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33화
도망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접촉했다는 소식은 이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에까지 전해졌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접촉을 했다고?”
“예, 폐하.”
당연하게도 평소에 유럽 내 영향력확대를 고민하던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는 두 독일국가의 접촉에 관심을 보였다.
“오스트리아가 내부의 혼란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벌써 독일 내 패권을 걱정하며 프로이센을 길들이려는 건가?”
“아직 혼란에 빠져 있는 프로이센을 돕고자 사람을 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기엔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닌가? 얼마 전에 들어온 첩보로는 대규모의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 왕국 국경으로 몰려들었다던데?”
니콜라이의 말에 그의 궁정 신하들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오스트리아가 바이에른과의 국경에 군대를 배치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그, 그렇다면 그것은 당장에라도 전쟁을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래서 왜 바이에른에 군대를 배치하고 프로이센에 사람을 보냈느냐는 말이지.”
니콜라이를 비롯한 여러 궁정 신하들은 머리를 한데 모아 고민해 봤지만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폐하, 아무래도 우리 측에서도 베를린에 있는 외교관을 보내 오스트리아의 사자와 접촉을 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오스트리아의 애송이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보려?”
“예, 폐하.”
잠시 고민하던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게.”
* * *
“원래 국경에는 군대를 배치하면 안 된다고?”
“예, 그건 당연한 겁니다. 폐하!”
“그럼 20만밖에 안 되는 군대를 어디에 두나?”
“이제 헝가리의 위협도 가라앉았으니 20만 명이나 되는 군대는 해산하셔야지요!”
“해산?”
공작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원래 군대는 국경에 배치해야 하고 평시에도 50만 정도는 유지해야 하는 것이 기본 아닌가?
국경을 비워두고 군대도 소규모로 유지하다가 전쟁 나면 어떻게 하려고?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러니까 나라가 망하는 거지 쯧쯧…….’
[……자네의 상식이 망가진 게 아니고?]
‘저는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천지에 국경에 수십만이나 되는 군대를 배치해 두는 국가가 어디 있다던가!]
‘대한민국이요. 그리고 국경선이 아니라 휴전선이라고 해주십시오. 영감님.’
[으그극……. 그건 자네의 조국이 전쟁에 미친 나라여서 그런 것이고! 원래 국경은 비워두거나 국경수비대를 배치하는 게 정석일세!]
‘예? 그러다가 전쟁 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내 말에 영감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시며 말씀하시길.
[전쟁이 날 것 같으면 그때 동원령을 내려도 늦지 않네, 그리고 군대는 진즉에 해산했어야지!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데……!]
‘쓰읍……. 유럽은 이런 모양이로군요…….’
[우리는 그걸 외교적 관례라고 부른다네!]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아니, 배웠다기보다는 강제로 주입받은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렇군……. 평시에는 군대를 소규모로 보유하다가 유사시에 예비군을 동원해서 대규모 병력을 꾸리는 것이로군.”
“예비군……? 아, 혹시 민병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현재 제국 내의 민병대는 전부 정규군으로 편입…….”
“예비군도 없다고?!”
아무래도 대대적인 군제개혁이 필요해 보였다.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은 외교적인 관례라는 이상한 규율 때문에 안 된다고 해도 상시 수십만 대군을 유지하며 유사시에는 수백만을 동원 가능한 체제로 바꿔야 했다.
[왜 그러는 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나.]
‘아니, 주변에 이렇게 적이 많은데 국경을 그냥 비워두고 살 수는 없잖습니까!’
[허허허허허…….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맞아!]
영감님은 결국 나를 설득하길 포기하셨다.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연신 웃기만 하시더니 이내 웃음소리도 없어지셨다.
“후우……. 아무튼 바이에른 왕국에서 갑자기 항의서한을 보내와서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다음부터는 일을 벌이시기 전에 저를 찾아주십시오. 폐하,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미, 미안하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폐하께 뭔가를 보내긴 했는데……. 우선은 조피 대공비 전하의 일이 급하니 폐하께서 그분께 잘 말씀드릴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은 안 그래도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진 채로 내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머니께서 문을 부술 기세로 열어젖히시더니 안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폐하, 시간 좀 내어주시지요.”
