이전에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황제가 스스로 권위를 낮추다 못해 땅바닥에 던져 버리려 하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하이나우가 부드러운 흙바닥에 머리를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박으며 말했다.
“폐하, 제가 저들을 대표하여 폐하께 죄를 청합니다. 저들의 오만함에 폐하의 기분이 상하셨다면 그 모든 것은 저의 죄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벌하시어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
하이나우의 모습을 보아하니 슬슬 이 지루한 짓도 끝낼 때가 온 듯했다.
밖에서는 적과 아군이 피나는 전투를 벌이는 중인데, 언제까지 이들과 기 싸움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고개를 들게 하이나우 경, 그대는 죄가 없네.”
“……저를 벌하시지 아니하시겠다면 저 스스로 벌을 내리겠습니다.”
“허허, 죄가 없는데 어찌 벌을 내리겠는가? 이 모든 것은 무능했던 숙부님의 잘못이지.”
그리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며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슐릭을 내려다봤다.
“지금부터 부대의 모든 지휘권은 본인에게 이양되었네, 동의하나?”
“예, 폐하!”
다들 이제 막 전입해 온 신병처럼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그라츠는 돌아오는 즉시 명령 불복종으로 가두도록.”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슐릭 경.”
“예, 폐하! 부르셨습니까!”
빠릿빠릿한 그들의 모습에 영감님이 감탄하며 내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다들 제가 누군지 잊어버린 것 같아서 알려줬을 뿐입니다.’
[쯧쯧쯧……. 그렇다고 해도 저들을 너무 몰아붙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닐세.]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밖에 적들이 돌아다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이들에게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으음…….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영감님의 한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슐릭에 물었다.
“적들이 오고 있다. 이제부터 어찌할 건가?”
“폐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자네 의견을 물었네.”
그러자 슐릭은 고장 난 컴퓨터처럼 그대로 멈추더니 머리를 푹 숙였다.
“예! 적이 요새를 박차고 나왔다는 것은 농성이 아니라 헝가리 지역에서 아군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그런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대응해야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괜히 전력을 깎아 먹기보다는 부대를 내보내어 코마롬시에 고립된 아군을 구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데 말이야.”
“폐하께서 그리하라 말씀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어째서인가?”
고작 다섯 글자뿐이거늘 슐릭은 몸을 벌벌 떨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 그것이…….”
아무래도 내가 또 난리를 피우지는 않을지 살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편히 말하게.”
“……저, 적의 포병전력은 아군에 비해 하찮은 수준인지라 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진 못할 겁니다. 아니, 오히려 코마롬 시내에 있는 아군을 진압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그렇군. 그럼 자네는 아군이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면서 적의 전력을 깎아 먹을 동안 죄인 그라츠 공작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들이치려는 것인가?”
“예, 바로 그겁니다!”
“흠…….”
썩 나쁜 계획은 아니었지만 뭔가 석연찮은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그라츠가 제때 합류하지 못한다면 어찌 되는 건가? 가령 적군이 그라츠의 부대를 따돌리고 후방에 모습을 드러낸다던가 그런 것 말일세.”
내 지적에 슐츠는 웃었다.
“허허허……. 폐하, 아무리 각하께서 요사이에 일개 학자 나부랭이에게 몇 번 패하시긴 했으나 그건 방심하여 벌어진 일입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나.”
“그건…….”
“만약의 상황에도 대비해야 하는 게 지휘관으로서의 본분 아닌가?”
내 지적에 슐츠는 다시금 말꼬리를 흐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영감님이 우려가 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자네 어쩌려고 그러는가? 괜히 알지도 못하는 일에 끼어들었다가 문제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게.]
‘에이……. 적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에 뻔히 보이는데, 눈 뜨고 당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괴르게이는 지금 아군을 각개격파하려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전부 당할 겁니다.’
[허허, 난 또 무슨 말을 한다고……. 그건 여기 있는 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슐릭도 그냥 기다리자고 한 것이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저들이 없는 병력까지 쥐어짜 내어 코마롬으로 왔는데, 그마저도 잘게 나눠놓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영감님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일단 포위된 아군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뒤엔 저 요새를 점령해야 합니다. 괴르게이가 아무리 병력 운용이 기가 막힌다고는 해도 한 줌의 기병대를 대군에 꼬라박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그라츠를 기다리면 안 되는 건가?]
‘그것도 방법이지만……. 영감님께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괴르게이가 이에 대해 방비도 해놓지 않았을까요? 만약 저들보다 반군이 먼저 도착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양쪽으로 포위당하겠지.]
‘그럼 지는 겁니다.’
영감님은 내 말에 가볍게 혀를 차며 말씀하시길.
[쯧쯧쯧……. 여기 있는 이들이 그걸 모르고 그러는 것 같은가? 자네나 본인이나 생각하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평생 군대에서 산 이들이 그것도 모르는 머저리로 보이나?]
‘그럼 왜 수십 년을 전장에서 구른 장교들이 일개 대학원생에게 농락당하는 겁니까?’
[으음……. 아무튼 본인은 자네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다는 점만 알아두도록.]
‘예 예, 그러시겠죠.’
영감님의 투덜거림은 제쳐두고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장교들을 내려다봤다.
대부분 30년 전 나폴레옹 전쟁기에 전장에서 활약하던 이들이었다.
‘군대를 싹 갈아엎을 때도 되었는데…….’
앞으로 제국 내부를 싹 뜯어고치려면 군부의 지지는 필수였다.
군부가 웬 이상한 놈팡이들과 연대하여 내게 칼끝을 들이민다면 골치 아파지지 않겠는가?
지금이야 저들이 내게 머리를 숙였지만, 언제고 다시 대가리를 치켜세우고 내게 대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갈아엎는다면 그 이후에는 어찌할 생각인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사르데냐는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노리고 있다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부를 좀 뜯어고쳐야 한다는 겁니다. 일단 제일 시급한 것은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방법이 있나?]
‘생각해 둔 게 있긴 합니다. 다만 그것도 이번 전투에서 이겨야 가능한 것이지요.’
아직은 생각만 하는 중이다.
생각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