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21화
접전?
괴르게이는 세렝게티 초원을 내달리는 하이에나처럼 전장을 배회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약점을 찾으려 했다.
“단단한 진형이로군.”
하지만 그라츠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진형에는 좀처럼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괴르게이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협적으로 적 진영 주변을 배회하면서 없는 빈틈도 만들어내려 했다.
“형제들이여 나를 따르라!”
괴르게이는 본진 코앞까지 다가오기를 반복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위협했지만, 그들은 미동도 없었다.
하다못해 포라도 쏠법했으나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괴르게이와 그의 기병대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상황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괴르게이가 바라던 상황이었으나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쉽군……. 적이 빈틈을 보여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사로잡는 것도 기대했는데…….”
하지만 괴르게이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계획했던 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느긋하게 클럽커의 합류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각하! 각하!”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제, 제국 원수인 그라츠가 아침 일찍 부대를 이끌고 죄르로 떠났다는 모양입니다!”
“그래?”
하지만 괴르게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 * *
그라츠가 이끄는 부대는 코마롬을 떠나 도나우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죄르에 이르렀다.
“흔적이 좀 보이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군. 이쯤에서 내렸을 줄 알았는데.”
그는 얼마 전에 코마롬에서 사라졌던 헝가리의 강상함대를 찾고 있었다.
황제의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전장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반군의 함대가 이번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군의 함대가 모습을 감추자 곧장 병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뒤를 쫓았던 것이지만…….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적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으음……. 이번엔 정찰병을 좀 더 멀리 파견해 보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분명 그의 계산대로라면 죄르 인근에서 반군과 마주쳐야 했다.
그 이상 올라가면 아군의 막강한 함대와 마주쳐서 큰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기에 반군이 죄르에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지만……. 적은 이곳에 없었다.
“계산을 잘못한 건가…….”
그라츠는 지도를 꺼내 다시금 위치를 확인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적은 죄르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코마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병력을 빠르게 전개할 수 있는 평야지대인 곳 말고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라츠는 이전보다 더 많은 정찰병을 더 멀리 파견했지만 도통 헝가리군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으음…….”
그렇게 한참을 죄르에서 대기하던 그라츠에게 한가지 첩보가 들어왔다.
“적이 브라티슬라바를 공격했다고?”
“예, 수도방위대가 도시 인근에서 헝가리 깃발을 봤다고 합니다.”
“브라티슬라바라면……. 수도인 빈에서 하루 정도 되는 거리가 아닌가? 적들이 그곳을 공격했다는 것은…….”
수도인 빈을 노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뜻을 알아챈 장교들은 다급히 그라츠에 빈을 구원하러 갈 것을 청했다.
“각하, 이대로 있다가는 수도가 반군의 손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빈으로 가야 합니다!”
“다들 진정하게, 우선은 상황을 파악해야지 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무턱대고 움직여서야 하겠나?”
말은 그리했지만, 그라츠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또 한 방 먹었군.’
괴르게이에 패하기 전이라면 반군이 브라티슬라바를 공격했다는 소식에 적들이 아군의 시선을 돌리고자 술수를 부린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이 브라티슬라바를 공격했다고?
진짜로 빈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지난 이셔셰그 전투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자신의 대군을 농락했던 담대함을 미루어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다만 지금 그라츠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폐하께 별다른 언질도 없이 부대를 움직였는데……. 그대로 빈까지 간다면 정말 반역자로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닌가?’
아무리 호시탐탐 군부를 손에 넣고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황제가 마음에 안 들어도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미숙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해도 황제는 황제였다.
비록 지금은 그와 대립하는 통에 원수의 작전 권한을 들먹이며 군대를 빼 오긴 했지만, 황제와 문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라츠의 고민은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담……. 이대로 빈으로 가자니 반군으로 보일 우려가 있고, 그렇다고 코마롬으로 돌아가자니 빈이 위험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그라츠의 고민이 길어지자 휘하의 장교들은 그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각하, 빈을 잃으면 모두 끝입니다.”
“…….”
결국, 그라츠는 결단을 내렸다.
“빈으로 간다.”
클럽커와 그의 부대는 죄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괴뉘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서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계획대로군.”
“괴르게이 각하께서는 어찌 이런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워두신 것인지 원…….”
마을 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마을 주민이나 전쟁을 피해온 피난민인 척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정찰병을 속인 클럽커는 그라츠의 부대가 물러나가 곧장 명령을 내렸다.
“다들 시간이 됐다. 우리는 이대로 대로를 따라 코마롬으로 향할 것이며 그곳에서 머저르인들의 압제자인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사로잡을 것이다!”
“우오오!!”
더는 클럽커의 부대를 막을 존재는 없었다.
그들은 코마롬을 향해 진군하며 마주치는 마을마다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고 주민들에게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똑똑히 알려줬다.
“다들 보시오! 이제 압제자는 쓰러지고 자유의 시대가 올 것이요. 그러니 다들 걱정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시오!”
갑작스러운 군대의 등장에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주민들은 겁에 질렸고 이는 헝가리계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로서는 갑자기 낯선 군대가 마을에 들어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클럽커를 비롯한 헝가리 장교들은 억지로나마 자신들을 환영해 주는 주민들의 모습에 감동할 뿐이었다.
그렇게 코마롬까지 쉬지 않고 내달린 클럽커의 부대는 이윽고 요새를 포위한 오스트리아군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가만히 있자고?”
“죄, 죄송합니다!”
가만히 있다가 다 죽게 생겼다.
