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35화
워커홀릭?
“폐하께서는 안에 계신가?”
“오전에 야외시찰을 떠나셨습니다.”
“그래? 그럼 언제쯤 돌아온다던가.”
“못해도 저녁쯤에는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알겠네,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지체 말고 내게 알려주게.”
“예, 대공비 전하.”
조피 대공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황제의 전속비서인 헨리는 조심스레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폐하, 대공비 전하께서 왔다 가셨습니다.”
“…….”
“폐하, 이젠 가셨습니다.”
그러자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후우……. 어머니께서도 끈질기시단 말이지……. 자네는 그만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좀 도와주겠나?”
“예, 폐하.”
헨리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곳저곳 어지럽게 널려 있는 온갖 종류의 서적들과 수북이 쌓여 있는 종이 더미가 보였다.
“폐하, 또 밤을 지새우신 겁니까?”
“허허허……. 자네는 나를 뭐로 보는 건가? 당연히 쉬엄쉬엄 눈도 붙여가며 일한다네.”
“외람되오나 소인은 폐하께서 집무실을 나서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헨리의 질문에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구석에 있는 이불과 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잤네.”
“?!?!?!”
황제가 본인의 방이나 하다못해 침대도 아니고 그냥 바닥에서 잤다니 이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것이었다.
황제 폐하는 유독 일에 빠져드시면 주변에 관심이 없고 끼니도 간단하게 해결하시며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고는 했다.
성실한 것은 칭찬할 만했지만 이렇게 되면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헨리는 이를 바로잡고자 황제에게 충언을 올렸다.
“그동안 폐하께서는 너무 업무에만 몰두하시며 건강을 해치고 계십니다.”
“난 괜찮은데.”
“원래 건강할 때는 문제를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지금이라도 건강을 관리하셔야 제국을 오래 통치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냐 난 정말 괜찮다니까.”
“그리고 폐하, 어찌 방을 놔두시고 이런 불편한 곳에서 주무신단 말입니까?”
* * *
헨리의 말에 나는 방을 한번 둘러봤다.
내가 원래 살던 원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화려하며 온갖 비싼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는 곳이었다.
예를 들어 저기 있는 대충 50년 된 소파는 잘츠부르크의 장인이 수십 년 된 질 좋은 목재를 골라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트란실바니아의 양치기가 기르던 양털로 만든 푹신한 시트가 달린 명품이었다.
그뿐인가? 여기 있는 책장 역시 영감님의 고조모이신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께서 애용하시던 물건으로 족히 백 년은 된 물건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호텔 스위트룸이라고 해도 부족할 것이 없잖은가!
“불편…… 한가?”
“폐하…….”
“자네가 뭐라 하건 나는 이곳이 편하다네, 그리고 방이 너무 멀어서 왔다 갔다 하기에 귀찮기도 하고 말이야.”
내 말에 헨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폐하의 방을 집무실 인근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쉬는 것만큼은 방에서 쉬어주셨으면 합니다.”
“노력해 보지.”
“그럼…….”
헨리는 그리 말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감님이 나타나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헨리의 말대로일세, 일도 좋지만, 너무 일만 하다가는 몸을 망치기에 십상일세.]
‘흠……. 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무엇이 말인가?]
‘저는 쉬엄쉬엄 일하고 있는 건데, 왜 다른 사람들은 일 좀 그만하라고 하는 겁니까?’
정말이다.
나는 정말 쉬엄쉬엄 일하는 것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서류 같은 것도 대충 쓱 훑어보고 서명만 해주면 끝나는 것을 괜히 하나하나 뜯어보며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며 시간이나 때웠다.
그뿐인가?
일하다가 조금 피곤하면 구석에 있는 매트리스에 누워서 눈을 좀 붙이면 그만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일들은 심력을 덜 소모했고 그렇기에 지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뭐 이리도 일을 열심히 하냐면서 그러다가 몸이 상한다며 내게 훈계를 늘어놓기에 십상이었다.
[……그게 쉬엄쉬엄하는 거란 말인가?]
‘예.’
[요 며칠간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잤는데……?]
