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22화
카이사르?
전초전으로 서로 한 방씩 주고받았다.
헝가리 반군은 아군의 집중포격에 큰 피해를 보고 요새로 물러났고 적진에 포위된 아군을 구하는 것도 성공했다.
이렇게 끝났다면 기뻤겠지만, 괴르게이는 이걸 눈 뜨고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보병의 엄호도 없이 무방비하게 노출된 포병대를 습격했고 그들에게 큰 피해를 줬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적이 좀 더 아프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보였으나 아군 포병전력이 너무 큰 피해를 보았다.
“34명 전사에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고, 중포도 10문이나 못 쓰게 돼버렸다고?”
“……죄송합니다.”
“거참…….”
전체적인 군 규모를 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이번 전투에서 이 정도의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뭐 어려운 걸 명령한 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부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포병대가 보병의 엄호도 없이 움직이다가 적의 기병대에 당한 것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러는 것이니 설명을 좀 해주겠나?”
기병대도 어디 숨어 있던 게 아니라 평평한 평야 지대를 어슬렁거리던 이들이었다.
몸을 숨길 곳도 없는 전장을 배회하던 이들이니 당연하게도 그들의 움직임은 아군이 전부 확인할 수 있었고 대응할 여력도 충분했다.
오히려 적을 유인하여 포위 섬멸하는 것도 가능했겠지……. 그런데 역으로 우리가 한 방 먹었다.
‘그……. 영감님의 유능하다는 기준이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으음…….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네가 괜스레 이상한 명령을 내려 그런 것이지 않나.]
‘이게 전부 제 탓이라는 겁니까? 간단한 명령도 제대로 수행 못 하는 장교들이 문제 아닐까요? 아니, 애초에 반군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으면서 이걸 진압 못 한다는 것부터가…….’
[그건 그거대로 문제지만 자네가 괜히 여기저기 끼어들어서 일을 망친 것도 문제라는 말이네.]
‘끄응…….’
영감님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니 주변에서 쭈뼛거리던 장교들이 화들짝 놀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어째 장교라고 있는 것들이 적을 어찌 처리할지보다 내 눈치를 더 살피는 것 같아서 괜스레 짜증이 치밀었다.
‘이번 전쟁만 끝나면 전부 물갈이를 하든가 해야지 뭘 해도 할 것 같네.’
[그래도 저들은 나폴레옹 전쟁부터 활약했던 이들이라네, 그들의 경험은 아군에게 큰 힘이…….]
‘나폴레옹이 죽은 지도 이제 거의 30년이 다 돼갑니다. 30년이면 아이는 어른이 되고 청년은 노인이 되기 충분한 시간이지요.’
[보통은 그걸 세대교체라고 한다네.]
‘그렇게도 부르지요.’
[쯧쯧…….]
내 말에 영감님은 혀를 끌끌 차셨다.
[크흠……. 그것은 사실이나 늙은이에게는 젊은이들이 가지지 못한 완숙함이 있는 법일세.]
‘그럼 뭐……. 제국 전역에 사관학교라도 만들어서 교장이나 교수 직함을 달아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들이 과연 그걸 좋아하겠나? 누차 말하지만, 자네는 귀족들의 명예나 자부심 같은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로군.]
‘저는 다들 평등한 세상에서 살아서 그런지 명예니 영광 같은 건 잘 모르겠네요.’
[쯧쯧쯧……. 그래서 자네가 아직 배움이 더 필요…….]
나는 영감님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대신 제가 잘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
영감님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비밀입니다.’
[……?]
‘안 말해줄 건데요.’
그러고는 영감님의 아우성을 뒤로하며 내 앞에 꿇어앉아 있는 슐릭을 책망했다.
“슐릭 경.”
“예, 폐하!”
“그대의 잘못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금 대규모 부대를 지휘할 만한 지휘관이 없는 것도 있으니 벌을 내리지는 않겠네.”
“가, 감사합니다. 폐하!”
슐릭은 살았다는 듯이 안도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야. 저기 있는 코마롬 요새에 오스트리아의 깃발이 휘날리는 것이지.”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최선을 다하게.”
다소간의 피해가 있긴 했지만, 이걸로 질책할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기에 슐릭에게는 적당히 주의를 시키고는 옆에서 내가 명령을 내려줄 때까지 기다리던 하이나우를 돌아보며 그에게 물었다.
“하이나우 경, 그라츠에 대한 소식은 없나?”
“예! 죄르에 도착하여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빈으로 갔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죄르에서 빈으로 갔다?”
“예, 그렇습니다!”
그라츠가 군대를 이끌고 빈으로 갔다.
이렇게 들으면 별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오스트리아 제국군 야전 원수가 대군을 이끌고 수도로 상경했다.
이렇게 하면 조금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물론 그라츠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나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제국을 향한 그의 충성심만큼은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도 전부 자네의 몹쓸 혓바닥과 똥통에 처박힌 눈치 때문에 그런 것이…….]
하지만 내 주변 이들은 아니었다.
그라츠는 군부의 원로이지만 곧 은퇴를 앞둔 몸.
다른 이들에게는 하루빨리 끌어내려야 자신의 직위를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폐하, 그라츠가 반란을 모의하는 것이…….”
“역시 저는 처음부터 그라츠의 충성심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사사건건 폐하의 말에 딴지를 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뭐 이런 식이었다.