적들의 별동대를 막겠다던 그라츠는 죽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 소식이 없었고 대신 반군의 부대가 후방에 나타났다.
‘영감님, 어째 제국군은 전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것 같은데요.’
[으음……. 원래 이렇지는 않았는데…….]
‘앞에도 적, 뒤에도 적이니 망했군요.’
[……미안하구먼.]
‘영감님이 미안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기 있는 장교들이 죽일 놈들이죠.’
만약 이곳에서 살아나 빈으로 돌아간다면 이 망할 귀족 장교들을 깡그리 갈아치우고 기존의 사관학교들을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법.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이라도 병력을 보내 코마롬시에 고립된 아군을 구출해 오게.”
“폐, 폐하……. 그렇게 되면 아군의 전력이 나뉘어 적에게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냥 이렇게 각개격파 당하자는 건가? 더는 자네들의 무능함을 두고 볼 수가 없으니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게!”
내가 호통을 치니 장교들은 수그러들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부대를 구출해 오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일단 머릿수는 많아지잖습니까. 그럼 최대한 버티면서 괴르게이와 협상을 해야죠.’
[하긴…….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겠군.]
내가 전략 전술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시간을 끌면 나를 도우러 올 이들이 제법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그럼 내가 해야 할 것은 간단했다.
“답은 존버다.”
[존버가 뭔가?]
‘X나 버티는 거죠.’
[……자네의 천박한 어휘력은 이제 적응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슐릭은 내 명령대로 코마롬 시내에 포위된 아군을 구원하기 위한 병력을 따로 편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진영을 빠져나가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괴르게이는 쾌재를 불렀다.
“결국, 적들이 정면승부를 선택했군.”
슐릭의 부대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코마롬 시내로 쳐들어가는 것을 본 괴르게이는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스파르에게 전령을 보내 내 말을 전해라, 적이 강하게 밀어붙일 때는 맞붙어 싸우지 말고 요새로 물러나고 적이 뒤로 물러나면 그 뒤를 바짝 쫓으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괴르게이의 명령을 들은 가스파르는 코웃음을 쳤다.
“각하께서는 적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모르시는 모양이로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터무니없는 명령을 보내지 않으셨겠지.”
“실로 그렇습니다. 어차피 적의 지원군이라고 해봐야 1만 안팎인데 아군은 그의 두 배가 아닙니까?”
“그렇지, 거기에 우리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적합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잖은가.”
가스파르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한 가지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처음 봉기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헝가리 방위군의 포병전력은 제국군보다 심각한 열세였다.
지금도 코마롬에 배치된 소형 포와 중포를 모두 합쳐봤자 30~40문 정도였지만 그에 비해 제국군은 50문의 ‘중포’와 수십 문의 경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며 유럽을 주름잡았던 나폴레옹은 신은 가장 강한 포병대가 있는 곳에 미소를 지어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인 프로이센의 영웅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포야말로 천박한 전장에 품위를 가져다주는 존재라 했다.
그리고 이들과 제일 많이 치고받으며 그들의 포병 운용기술을 몸으로 터득한 것이 오스트리아였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본디 기병대로 군 생활을 시작했던 가스파르는 대포의 중요성을 낮게 봤고, 그 결과 제국군에게 쓴맛을 봐야 했다.
“중앙의 방어선이 적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당장 지원을 보내주셔야 합니다!”
“벌써 말인가?”
“적의 포격이 중앙에 집중된 탓에 아군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습니다!”
가스파르의 부대는 적의 집중포격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라간 버터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거기에 아군이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것을 알아챈 오스트리아군이 안에서 내통하니 오히려 가스파르의 부대가 역으로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으음…….”
“장군!”
“……최대한 부대를 수습해서 코마롬 요새로 물러나겠다.”
결국, 슐릭의 파상공세를 견디다 못한 가스파르는 큰 피해를 보고 코마롬 요새로 물러나야 했다.
이렇게만 보면 전황은 오스트리아에 유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전장을 배회하던 괴르게이가 직접 전투에 뛰어들자 전황은 금세 뒤집혔다.
“달려라. 달려! 다들 나를 따르라!”
괴르게이가 이끄는 후사르 연대는 오스트리아의 포병대가 포격 지원을 끝내고 다시 본대로 복귀하는 틈을 노렸다.
“어, 어어?!”
“적 기병대다!”
“전원 전투준비!”
전투가 끝난 줄 알고 방심했던 포병대는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아무리 포병대가 전장의 신이라고 해도 가까이 달라붙은 기병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괴르게이와 후사르는 양 떼 속에 뛰어든 사자처럼 오스트리아 병사들을 무참히 물어뜯었다.
“대포에 못을 박아라! 저들이 쓰지 못하게 해!”
“예, 각하!”
괴르게이의 명령을 받은 헝가리 후사르는 미리 준비해 뒀던 못과 망치로 오스트리아군 대포를 못 쓰게 만들었다.
“저, 저놈들이 대포에 못질한다!”
“막아! 막아 이새께 들어!”
당연하게도 오스트리아 병사들은 이를 말리려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적에게 휘둘렀다.
대포를 장전할 때 쓰는 포병솔은 물론이고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나 포신을 식힐 물을 담아두는 양동이까지 가리지 않고 손에 들었다.
그렇게 서로 한참을 악에 받쳐서 싸우다가 오스트리아의 기병대가 다가오는 것을 본 괴르게이가 외쳤다.
“이만하면 됐다. 가자!”
괴르게이의 부대는 바람처럼 왔다가 다시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세찬 바람이 지나간 곳에는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