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24화
안드라시 가스파르?
“콜록, 콜록……. 일단 명령하신 대로 전부……. 에취!”
한스 경은 기관지가 별로 안 좋은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신 기침을 했다.
아니, 둘 다인가?
[자네가 이런 기발한 생각도 할 수 있을 줄이야……. 참으로 놀랍군.]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주시죠.’
어렸을 적에 삼국지에서 봤던 것을 살짝 응용해 본 것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요 며칠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바싹 마른 탓에 병사들이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흙먼지가 크게 피어올랐다.
[그렇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데 자네에게 아무런 재주가 없을 리가 없지!]
‘칭찬이시죠……?’
[그렇게 생각하게.]
영감님의 말 속에 뼈가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러고는 이곳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적군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근위대장에게 물었다.
“그라츠에게 보낸 전보는 어찌 되었나?”
“금방 복귀하겠다고 답신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렇군.”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최대한 적과의 교전을 피하며 그라츠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어차피 저들이 노리는 것은 내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니 투우를 하듯 거리를 조절하며 시간을 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렵지 않은 것 맞나?]
‘제가 도망 다니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워낙 극성인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이런 사람들을 피하려고 자연스레 터득한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열 받네.
“개자식…….”
“폐하?”
“아무것도 아닐세, 슬슬 자리를 좀 옮기지.”
“알겠습니다.”
불만 섞인 목소리가 좀 나올 법도 했지만, 흙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 근위대 병사들은 군말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 맞다.”
이대로 물러나면 적들이 미친 척하고 들러붙었을 때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적의 발을 묶어둘 병사를 준비시켜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참으로…… 감격스럽군. 그동안 아무짝에도……. 크흠……. 무능력해 보이던 자네가 이리 든든해 보일 줄이야…….]
‘제가 이래 봬도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도 나오고 공무원시험도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동안은 주변에 적응하느라 목소리를 안 냈던 것이지……. 저도 이 정도는 할 줄 안다 이겁니다.’
[하긴……. 그 악마 놈이 자네를 고른 녀석이 설마 아무런 능력도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네.]
‘정말요?’
[농담일세.]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미 죽어서 영혼만 남으신 분께 뭘 어쩌겠는가.
한숨을 내쉬며 근위대장을 불렀다.
“한스 경.”
“예, 폐하.”
“용감한 이들을 이곳에 조금 남겨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고자 하네.”
“알겠습니다.”
“단, 이곳에서 적과 직접 교전하는 것이 아니라 적들에게 단 한 번의 일제사격 이후에 우리와 합류해야만 하네.”
“……? 알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최대한 필요한 것만 챙겨 서쪽 숲을 천천히 빠져나오니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반군이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적과 우리의 거리가 좀 가까워 보였기에 근위대장인 한스는 내게 속도를 높이자고 건의했다.
“폐하, 조금 속도를 높이시는 것이…….”
“음? 아니야 나들이 온 것처럼 최대한 느긋하게 움직이자고.”
“하지만 적이 너무 가깝습니다. 이대로면 뒤를 따라잡힐 수도 있습니다.”
“저놈들이 우릴 따라잡는다고? 에이……. 자네는 걱정도 참 많군. 저놈들은 우리 뒤에 있는 저것 때문에 우리를 못 따라올 것이네.”
“뒤에 있는 것이라면……. 저기 있는 숲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 안에 숨어 있는 후방병력 말이네.”
“아!”
한스 경은 그제야 내 생각을 눈치챈 듯했다.
“적들이 아군의 지원군이 도착한 줄 알고 도망치게 만드실 생각이시군요.”
“바로 그걸세.”
“그럼 저들에게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부탁하지.”
* * *
클럽커는 자신의 눈앞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군기를 발견하고는 의아함을 느꼈다.
“저게 왜 이곳에?”
분명 그가 기억하기에 합스부르크의 문양이 그려진 군기는 제국근위대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국근위대가 있는 곳에는 제국의 황제가 있었고 말이다.
“황제라면 본진에 숨어 있을…….”
그러고 보니 제국군 본진에 황제가 있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클럽커는 황제의 기만을 눈치채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허, 제법 머리를 굴렸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갑자기 혼자서 웃으면서 북치고 장구를 치는 그의 모습에 클럽커의 부관이 물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답하길.
“지금 황제는 그라츠가 돌아온 것처럼 위장하여 우리를 속이려 하는 것이네.”
“예? 하지만 저 숲속에서 저렇게나 흙먼지가 피어오르는데…….”
“그게 기만이라는 것일세, 이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허허.”
“그, 그렇군요.”
젊은 부관은 클럽커의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호르티!”
“예, 장군.”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사로잡아야 한다. 다들 행군속도를 높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클럽커의 명에 따라 병사들이 속도를 높였다.
전투 도중에 불려 나와 갑작스러운 급속행군이었음에도 다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그들이 코마롬의 서쪽에 있는 숲을 지나칠 때, 익숙한 독일어가 들려왔다.
“발사!”
“이런!”
숲에서 튀어나온 총구는 그대로 클럽커 부대의 측면에 일제사격을 때려 박았고 이에 대열이 흔들렸다.
“무슨 일인가!”
“매복입니다. 장군!”
“뭐라고? 숲에 오스트리아군이 숨어 있었어!?”
클럽커는 당황하며 병사들에게 퇴각을 명했다.
“젠장, 속았다! 전원 뒤로 물러난다! 후퇴!”