‘원래 세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잘 없습니다.’
[식사도 대충하는 것 같던데…….]
‘배가 꽉 차 있으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요.’
영감님은 경악하셨다.
[그건 사람의 삶이 아니잖나! 저기 들판을 기어 다니는 짐승 새끼도 자네보다는 여유롭게 산다네!]
‘허허, 원하는 시간에 잘 수 있고 식사시간만 되면 시종들이 먹을 것을 가져오는데 이 정도면 호의호식하는 것 아닙니까?’
[미치겠군.]
영감님이나 다른 이들이 왜 이렇게 잔소리를 해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잔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시간은 없었기에 영감님이 뭐라고 떠드시건 간에 무시하며 서류에 집중했다.
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서 어떻게든 예산을 더 지급해 달라고 구걸하는 공식문서를 사이에서 편지 한 장이 툭 하니 튀어나왔다.
“이게 뭐지?”
[헨리자 지난주쯤에 준 편지가 아닌가?]
“그랬나요? 전 왜 기억에 없죠?”
[자네가 나중에 읽어본다면서 대충 책상 한쪽에 던져놓고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가지 않았나.]
“아……. 그랬었지! 잠깐……. 그러고 보니 괴르게이는 황궁을 찾아온다면서 왜 안 오는 걸까요?”
[난들 알겠나? 정 궁금하면 한스나 헨리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
그건 또 귀찮았다.
괜히 불렀다가 또 무슨 말을 들을 줄 알고?
잔소리는 영감님만으로 충분했다.
“흠……. 프랑크푸르트 의회?”
그런 곳에도 의회가 있었던가?
의아함에 편지 칼로 겉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꺼내 드니 그 안에는 더 환장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통일 독일의 황제……?”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과 게르만족의 수호자인 내게 게르만족의 염원인 통일 독일의 명예로운 제관을 받치겠다고 했다.
“자기들이 뭐라고?”
고작해야 혁명 분위기에 올라탄 지식인들 몇 명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의회를 자처하고 이제는 통일 독일을 부르짖으며 내게 제관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내가 그걸 받는다고 쳐도 독일지역의 무수한 소국 중에 어느 누가 이걸 따를까?
아무리 오스트리아가 독일 지방의 일인자라고는 하지만 당장 이인자인 프로이센이 반발할 것이었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외가인 바이에른 왕국에서도 크게 들고일어날 것이었다.
거기에 자유주의자라면 도시락 싸 들고 조지러 다니는 러시아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난리를 피워댈 것이 분명했다.
“이크, 손이 미끄러졌군요.”
그래서 자연스레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이로써 나는 편지를 받은 적이 없는 것이었다.
영감님 또한 내 의견에 동의하시는 것인지 또 잔소리를 해오셨다.
[쯧쯧쯧……. 그렇기에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챙겼어야지.]
‘손에 힘이 없는 것과 그게 무슨 상관인지요……?’
[어허, 자네는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는 건가? 그럼 본인이 설명해 주지…….]
‘아악!’
벽난로 속에 들어간 편지지가 다 타올라서 잿더미가 될 때까지 영감님의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 * *
한편 프로이센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부올 백작은 갑작스러운 러시아 외교관과의 독대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슬라브 녀석들이 고압적이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몇 번이나 겪어봤지만, 도무지 적응되질 않는군…….’
속으로는 온갖 험담을 해댔지만, 겉으로는 어렸을 적에 헤어졌던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기쁘게 맞이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이반 경!”
“하하하, 소리 소문도 없이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이런 곳에서 자네를 다시 만날 줄이야!”
둘은 오랜 형제가 재회한 것처럼 악수하고는 자연스레 주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술과 담배를 즐겼다.
“정말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독일지역의 패권보다는 제국 내의 안정을 추구한다고.?”
“그런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지난 헝가리 놈들의 반란 당시에 적잖은 전력을 소모해야 했던지라……. 아차차! 이건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이……. 내가 어디 가서 그런 걸 말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렇게 보였으나 부올 백작은 웃으며 이를 부정했다.