어차피 곧 사라질 양반이니 다들 스스럼없이 그를 물어뜯었다.
다만 슐릭만이 그라츠를 변호할 뿐이었다.
“……분명 그라츠 각하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을 겁니다. 우선은 상황을 파악하고 조처하셔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슐릭 경,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립니다.”
“지금 반역자 그라츠를 두둔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쏠렸음에도 슐릭은 덤덤하게 자기 뜻을 밝혔다.
“누구를 편들고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중히 처리하자는 것입니다. 막말로 그라츠 각하께서 정말 역심을 품었다면 빈으로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코마롬으로 돌아오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가 정말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코마롬으로 와서 군대를 장악한 뒤에 나를 사로잡고 헝가리 반군과 담판을 짓는 것이 나아 보였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럼 이번 일에 대해서는 상황을 지켜보고 다음에 판단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신나게 그라츠를 물어뜯던 이들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물러났다.
“지금 중요한 것은 후방에 나타난 적과 코마롬 요새에 틀어박힌 부대에 포위당했다는 것이네, 이걸 타개할 만한 방법이 없겠는가?”
현재 아군은 반쯤 포위되어 있었다.
퇴로는 헝가리군 분견대가 막았고 정면에는 커다란 도나우강과 튼튼한 코마롬 요새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거기에 괴르게이가 이끄는 기병대는 전장을 배회하면서 호시탐탐 아군의 약점을 물어뜯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군이 코마롬 요새를 점령하고 적군을 무찌를 만한 방법이 있겠는가?”
다들 대답이 없었다.
하긴 요새를 포위한 우리를 적이 또다시 포위한 상황이니 뭘 해보려 해도 마땅치 않긴 했다.
그때, 슐릭이 말했다.
“이 모습은 알레시아 전투 같군요.”
슐릭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당시에 카이사르가 겪은 최악의 위기를 언급했다.
“당시 로마군은 베르킨게토릭스가 있는 요새를 공략할 때 적의 지원군에게 이중으로 포위당하여 낭패를 겪었지요.”
“그렇군.”
“하지만 로마군은 적의 공격을 견뎌내면서도 기어코 요새를 함락시켰고……. 결국 승자가 되었지요.”
슐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자네 말은……. 우리도 로마군처럼 적의 포위 공격을 견뎌내며 요새를 공략하자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슐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장교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이건 무모합니다!”
“폐하, 저들은 갈리아족처럼 아둔하지도 않고 숫자만 많은 머저리도 아닙니다!”
“그렇다는군.”
나도 슐릭의 작전이 의심스럽긴 했다.
내가 생각해도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공성전을 벌이겠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슐릭은 단호했다.
“폐하, 저들이 갈리아족이 아닌 것처럼 아군도 로마군이 아닙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당시 로마군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철같이 버텨내어 승리를 거뒀지만……. 우리는 지원을 기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슐릭의 말에 지휘부에 있던 장교들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 그건 그렇군요.”
“그라츠……. 각하의 부대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적들은 제대로 손도 못 쓰겠군요.”
희망이 조금 보였다.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당장 포위되어 항복한다는 것에서 항전하여 최종적으로 승리를 따낼 수 있다는 선택지가 늘어난 것이다.
나는 슐릭에 물었다.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빈에 전보를 보내 그라츠 각하께 폐하의 명령을 전한다면……. 아무리 늦어도 한 주일 안에는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일주일…… 일주일이라…….”
일주일이라는 말에 다들 입을 꾹 닫은 채로 눈을 감고는 저마다 머릿속으로 계산에 들어갔다.
그렇게 있기를 얼마쯤 지났을까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들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도 가능합니다!”
“폐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당장에라도 저 요새를 폐하께 들어다 바치겠습니다!”
다들 지원이 온다는 말에 기운을 되찾은 것인지 당장에라도 싸우러 나갈 것같이 굴었다.
“그래, 그럼 이번 건에 대해서는 슐릭 경에게 모든 전권을 내릴 테니 그의 명령을 따르게.”
“감사합니다. 폐하!”
* * *
슐릭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라츠 각하의 일과 여러 가지 군부의 삽질이 겹친 결과 현재 황제는 군부를 무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가면 전쟁이 끝나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강제로 은퇴 당할지 모를 일이었고 그중에 자신도 끼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대로 무능한 놈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군부에서 물러나 영지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과를 보여야 했다.
황제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했다.
“일단 해보겠다고 말은 했는데…….”
이런 종류의 지휘는 처음이었던지라 슐릭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분명 그가 몇 번씩이나 읽었던 갈리아 전기에서는 로마인의 믿음과 강철로 그들을 물리쳤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런 것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슐릭은 결국 가장 정석적이고 확실한 방법을 떠올렸다.
“동원 가능한 포병을 전부 요새 공략에 돌리고……. 요새 공략에 쓸모도 없는 기병대는 본진 수비를 위해 남겨둬야겠군.”
슐릭은 지난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아군의 집중포화에 제법 큰 피해를 보았던 것을 기억했다.
적이 요새로 숨어들었다고는 해도 그 안에 있는 병력은 부상병이 더 많으리라 판단했고 다소간의 피해가 뒤따르더라도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으로 요새를 함락시키려 했다.
이게 잘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실패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미 황제는 자신을 한 번, 아니 두 번씩이나 용서해 줬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를 실망시킨다면……. 그때는 은퇴가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