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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36화 (36/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36화

영감님의 수염은 유럽제일

전쟁이 끝난 이후 빈에 정착한 괴르게이는 그날도 평소처럼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연구실로 출근하려는 중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러리다. 오늘도 날 기다린다고 괜히 늦게까지 깨어 있지 마시고 일찍 주무시구려.”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다녀오리다.”

마지막으로 부인의 뺨에 가볍게 입술 자국을 남겨둔 괴르게이는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진 부인을 뒤로하며 거리로 나왔다.

“괴르게이 어르투르 본인 됩니까?”

그러자 화려하게 치장된 왕실 마차가 그의 집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소만……. 혹시 황제 폐하께서 보낸 것입니까?”

“예,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말한 마부는 가운데 박힌 보석이 살짝 깨져 있는 브로치를 그에게 건네줬다.

“어디 갔나 했더니…….”

“타시지요. 황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쓰읍……. 내일 교수님께 한 소리 듣겠군.”

괴르게이는 그리 말하며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마차는 조용히 출발하더니 이윽고 황궁에 도착했고 괴르게이는 그곳에서 그토록 피해 다녔던 황제와 마주했다.

* * *

“폐하, 괴르게이 어르투르가 뵙기를 청합니다.”

비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이전에 들었던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이쪽으로 오시지요.”

문이 열리고 집무실에 들어서니 자그마한 아이의 키만큼이나 쌓여 있는 서류와 책자들 사이로 눈 밑이 거뭇거뭇한 황제가 보였다.

황제는 손님이 왔음에도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보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는 내게 물었다.

“얼굴 한 번 보기 어렵군.”

“굳이 봐야 하는 사이는 아니기도 합니다.”

내 말을 들은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하긴 우리가 서로 하하호호 할 사이는 아니지……. 그래, 커피와 차 중에 무엇이 좋은가?”

“술은 없습니까? 맨정신으로는 전하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술? 그것 좋지!”

서류에 서명을 마친 황제는 자신의 뒤편에 있는 찬장에서 술병과 잔을 두 개 꺼내며 내게 말했다.

“거기 있는 소파에 대충 앉게.”

손님이 찾아왔음에도 응접실이 아닌 집무실 한쪽 에인 소파를 안내해 주자 살짝 기분이 불쾌했다.

“……손님 대접이 조금 박하군요.”

하지만 황제는 태연하게 내게 되물었다.

“손님이었나?”

“이해했습니다.”

가만 앉아서 황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겉모습은 안 그래도 어리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자신보다 열 살 정도는 더 어려 보이는 것이 청년보다는 아직 소년이라는 느낌이 물씬 났다.

보는 이로 하여금 혹시 사고 치지 않을까 불안감을 일으키는 장난기 어린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한잔하지.”

“감사합니다.”

황제는 내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빈에는 무슨 일인가? 새로운 동지들을 끌어모으려고 그런 것이라면 그만두게.”

“혁명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혹시라도 나중에 생각이 바뀔 것 같으면 미리 말해주게, 그래야 미리 사람을 보내 자네를 체포할 수 있거든.”

“기억해두겠습니다.”

잔을 채우고 말없이 서로 한 잔 쭉 들이켰다.

“크으……. 이 맛이지.”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음? 내가 찾아오라고 했었잖나 그런데 자네가 찾아오지 않아서 사람을 보낸 것일 뿐이네.”

“……그렇군요.”

“그래, 대학에서 조교수로 일한다고.?”

황제는 굳이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풀어놓았다.

“너무 당당하게 말씀하시니 되려 당황스럽군요.”

“무엇이 말인가?”

“제 뒷조사를 한 것 말입니다.”

“하면 안 되나? 자네는 헝가리 반군의 수괴이자 반군 사령관이었잖나.”

“이제는 전부 관뒀습니다.”

내 말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자네가 짊어진 것은 고작 말 몇 마디로 훌쩍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알고 있습니다.”

“알면 되었네.”