“아.”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 어머니, 그러니까 조피 대공비는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출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영감님, 영감님!’
[쯧쯧쯧……. 전부 자네 업보일세, 알아서 하게.]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에 이어서 영감님마저 나를 버렸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평소의 자애로운 어머님이 아니라 어렸을 적 영감님을 매섭게 몰아붙이던 어머니가 서 있으셨다.
“어, 어머니…….”
“응접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어머니가 옆방으로 가버리시자 나는 다급히 비서에게로 뛰어가 그의 귀를 붙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당장 나갈 채비를 하게…….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간단한 사복 차림하고 호위병력 몇만 챙겨서 따라와!”
* * *
괴르게이 어르투르.
지난 헝가리 혁명 당시에 군에 복무하면서 전우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벌벌 떨게 만든 장군이다.
하지만 헝가리가 제국에 잔류를 결정한 이상 그가 군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괴르게이는 차라리 우리끼리라도 힘을 합쳐서 자유를 쟁취하자는 전우들의 쿠데타 제의도 거절하고 그대로 군대를 전역했다.
그리고 원래 했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조금 쉬엄쉬엄하게나 괴르게이군.”
“그럴까요? 교수님?”
“허허, 헝가리인들이 모두 자네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 내 아들놈도 전쟁에서 죽을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야…….”
제법 중후한 인상의 교수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아들의 그림을 힐끔 돌아보더니 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런……. 또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군. 조금 전의 일은 그냥 흘려듣게나 본심은 아니었다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먼……. 그럼 괴르게이 군, 나는 지금부터 교류회에 참석해야 하니 자네는 적당히 하고 오늘 연구자료를 정리해서 내 책상에 올려놓은 다음 들어가게.”
“예, 교수님.”
군대를 전역한 괴르게이는 부인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건너와 빈 대학교의 어느 화학 교수의 조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악명 높은 괴르게이 어르투르라는 이름과 헝가리인이라는 것 때문에 교수 측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그의 연구성과나 이전의 저작 활동을 보고는 동명이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같은 사람인데 말이지…….’
세상에 어느 누가 전쟁터를 휘어잡던 장군이 돈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너무 이름을 떨친 탓에 이런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웃기는 일이지.’
노교수가 하나뿐인 아들이 전쟁 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뜨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그게 자기 일이었으니 말이다.
헝가리의 인민들을 위해, 머저르인들의 자유를 위해 말이다.
“후우…….”
하지만 왜 이리도 마음이 무거운지는 알 수 없었다.
괴르게이는 고개를 돌려 교수의 책상을 돌아봤다.
정확히는 그 위에 있는 아들의 초상화를 돌아봤다.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림 속의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상징하는 흰색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초상화 속에서 근엄하게 자세를 잡은 젊은이를 보고 있으니 슬퍼하던 노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쯧…….”
노교수는 빈에서의 생활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자신이 정착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따금 헝가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 목소리를 높여 그들을 꾸짖으셨다.
“제국에 사는 이들은 모두 제국인이다…….”
괜히 머리만 복잡해진 괴르게이는 대충 할 일을 끝내놓고는 외투를 챙겨 거리로 나왔다.
저녁 시간인지라 거리에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차와 한 끼 식사를 해결하려는 이들로 붐볐다.
괴르게이 역시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을 떠올리고는 기념품 상점에서 부인에게 선물할 물건을 고르고 있을 때, 가게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이 목걸이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황제 폐하의 어머니 되시는 조피 대공비께서 총애하시는 보석세공사의 제자가 한 땀 한 땀 공을 들여 만든 것이지요.”
“그렇군…….”
황제라는 말에 괴르게이는 한숨을 내쉬며 만지작거리던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아, 혹시 가격이 걱정이시다면 제가 직원 할인가를 적용해서 특별히 싸게…….”
“아뇨. 이것 말고 저기 있는 반지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부인의 손에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아이고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이 반지로 말씀드리자면 잘츠부르크의…….”