“아무렴요~”
“하하하, 역시 자네밖에 없어~”
서로 웃으며 술잔을 높이 들었으나 속으로는 서로의 빈틈을 찾느라고 정신없었다.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프로이센에 사람을 보냈으면서 안정을 추구한다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부올 백작 역시 이반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쓰읍……. 이런 결론 안 속는다는 거지…….’
그 뒤로 둘은 서로 간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훈훈하게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속으로는 서로 감추고 있는 정보를 빼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 즉위하신 오스트리아의 황제 폐하께서는 어떤 인물인지 말해주지 않았군.”
“아, 그렇습니까?”
“우리 폐하께서도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시던데……. 나중에 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하시더군.”
부올 백작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상대의 생각을 파악하려 했다.
‘니콜라이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한다는 건가? 그건 아니겠지……. 설마 황제나 되는 사람이 타국을 방문하지는 않을 테니……. 그럼 황태자나 가까운 인척을 보내겠다는 말이로군.’
대충 의도를 파악한 부올 백작은 이내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희야 언제나 환영이지요!”
“하하하! 자네가 그리 반겨주니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군.”
“아유…….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우리 폐하께서도 러시아의 차르께서 방문하시는 것을 크게 환대하실 겁니다.”
“그래?”
부올 백작의 말에 이반의 두 눈이 묘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렴요? 유럽 전역이 혼란에 빠졌을 때도 러시아만큼은 자국 내의 소요사태를 빠르고 적절하게 잘 매듭짓지 않았습니까?”
“뭐……. 그렇지.”
부올 백작은 그들이 폴란드인의 봉기를 어떻게 진압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이들은 물론 그들과 연관되었거나 연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까지 깡그리 처리하는 그들의 잔혹한 수법은 외교관으로 일하며 온갖 험한 꼴을 봐온 그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가증스러운 야만인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인들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감정이고 지금은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이 런던을 방문했다던데……. 뭐 알고 있는 것 없나?”
“예?! 아, 그것이…….”
부올 백작은 이반의 말에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는 ‘척’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척했다.
그러자 이반은 급소를 제대로 찔렀다고 판단하고는 조금 심각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허……. 이보게 부올,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을 줄 몰랐는데 말이야.”
“아, 아하하하……. 그것은 제 소관이 아닌지라……. 말씀드릴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이 사람아! 나도 우리 폐하께 뭐 보고할 것은 있어야지 않겠는가? 그러지 말고 조금만 풀어보게.”
“으음……. 쓰읍…….”
부올 백작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이반 경은 짐짓 화난 어조로 그를 압박했다.
“이보게, 지난번 페테르부르크에서 자네가 폐하의 정부를 건드렸을 때, 그걸 수습해 준 게 누구인지 잊어버린 건가?”
“아, 압니다. 그건 언제나 감사하고 있지요.”
부올은 이반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건 우리 쪽 정보원이랑 접촉한 거다 멍청이야!’
그런 부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반 경은 그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그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니 영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얹을 정도는 해줬으면 좋겠어.”
“끄응……. 그럼 어디서 제게 들었다고 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만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하지.”
이반은 순순히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부올 백작의 모습을 비웃었다.
‘쯧쯧 멍청하긴……. 한번 약점을 잡히면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그렇게 막시밀리안이 영국으로 파견된 일을 전해 듣던 이반은 이내 얼굴을 굳히며 그에게 되물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자네 말은……. 지금 오스트리아에서 영국에 대규모 차관을 들여오려 사람을 보냈다는 것인가?”
“후우……. 숨겨서 뭐하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아니, 반란은 잘 진압했다면서?!”
“진압이야 순조롭게 했습니다만……. 그사이에 제국의 빈약한 경제가 휘청거리는 탓에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으음…….”
부올의 말을 들은 이반은 얼굴에서 심각함을 지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인지 화장실이 급해졌다네, 자네는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게.”
“예, 느긋하게 다녀오시지요. 저는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있겠습니다.”
부올은 테이블 위에 마련된 성냥을 착 그어 담뱃불을 붙이고는 황급히 밖으로 나가는 이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를 비웃었다.
“그래, 빨리 가서 네 주인께 보고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