이쯤 되니 황제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했지만, 황제는 이젠 관심 없다는 듯이 연신 술을 들이켜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물었다.

“전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자네가 궁금한 것이 있다니 별일이로군. 그래, 마음껏 물어보게.”

“폐하께서는 왜 저를 황궁으로 부르신 겁니까? 아니, 그전에 왜 저를 살려두고 계신 겁니까?”

“그건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그냥 약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부른 게 아니라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알 겁니다.”

내 말에 황제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뭐……. 별것 없네, 영감님을 골탕 먹였던 자네와 그저 술 한잔하고 싶었을 뿐이야.”

“영감님……? 그분은 누굽니까.”

“나.”

“?”

이후에는 별 쓸데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황제가 피곤하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왜 부른 것이지…….’

오늘 만남에서 이상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제일 이상했다.

차라리 자신을 불러 가족을 인질로 삼고 협박하며 숨어 있는 동지들의 위치를 불라던가 강제로 충성서약을 맺게 했다면 이것보다는 덜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저 술만 마시며 이야기를 조금 나누더니 나를 보내줬다.

이걸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괜히 머리가 아팠다.

거기의 마음이 쓰이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영감님……. 황제가 친근하게 부르는 것을 보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는 건데……. 그럼 나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기론 황제가 영감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없었다.

하다못해 자신의 가족들과도 데면데면하다는 황제가 영감님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라면…….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공작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비밀경찰……?’

이건 가능성이 컸다.

합스부르크의 비밀경찰은 이미 제국 내에서도 악명 높은 집단이었고 이들을 이끄는 것은 황제가 제일 아끼고 신뢰하는 신하일 터.

‘쯧……. 처음부터 감시가 붙어 있었군.’

그렇게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죽이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건가……. 허, 자비를 보인 셈이로군.’

* * *

술이 들어가 알딸딸한 상황에서 업무를 볼 수는 없었기에 소파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영감님이 나를 불렀다.

[왜 괴르게이를 그냥 보낸 건가? 아니 애초에 저자를 왜 황궁으로 부른 것이야!]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냥 영감님을 골탕 먹였다기에 어떤 사람인지 한 번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거죠.’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부른 건가?]

‘헤헤……. 사실 다른 사람들 눈치 안 보고 술도 좀 먹고 싶어서 부른 것도 있지요.’

[앓느니 죽어야지!]

* * *

그렇게 가볍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공작이 정례보고를 위해 날 찾아와서는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반란주모자를 처벌하자고?”

“예, 헝가리인들이 스스로 제국에 돌아오기를 희망하여 평화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번 사태의 주모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

나도 공작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들은 이미 내가 싫다고 반란을 일으켰던 이들이니 두 번이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다음에는 이번에 실패한 것을 교훈 삼아 철저히 준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 처벌 안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로 계획해 두었나? 설마 전부 죽인다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지금 헝가리의 여론이 둘로 갈려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우리 쪽에서 먼저 치고 나오면 저들의 반발을 살 수 있었다.

지금은 차라리 죽이는 것보다는 적절하게 국외추방이나 구금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었다.

“예, 전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

하지만 공작은 그들 모두에게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전부 죽여야 합니다. 이번에는 헝가리인이었지만 다음에는 누가 들고일어날지 모를 일이 아닙니까?”

“으음…….”

공작은 헝가리의 반란으로 제국 내 여러 소수민족들에 경고하려 하는 것이었다.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바랐던 자유의 결과다.

이런데도 들고일어날 것이냐?

뭐 이렇게 말이다.

“그래도 전부 죽이는 건 좀 그렇군.”

“그렇다면 괴르게이 어르투르, 코슈트 러요시, 이슈트반 세체니. 이 세 명의 인물을 처형하는 것에는 동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으음……. 그것도 좀…….”

다 끝난 일에 굳이 피를 더 봐야 하냐는 것이 내 입장이었다.

[무르군. 물러.]

‘영감님도 굳이 피를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좀 실망이로군요.’

[그렇다면 어찌할 건가?]