“후퇴하라! 전원 후퇴하라!”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이어 내려진 후퇴명령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고 숲속에 숨어 있던 근위대도 황제의 명령을 이행하자마자 재빠르게 도주하여 본대와 합류했다.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본 근위대장은 흥분한 채로 나를 돌아봤다.
“적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나도 보이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대단하십니다!”
“뭘 이 정도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후방에 병력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대로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주, 죽다 살았네.’
[저들이 자네를 사로잡더라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네, 오히려 아주 극진히 모시겠지.]
‘그렇습니까?’
[그래, 대신 자네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처리할지도 모르겠군.]
‘끔찍하군요.’
[자네 기억 속에서 본 게 더 끔찍했다네, 본인이 죽고 그런 일들이 있을 줄이야…….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더군.]
‘예, 뭐…….’
도대체 뭘 보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맞장구를 쳐주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후우……. 한스 경.”
“예, 폐하!”
근위대장은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이대로 슐릭의 부대와 합류하겠네, 길을 잡게.”
“알겠습니다!”
* * *
“자네가 한 방 먹었군.”
“……면목 없습니다.”
“아니야. 그 상황이었다면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 기운 차리게.”
허겁지겁 도망치던 클럽커는 괴르게이와 합류한 뒤에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이들이 분개하며 지금이라도 황제의 뒤를 쫓자고 괴르게이에 권했지만, 그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늦었네, 지금쯤이면 황제는 슐릭의 부대와 합류한 뒤일 테니 지금 쫓아가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하지만 저희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병사들이 너무 지쳤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야만 하네.”
그의 말대로 병사들이 너무 지쳤다.
수십 일 동안 행군과 전투를 반복하며 코마롬에 도착했는데, 그 뒤에도 3교대로 근무와 작업이 계속되는 통에 제대로 피로를 풀지 못한 상황에서 종일 전투를 벌였으니 병사들의 체력은 방전되다 못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늘은 코마롬에서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세우고 며칠 동안 병사들을 쉬게 해야겠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요새가…….”
괴르게이는 요새를 돌아봤다.
제국군의 맹렬한 공세에 요새 곳곳에서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성벽에서는 전투가 계속되는 중이었다.
요새는 금방이라도 함락당할 것처럼 위태로웠지만 가스파르와 병사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장교들은 당장에라도 요새를 구하러 가자고 건의했지만, 괴르게이는 단호히 말했다.
“요새는 버린다……. 지금은.”
“각하!”
“그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군의 힘이 미치지 않는 작은 요새가 아니라 충분한 휴식이다.”
말은 그리했으나 괴르게이의 마음도 그리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한 명의 사람으로서 동지들을 버리고 가자는 말을 어찌 쉽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일개 장교이기 전에 헝가리 방위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이었다.
“지금은 코마롬을 버리고 부다까지 물러나 상처를 보듬는 것이 중요하다. 복수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괴르게이는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폴란드인이 했던 말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분명 동지들을 위해 그를 쫓아냈지만 정작 그 역시 뎀빈스키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으음…….”
“각하, 정말 이대로 물러나시는 겁니까?”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장교들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번 전역의 실패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었다.
호기롭게 요새를 치고 나온 것과 제국군을 속여 전력을 나눈 다음에 제법 큰 피해를 입힌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다음으로 나가지 못했다.
회심의 일격은 황제의 기만술에 당해 보기 좋게 실패해 버렸고 괜한 곳에서 시간을 낭비한 탓에 뭔가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요새는 함락 직전이었다.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기로 결의하여 스스로 들고일어난 헝가리의 젊은이들이 개죽음을 당하게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전략적인 희생이라고 치부하며 다음 작전을 고민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괴르게이는 그리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도 수십, 수백 명이 죽어 나갔고 지금도 죽어 나가고 있음에도 하늘은 푸르렀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것인지 원…….”
그때 광장에서 누군가가 힘차게 부르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평소처럼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진리를 탐구하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몇 달 전에 발견한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하며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문득 그때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돌아간다.”
“각하!”
“반박은 받지 않겠다. 정 남고 싶은 사람들은 부대를 떠나도록.”
“…….”
잠시 감상에 빠지긴 했지만, 괴르게이는 이를 단호하게 끊어내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냉철한 이성을 앞세워 부하 장교들을 다그쳤다.
“뭣들 하는가? 빨리빨리 움직여!”
“…….”
괴르게이가 본대를 이끌고 전장을 빠져나갔다.
코마롬 요새에서 이를 내려다보던 가스파르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후우……. 결국 떠났군.”
“장군, 정문이 위태롭습니다.”
가스파르는 부관의 말에도 여전히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괴르게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군…….”
“부대를 내성으로 이동시키도록. 부상이 심각한 이들은……. 내버려 두고 움직일 수 있는 이들에게 최대한 챙길 수 있는 물자를 챙겨 내성으로 이동시켜.”
“……항복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부하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잖습니까.”
이미 전투의 승기는 제국군에게 넘어간 상황이었지만 가스파르는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민족? 혁명? 그런 같잖은 이유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하찮은 것보다는 더 낮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에 가까운 것이다.
“구두장이의 아들이 대군을 이끌고 황제와 맞서며 최후의 최후까지 맞서 싸울 기회가 어디 있겠나? 바토리, 기대할 만하네! 오늘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걸세.”
가스파르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도망친 괴르게이보다 마지막까지 오스트리아군에 맞선 구두장이의 아들을 기억할 것이야!”
그러고는 몸을 돌려 부관에게 물었다.
“그것이 두렵다면 자네는 병사들을 이끌고 요새를 떠나게.”
하지만 가스파르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