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31화
노인?
요한은 얼마 전까지 일하던 무두공장이 문을 닫으며 요 며칠간 집에만 있어야 했다.
이대로 공장은 망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사장이 자신을 이대로 해고하는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단 말이다.
“젠장……. 망할 사장 새끼……. 도대체 언제까지 집에만 있으라는 거야? 리암은 아직도 공장을 다니는 것 같던데…….”
불안감에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급료를 못 받은 지 오래되어 집에 돈이 떨어진 탓에 술은커녕 당장 내일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웠다.
어린 아들은 아직 이런 상황을 모르는 듯했지만……. 그 탓에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후우……. 알로이스에게는 잠시 친척 집으로 가 있으라고 해야겠어.”
자신이 굶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늘그막에 본 하나뿐인 아들이 굶주림에 신음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벌써 알로이스가 돌아올 시간이로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곧 학교에서 돌아올 아들을 위해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고기와 아침에 먹다 남긴 빵조각을 어찌어찌 잘 버무려서 간단한 스튜가 완성되었을 때쯤 문이 열리며 아들이 돌아왔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손 씻고 점심 먹거라.”
“네!”
올해로 쉰여섯.
몸뚱이는 늙다 못해 하루하루 썩어가는 처지였기에 아들이 장성하는 것을 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한창 배가 고플 나이인 아들의 접시에는 큼직한 고깃덩이를 담아주고 자신의 접시에는 짭조름한 육수만 담은 요한은 혹여라도 스튜가 흘러넘칠까 조심스레 아들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먹자꾸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크흠…….”
요한은 애써 무심한 척하며 식사를 마쳤다.
어린 아들이 친구들과 놀겠다며 밖으로 나가자 요한은 집 한쪽에 숨겨둔 비상금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꺼내 남은 돈을 확인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동전 몇 개뿐이었다.
“……어떻게든 일을 다시 해야 하는데…….”
요한은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날의 거리는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평소에는 조용하기만 했던 거리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이게 궁금했던 요한은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물었다.
“이보시오. 오늘 무슨 날이기에 이렇게도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오?”
“응? 댁은 신문도 안 보시오? 지금 정부에서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발표한다고 난리잖소.”
“그게 왜…….”
“거참, 지금 시들시들한 기업들에 지원금을 쏟아붓고 그동안 필요했던 토목사업을 한꺼번에 해치우면서 노동자를 모집한다고 그러잖소.”
“아!”
“식사도 주고 보수도 제법 쏠쏠해서 사람들이 몰리고 있으니 생각 있으면 빨리 가보쇼.”
요한은 어렸을 적부터 도제 일을 하느라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정부가 새로운 노동자를 구한다는 말에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 그건 어디 가야 신청할 수 있는 겁니까?”
“이 길로 쭉 가다가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시면 사람들이 줄 서 있을 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게 하지 말고 황제 폐하께 하쇼.”
“황제 폐하…….”
요한은 고개를 들어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황제의 동상을 올려다봤다.
이미 동상 주변에는 그와 비슷하게 동상을 올려다보는 이가 여럿 있었다.
* * *
헝가리가 국민투표로 국론이 갈라져 혼란스러울 때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통화를 평가절하를 발표하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적인 경제부흥책을 하나둘씩 내어놓았다.
“우선 확보한 자금으로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을 구제해야 하네.”
“어떻게 말입니까?”
“마침 내전으로 파괴된 곳들이 많고 새로이 정비해야 할 곳도 많잖은가?”
“……?”
제국을 휩쓴 내전이 일단락되고 평화가 찾아왔다.
모래성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일단 전장에서 모든 총성이 멎었다.
일단은 말이다.
“지난 굴덴화 평가절하와 금태환 일시중지로 재정에 여유가 생기지 않았는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게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했다가는 곧장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입니다.”
“끔찍한 디플레이션보다는 적절한 인플레이션이 나은 법일세.”
