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38화
노인?
헝가리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고 있을 때, 대영제국을 자처하는 연합왕국의 수도 런던에서는 두 늙은이가 새파랗게 어린 소년 하나를 끼고 만남을 갖고 있었다.
“여기 계신 분이 황제의 동생 되시는 분이라고?”
“그렇다네, 생긴 것도 훤칠한 데다가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도 뛰어난 두뇌를 소유하신 분이지.”
“그렇군.”
오랜 친우를 대하듯이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두 노인과는 다르게 막시밀리안은 이들 사이에서 벌벌 떨며 둘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워, 워털루의 영웅 웨, 웰링턴 공작이라니!’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두 노인은 젊었을 적 유럽을 제패하려 했던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에 맞서 이베리아반도와 워털루에서 그를 굴복시킨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와 전후 유럽의 질서를 확립한 메테르니히였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인물들을 눈앞에서 보게 된 소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흥분했다.
반면에 두 노인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들을 우러러보는 소년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한량께서 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차나 마시자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말이야.”
“허허, 이 사람도 참……. 어디 내가 일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사람이던가?”
“그럼 아닌가?”
“크크크……. 이럴 때는 귀신같은 친구란 말이야……. 그런 번뜩이는 통찰력은 총리로 있을 때나 좀 써보지 그랬나?”
메테르니히의 말에 웰링턴 공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말로 내 신경을 긁을 생각이라면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
“나 원……. 나는 농담도 못 하는가?”
“독일인이 농담을? 그것참 재밌는 농담이로군.”
웰링턴 공작은 무엇이 그리도 재밌는지 크게 웃었고 메테르니히 또한 따라 웃었다.
갑작스럽게 웃는 둘의 모습에 막시밀리안은 눈동자를 굴리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려 했지만 이제 열일곱 먹은 그는 두 노인이 왜 웃는지 알지 못했다.
한참을 웃던 웰링턴 공작은 돌연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빼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총리와 전하 중에 누구인가?”
“둘 다 만나면 좋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일단은 러셀 경을 만나고 싶군.”
“흠……. 그 친구는 아일랜드의 일과 경제정책의 실패 때문에 평가가 썩 좋은 편은 아니네, 솔직히 말하자면 조만간에 총리직에서 밀려날 것 같단 말일세.”
“그러니 더더욱 만나보고 싶어지는군.”
메테르니히의 말에 웰링턴 공작은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시간을 내어보지……. 그런데 나도 이건 알아야겠네, 자네는 돌아가는 건가?”
“이제 죽을 때도 되었으니 내 썩어빠진 몸뚱이는 고향 땅에 묻혀야지 않겠는가?”
“흠…….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럼 내일 저녁쯤에 파머스트리트에서 보도록 하지.”
능글맞은 미소를 짓던 메테르니히는 파머스트리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자네가 매번 가는 곳 말인가? 난 영 별로던데…….”
“그럼 오지 말든가.”
“에잉……. 괴팍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 * *
그날 저녁.
오스트리아의 전 수상 메테르니히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파머스트리트의 어느 고급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웩……. 이걸 먹으라고 가져다준 겁니까?”
막시밀리안은 가게의 자랑인 비프웰링턴을 한입 베어 물었다가 채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대로 뱉었다.
영국인들 중에서도 제일가는 웰링턴 공작이 애용하는 식당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어린 막시밀리안이 감당하기엔 힘든 음식들뿐이었다.
“……자네는 그 쓰레기를 입안으로 넣은 건가? 참 비위도 좋군.”
“웩……. 생긴 건 멀쩡한데, 속은 영 아니네요…….”
“그냥 내버려 두고 감자요리에 소금이나 팍팍 쳐서 먹게나 그럼 조금 낫다네.”
생선 눈알을 생으로 으깨 먹는 듯한 기분에 막시밀리안은 연신 물과 음료를 들이켰지만 이미 한번 난도질당한 미각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왔군.”
“예? 뭐가 말입니까.”
“자네는 그냥 앉아 있게.”
조금 전까지 똥 씹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메테르니히는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를 띠며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했다.
“러셀 경! 오랜만이로군요.”
“메테르니히 후작!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메테르니히는 작달막한 노인의 앞에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그를 환영했다.
다만 막시밀리안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는데, 때마침 메테르니히가 그에게 노인을 소개해 줬다.
“전하, 이분이 바로 연합왕국의 총책임자이자 빅토리아 전하의 총신인 존 러셀 백작입니다. 그리고 각하, 이쪽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위 계승서열 1순위인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요제프 마리아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공입니다.”
“아,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예 뭐…….”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러셀의 모습에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메테르니히는 얼굴을 살짝 구기더니 그의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의전상으론 전하께서 영국 총리보다 우위에 있으니 인사를 받아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아, 그렇군.”
막시밀리안은 다시금 자리에 앉으면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하하하, 형님 되시는 분께서는 이번에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시며 위용을 뽐내시더니, 이번엔 동생 되시는 분께서 어린 나이에도 외교 석상에 얼굴을 비추시는 것을 보아하니 합스부르크 가문은 역시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감사…….”
러셀의 칭찬에 막시밀리안이 감사를 표하려 했으나 메테르니히가 자신의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리며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그를 자신의 뒤편으로 보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도 상당히 영특하다고 들었으니 귀국의 큰 복이라 할 수 있겠군요.”
“허허, 그렇지요.”
메테르니히와 러셀은 서로 두어 번 정도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레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막시밀리안이 당황하며 뭐라도 말하려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런던의 하늘은 참 맑더군요.”