‘으음……. 이번에는 아무리 영감님이 죽이자고 하셔도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지금 저들을 죽여봤자 우리가 얻을 게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바닥에 떨어졌던 자네의 권위와 제국의 위신은 다시금 옛날의 명성을 되찾겠지.]

‘또 그러신다.’

영감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허깨비 같은 명성이나 권위에 집착하셨다.

[집착이라니? 지금 자네가 앉아 있는 자리는 자네가 잘나서 앉아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잊었는가? 지금 자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를 받치는 것이 황실의 권위와 명성일세.]

영감님은 평소에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툴툴거리면서도 내 편을 들어주던 것과는 다르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으음……. 그래도 전부 죽이는 것은 좀…….’

가뜩이나 나라에 써먹을 인재가 부족한데, 여기서 사람들을 더 죽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서명만 할 뿐이고 처리는 공작이 할 것이었지만 그런데도 영 기분이 꺼림칙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네가 죽네, 이것만 기억하게나. 지금 자네가 다른 이들 사정을 신경 써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던가?]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는 건데…….’

[그럼 전장에서 죽은 우리 병사들은 그들이 원해서 그리된 것인가? 지금 자네들이 사형을 망설이는 이들이 자네의 병사를 죽인 녀석들이네.]

‘그만하십시오. 이건 이미 끝난 일입니다.’

내가 강경하게 나가니 영감님도 한 수 굽히셨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지금 자네의 선택이 다음에 후회로 돌아올 수도 있다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되었네.]

영감님의 답을 듣고 나니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아니, 처형은 불가하네.”

“폐하, 그들은 반역자입니다. 혼란스러운 제국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들을 죽여야 합니다.”

“지금 제국의 기강이 흔들리는 것이 전부 그들의 탓이겠는가? 모두 선대의 잘못된 통치방식 때문에 삐걱거리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 나온 것일 뿐이야.”

“……그건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한 번 더 말해줄 수도 있네만.”

“폐하…….”

공작은 내가 무능한 선대를 깎아내리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게 물었다.

“그럼 폐하께서는 이 일을 어찌 처리했으면 좋으시겠습니까? 그냥 이대로 저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잖습니까.”

“나도 저들을 처벌하는 것에는 동의하네, 하지만 그것이 꼭 사형뿐인 것은 아니잖나.”

“그렇다는 말씀은……. 구금이나 국외추방 정도로 끝내라는 말씀 같군요.”

“흠…….”

공작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공작으로서는 놈들을 당장 총살해 버리고 시체를 들판에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럼 국외추방이나 구금은?

그것 역시 지은 죄에 비해서 뭔가 약하다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때, 영감님께서 조금 전에 ‘권위’와 ‘명예’를 언급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수염과 머리를 밀어버려?”

이 시대 남자들은 각자 수염을 길렀다.

일종의 유행 같은 건데, 다들 자신의 멋들어진 수염이야말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들의 수염과 머리를 싹 다 밀어버리고 자택에 가둬버리면……. 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폐하?”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상상해 봤지만,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영감님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것 좋군.]

‘영감님…….’

[저들이 우리의 자존심에 흠집을 냈으니, 우리도 저들의 자존심에 흠집을 내야지 않겠나? 오히려 죽이는 것보다 이쪽이 마음에 드는군.]

‘에이……. 그런다고 그 친구들이 화를 내겠습니까? 오히려 살았다고 좋아할걸요.’

내 말에 영감님은 코웃음을 치며 말씀하시길.

[장담컨대 당사자들은 자신의 명예가 땅에 처박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주 극렬히 저항할 것이네.]

‘흠……. 그렇다면 기왕 하는 김에 충성서약까지 하게 만들까요?’

[털은 털대로 밀고? 푸핫! 그 녀석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 기대되는군.]

영감님은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나잇값 좀 하시지…….’

[지금 뭐라 했는가.]

‘영감님의 수염이야말로 유럽 제일이라고 했지요.’

[크흠……. 알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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