평소와는 다르게 확신에 찬 내 말을 들은 영감님 역시 걱정된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이보게 내가 자네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네만……. 아무래도 이쪽 분야의 전문가인 브루크 경의 말을 듣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저는 과거의 검증된 성공사례를 제국에 맞게 살짝 개조해서 이식시키는 것뿐입니다.’
[그게 무엇이기에 그러는가?]
‘그건 보면 아실 겁니다.’
내가 따라 하고자 하는 것은 수십 년 후 미국에서 시행될 뉴딜정책을 살짝 베껴온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따져보자면 그 당시 미국과 현재 제국의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그 효용성만큼은 입증된 정책이 아니던가?
“하지만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하여 물가를 조절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멈춰 섰던 헝가리와의 무역이 풀리면 곡물 가격이 급락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다른 지역의 농부들이 큰 피해를 볼 것이니 우리가 개입하여 곡물가를 조정해야 하네.”
브루크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이렇게 무리하게 공공사업을 벌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려는 것일세.”
“양질의 일자리라고 하시면…….”
브루크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나는 눈치를 살피는 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우선 내가 추진하는 사업은 총 세 가지일세, 첫째로는 빈과 부다, 페스트를 잇는 철도망을 만드는 것이고 둘째로는 헝가리 북부 광산지대를 개발하여 우수한 철광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지.”
“그럼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마지막?”
그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마지막은 도나우강 유역 개발사업이네, 강을 따라 성장한 무역도시를 거점으로 그곳의 산업을 다시금 부흥시켜볼 생각이네.”
“으음……. 훌륭하신 생각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예산이 조금 부족할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내 말에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던 브루크 경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렇다는 말씀은……. 어디선가 자금을 끌어들일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이 모든 사업을 한꺼번에 진행하는 것은 제국의 재정으로도 힘든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뉴딜정책은 돈도 많고 사람도 많고 자원도 많은 미국에서 시행한 정책이었으니 말이다.
“일단은 영국과 러시아와 접촉해서 대규모의 차관을 들여올 생각이라네.”
“영국과 러시아말입니까?”
[이보게, 러시아에서 차관을 들이는 건 하지 않기로 했잖나. 왜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가!]
내 말에 영감님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셨다.
‘그때는 차관을 들이지 않더라도 잘 헤쳐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내부를 좀 들여다보니 우리끼리 영차영차 한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던걸요.’
[으음…….]
‘뭐,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러시아에 달라붙는 건 아닙니다. 다 계획을 세워뒀지요.’
[자네가 그리 말하니 조금 의심스럽군.]
‘에이……. 제가 화장실 갈 때도 쳐다보시는 분이 뭐 그리도 의심이 많으십니까?’
[어허, 내가 그렇게나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이래 봬도 제법 바쁜 사람이라네.]
‘그러시겠죠.’
뭐라고 떠들어대시는 영감님을 뒤로하며 혼자 고민하는 재무부 장관 브루크 경에게 말했다.
“우리가 영국 쪽에 사람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프로이센에도 사람을 보내게, 그럼 러시아가 우리 쪽과 접촉을 할 것이야.”
“갑자기 프로이센은 무슨 연유로…….”
“대뜸 러시아와 접촉하면 영국인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우릴 바라볼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저쪽에서 먼저 우리와 접촉하게 만들어야지.”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러시아의 황제라면 프로이센과 우리가 만난다는 소식에 관심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아닐 수도 있잖나.]
‘보낼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는가.]
‘저쪽에서 먼저 우리와 접촉할 테니까요.’
[으음…….]
* * *
“이곳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그야 어렵지 않지.”
영국 런던 다우닝가의 어느 한적한 클럽에서 제법 나이를 먹은 노신사는 젊은이가 건네준 서류에 서명했다.
“그래, 이번에 황제가 되신 분은 프란츠 카를 대공의 첫 번째 아드님이라고?”