“이상하군요. 조금 전까지는 하늘에 재를 뿌려놓은 것처럼 칙칙하기만 했는데…….”
“크흠…….”
메테르니히는 괜한 소리 말라는 듯이 헛기침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는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영국인들이 아시아의 물건에 관심을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시중에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도자기나 찻잔 세트 같은 것이 유행하더군요.”
“새로운 것을 접하는 건 재밌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듣기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에서는 인도의 물건이 돌아다닌다던데……. 러시아의 차르는 중국보다는 인도 쪽이 성미에 맞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아, 그러고 보니 프랑크푸르트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우리 폐하께 공식문서를 하나 보냈다더군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러시아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더군요.”
조금 전보다 살짝 굳어진 러셀의 표정을 읽은 메테르니히는 여유롭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속으로 숫자 셋을 셌다.
‘셋.’
러셀은 초조해하며 메테르니히의 눈치를 봤다.
마치 더 할 말이 있지 않냐는 듯한 그의 눈빛에도 그는 웃으며 차가 마실뿐이었다.
‘둘…….’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나.’
그러자 귀신같이 러셀이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메테르니히 경께서는 조만간에 빈으로 돌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자주 만나 뵙지도 못했는데……. 참으로 아쉽군요.”
“허허허, 이 늙은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이들이 뭐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군요.”
“유럽을 한 손에 쥐고 흔드시던 분을 그냥 늙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아무런 권한도 없는 보통 노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각하께도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사정을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메테르니히의 말에 러셀은 당황한 듯이 눈을 크게 뜨며 곧장 막시밀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렇다는 건…….”
러셀은 쉽사리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듯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역시 경을 당해낼 수는 없군요.”
“허허허, 이 늙은이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러시아가 무슨 이유로 그대들과 접촉하고 있는지 제대로 설명해 주시지요.”
“러, 러시아가요?!”
러셀의 말에 막시밀리안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지만, 메테르니히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편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냥 편지가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황제 폐하께서 친애하는 연합왕국의 지배자이신 빅토리아 전하께 보내시는 친서입니다.”
“친서……?”
러셀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지금 러시아 이야기를 하던 게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황제의 친서는 왜…….”
“지금 제국은 점점 서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러시아의 위협에 벌벌 떨고 있지요. 내전을 빨리 끝내기는 했으나 이 피해를 복구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럼 러시아가 인도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대러시아 전선의 최전선인 독일 지방이 해롱거리니 곰의 목줄이 느슨해져 조금 여유가 생긴 저들이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것이지요.”
“!!!”
영국과 러시아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에 유럽 내 패권을 손에 쥐고자 서로 끝없이 다퉜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메테르니히가 말한 포위망이 바로 이것이었다.
영국은 대대로 유럽대륙 내의 패권을 유지하고자 프로이센을 후원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오스트리아까지 후원하며 대러시아, 대프랑스 포위망을 튼튼하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유럽대륙을 휩쓴 혁명의 불길로 인해 포위망을 구성하던 국가들이 휘청거렸고 심지어 대프랑스 포위망의 주요국인 사르데냐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영국의 대프랑스, 대러시아 포위망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영국으로서는 러시아가 유럽 내 영향력을 뻗치기 전에 이를 막아서야 했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로군요.”
“좀 많이 필요합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지금 우리 사정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닌지라 얼마나 지원 가능한지는…….”
“1,500만 파운드.”
메테르니히는 과감하게 본래 계획했던 금액보다 몇 배는 높여 불렀고 러셀 경은 입을 떡 벌리고는 제대로 말도 못 했다.
“처, 천오백만 파운드?!”
“가능하겠지요?”
“가능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정도면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대들이 직접 전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무슨 말이신지요.”
메테르니히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번 쭉 들이켠 뒤에 다시금 내려놓으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모든 전권을 위임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필요시에 저희 측의 요구대로 러시아와 일전을 벌일 각오도 되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메테르니히는 말없이 좋을 대로 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천만 파운드를 10년에 걸쳐 지급하는 정도라면 의회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리하시지요.”
“후우…….”
러셀은 어느샌가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느긋하게 다녀오시지요.”
그렇게 러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막시밀리안이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물었다.
“형님께서는 300~400만 파운드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많이 부르신 겁니까?!”
“그렇게 해야 저들이 믿을 테니까.”
“예?”
“내전과 외국의 침입으로 나라가 한 번 뒤집혔다고 하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그야…….”
메테르니히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제국의 영광은 끝나버렸다고 생각하겠지, 경제는 파탄 나고 내부정치는 초토화되었을 것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지요.”
그가 제국을 떠나올 때만 하더라도 조금 휘청거리기는 했으나 제국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번 전쟁으로 형님은 제국의 구심점이 되어 사람들을 이끌었고 제국의 인민들 역시 느슨하긴 하지만 하나로 뭉쳐 어려움을 헤쳐나갔으니 말이다.
적어도 그가 보기엔 그러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3~400만 파운드를 제시하면 오히려 저쪽에서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이 녀석들이 뭔가를 숨기는 게 아닌가?”
“하지만 저흰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인데요?”
“정치라는 게 그렇습니다. 가는 것이 좋다 해서 오는 것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때로는 저들이 착각하고 있는 대로 어울려주며 이득을 챙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군요…….”
“으하암……. 이 늙은이는 조금 피곤하니 총리가 오면 깨워주십시오.”
“메테르니히 경?”
메테르니히는 그 말을 남기고는 정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