괴르게이는 가게 점원의 지루한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던 괴르게이는 구석에서 반짝이던 푸른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가리켰다.
“저건 얼마인가?”
“아……. 저건 좀…….”
그러자 가게 점원은 살짝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괴르게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 손님이 부담하시기엔 조금 비싼 물건인데……. 다른 것을 둘러보시는 게…….”
“얼마냐고 물었네.”
금액을 들은 괴르게이는 자신의 백지수표를 내밀고는 가게를 나섰다.
“버르장머리없는 녀석 같으니.”
예상치 못한 지출이었지만 그동안 마음고생만 했던 부인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괜찮은 투자라고 생각하며 브로치를 꺼내 봤다.
햇빛을 머금으며 반짝이는 브로치를 보고 있으니 어렸을 적에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바다가 떠올랐다.
부모님을 졸라서 바다를 가보자고 했지만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다음 휴가는 바다가 좋겠어.”
그렇게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고 있으니 뒷골목에서 낡은 군복을 입고 그를 쳐다보던 몇몇 이들이 어느샌가 그를 둘러쌌다.
“어이 형씨.”
“주머니가 제법 무거운 것 같은데……. 우리처럼 불쌍한 이들에게 몇 푼 적선해 주지 않겠나?”
“…….”
괴르게이는 그들이 불량배임을 단박에 알아채고는 한숨을 내쉬며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어 그들에게 건네고는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뒤편에서 들려오는 불량배들의 말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고마워 형씨.”
“요새 헝가리 놈들이 쳐들어온 뒤로 벌이가 영 시원치가 않았거든.”
“결국, 자기들끼리 싸울 거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니까? 멍청하긴…….”
“머저리 같은 마자르 놈들 큭큭…….”
“제깟 놈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았나 보지?”
“평생 땅이나 쳐다보고 노예처럼 살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폐하께서는 너무 자비로우셔서 탈이야.”
그 말을 들은 괴르게이는 그대로 돌아서며 살벌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
“왜 그러십니까?”
“머저리 같은 녀석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서 그러는 건가?”
괴르게이의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 서로를 멀끔히 쳐다보다가 그중에 한 명이 조심스레 괴르게이에 물었다.
“응? 뭐야 형씨도 머저리인지 마자르인지 하는 족속인가?”
“그래, 이 멍청한 무뢰배들아.”
괴르게이의 말에 청년들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서 받은 지폐를 땅에 내팽개쳤다.
“마자르 새끼가 주는 돈은 우리도 싫어!”
“위르겐 그 녀석이 어떻게 죽었는데…….”
“헝가리 새끼들은 모두 쳐 죽여야지!”
“흥, 전쟁 중에는 꽁지 빠지게 도망이나 다녔던 놈들이 전쟁이 끝나니 숫자만 믿고 으스대는군.”
“뭐?! 말 다 했어!”
괴르게이는 청년들이 입고 있는 낡은 군복에 달린 훈장을 알아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금성훈장? 그런 걸 받은 녀석이 이런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썩어가는 것을 보아하니 네놈들의 황제라는 인물도 어떤 인물인지 알 만하군.”
“뭐?”
“너 말 다 했냐?”
괴르게이가 황제까지 언급하자 청년들은 조금 전보다 더욱 화를 내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이 몰려드는 모습에 괴르게이도 아차 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그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황제를 모욕하는 헝가리인을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감히 폐하를 모욕해!”
그렇게 이름 모를 골목에서 청년들의 집단린치가 벌어지려 할 때, 누군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비켜! 난 당장 이 헝가리 놈을…….”
흥분한 청년이 중간에 끼어든 이를 밀치려 들자 흉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끼어들어 청년을 단숨에 바닥에 집어 던지며 그를 제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니 한스 경…….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폐, 폐하!”
“황제 폐하!”
시민들은 갑자기 등장한 황제의 모습에 재빨리 바닥에 꿇어앉으며 그에게 예를 표했다.
“아……. 이러려던 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