“네.”
“허, 프란츠 폐하의 셋째는 어쩌고 그 아들인 프란츠 요제프 전하께서 황제가 된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어머니의 입김이 들어간……. 흡!”
노신사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대답하던 젊은이는 다급히 자신의 입을 막으면서 화를 냈다.
“메테르니히 각하! 분명 정치에 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환 조건이었을 텐데요?!”
“그랬지, 그래서 자네에게 물어본 것이 아닌가?”
“아무리 경이라도 그런 태도는 지양하시지요!”
“하하하…….”
노신사는 계약서를 잘 말아서 자신의 인장 반지로 봉인까지 끝마친 후에 다시 젊은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동양에서는 이런 말이 있더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재밌는 말 아닌가?”
“송충이가…… 뭐요?”
“푸핫!”
노신사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젊은이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길.
“의회에서 닳고 닳은 늙은이들만 보다가 자네처럼 순수한 젊은이를 만나니 이제야 좀 사는 것 같군.”
“……설마 영국의원들과 만나신 겁니까?”
“그들이 자꾸 찾아오는데 어쩌겠나? 그저 몇 번 어울려주며 시간을 보낸 것일 뿐이야.”
노신사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점점 멀어지는 그를 불러세웠다.
“메테르히니 경!”
“음? 곧 죽을 늙은이를 어찌 그리고 애타게 찾으시는지요. 막시밀리안 전하.”
“크흠……. 형님께서 제게 시킨 일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 그걸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군요.”
“허허, 조금 전에는 정치에는 관심도 두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메테르니히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인파 속으로 사라지려 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막시밀리안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거,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습니까!”
“조언이라…….”
막시밀리안의 부름에 메테르니히는 뒤돌아서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에게 다가오더니 이전과는 달리 공손해진 어투로 물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 지혜로우신 황제 폐하께서는 동생이신 막시밀리안 대공에게 무슨 임무를 맡기셨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영국 정부와 접선하여 차관을 받아오라고 하던데……. 저는 이런 일이 처음인지라 어떻게 하는지 잘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흠……. 차관이라……. 하긴 유럽대륙 전역이 혼란에 빠졌는데 영국 말고 어디서 돈을 빌리겠습니까?”
하지만 메테르니히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막시밀리안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몸만 덜렁 와서 돈을 빌려달라 하면 저 섬나라 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어주는 이들은 아니지요.”
“그럼 뭐가 더 필요하단 겁니까?”
“담보가 필요하지요. 예를 들어 영토를 조차해 준다든지 자원을 넘겨준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메테르니히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반질거리는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품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들었다.
“아, 형님께서 영국 정부와 독대하기 전에 이걸 꺼내어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그게 뭡니까?”
“프랑크푸르트인지 뭔지 하는 독일 촌구석에서 형님을 독일지역의 황제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더군요.”
메테르니히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막시밀리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잘 알았지만 그걸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리한 것이었다.
“쉬, 쉿!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리도 탁 트인 곳에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읍, 읍……!”
“일단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메테르니히는 연신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혹시라도 따라오는 녀석이 있거든…….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그리고 우리 대화를 엿듣는 녀석 역시 마찬가지일세.”
그러고는 막시밀리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도 입을 조심하시지요. 이곳은 빈이 아니라 런던입니다. 주변에 있는 이들도 전하의 충성스러운 인민들이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을 섬기는 이들이지요.”
그의 말에 막시밀리안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풀어준 메테르니히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두어 번 둘러보았다.
“푸하…….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일단 웰링턴을 만나볼 걸세.”
“워털루의 영웅 웰링턴이요?!”
“그래, 그 친구 말이야……. 정계와도 끈을 가지고 있고 말도 잘 통하는 데다가 입도 무거운 편이니 큰 도움이 될 걸세……. 아마도 말이지.”
메테르니히의 늙은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펌프질하며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