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39화
돌팔이?
런던에서 메테르니히와 막시밀리안이 생각보다 큰 성과를 보이고 있을 때쯤.
부올 백작은 다른 의미로 성과를 보이었다.
“기뻐하게! 러시아의 태양이신 차르께서 오스트리아인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자네들에게 대규모의 차관을 들여주기로 했다네!”
“그렇습니까? 마침 저희도 그걸 고민하고 있긴 했는데……. 그래서 구체적인 금액은 대강 어느 정도인지……?”
“놀라지 말게, 무려 300만 파운드일세!”
“300만이라…….”
저쪽에서도 나름대로 이쪽 사정을 고려하여 루블화가 아닌 영국의 파운드화로 주는 듯했는데, 생각보다 그 금액이 크지 않았다.
‘못해도 500만은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기에 그나마도 한 번에 지급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걸 한 번에 주는 것은 아니네……. 자네도 잘 알겠지만 우리 쪽의 사정도 그리 좋진 않아서…….”
“그럼 어떻게…….”
“일단 절반은 예정대로 지급하고……. 나머지 절반은 현물로 대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현물이라면 어떤 종류를 말씀하시는지요?”
“하하하, 당연히 우리 러시아에 넘쳐나는 여러 가지 자원들을 말하는 것이네.”
“…….”
부올 백작은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으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받게 되는 금액은 원래 제시한 것보다 적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아쉬운 쪽은 이쪽이었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관대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말이다.
“어째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 같군……?”
“아,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이 정도나 되는 차관을 내어줄 것이라 예상도 못 한지라……. 너무 감격하여 말도 제대로 안 나오지 뭡니까?”
“하하하,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이반은 웃으며 부올의 손을 마주 잡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말했다.
“이로써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한층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겠군!”
“하하하……. 그것참 다행입니다.”
부올은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돈 빌려주는 것 가지고 되게 쩨쩨하게 구네.’
* * *
오늘의 보고는 내 강권으로 한 달에 몇 번씩 강제로 쉬게 된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을 대신하여 바흐 남작이 보고를 대신에 하였다.
“한쪽은 초과달성이고 한쪽은 러시아 놈들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왔군.”
“폐하, 쌈짓돈이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제발 품위를 갖춰주십시오.”
“그럼 쌈짓돈을 쌈짓돈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 러시아 놈들이 고이 금고 안에 모셔두었던 꼬꼬마 금괴 친구들이라고 불러야 하나?”
“폐하…….”
남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일단……. 양쪽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습니다만……. 앞으로는 어찌 될지…….”
바흐 남작은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잘될 것이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셔야 제가 그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있잖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유지하면 된다네.”
“으음……. 아, 알겠습니다.”
남작은 뭐가 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헝가리 쪽의 일은 다 정리되었다고?”
“예, 일단 형을 집행하고 죄인들을 각자의 가택에 가둬두었습니다.”
“좋아. 헝가리 의회 쪽은 어떻던가?”
“그쪽은 그냥 정치적인 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일단은 폐하의 대관식 일정과 절차를 논의하는데 집중하는 것 같더군요.”
아주 좋았다.
뭐든 술술 풀리는 느낌이랄까?
내전도 이른 시일 내 끝내버렸고 폭삭 무너진 제국 경제도 이제 다시금 되살릴 기반을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아마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내 계획대로 제국은 빠르게 재건될 것이고 이후로는 국방에 힘쓰며 각지에서 발흥하려는 민족주의를 때려잡으며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며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네요.’
[괜히 자네에게 어려운 것을 맡긴 것 같아서 본인이 다 미안해지는군.]
‘조상님인지 원수인지 모를 분은 복권번호나 찍어줄 것이지……. 이상한 일을 벌이셔서는 원…….’
모르긴 몰라도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머리를 한 움큼 뜯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혼자 구시렁거리기 시작하니 바흐 남작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폐하, 그럼 저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또 다른 소식이 들려온다면 전해주게.”
“예, 폐하.”
그가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내 어머니 되시는 오스트리아의 여장부 조피 대공비께서 들어오셨다.
“오늘은 자리에 계시는군요.”
“으음…….”
“요 몇 주간 폐하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이 어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싫어진 모양이로군요.”
“죄, 죄송합…….”
“어허! 황제는 다른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나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잖습니까!”
“…….”
어머니께서는 그동안 보여줬던 자애로운 모습이 전부 가짜라는 듯이 나를 엄하게 몰아붙이셨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저를 피하시게 된 것이 바이에른과의 국경지대에서 벌어졌던 어떤 사건 때문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어머니, 그건 약간의 오해가…….”
“그래요? 그럼 그게 무슨 오해인지 한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설마 폐하께서 이 어미의 친정을 전부 불태우려 했던 것은 아니겠지요?”
“…….”
가만히 눈만 깜빡거리는데도 느껴지는 압박감에 말문이 막혀 제대로 말도 안 나왔다.
그러자 영감님이 당황하며 내게 묻길.
[자네 정말로 바이에른을 침공하려 했나?]
‘제가 미쳤습니까?!’
[그럼 아니라고 말하게!]
‘아니라고 하면……. 어머니께서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실 분은 아니잖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
어머니는 이미 화가 나신 상태였다.
여기서 내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다고 해도 어머니의 화를 풀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그걸 알면 내가 도망을 안 다녔지…….’
[쯧쯧쯧……. 그러게 왜 쓸데없이 국경에 군대를 배치해서는 오해를 부르는 건가?]
‘아니, 원래 그게 상식이라니까요?!’
[상식은 얼어 죽을…….]
영감님과 아옹다옹하고 있으니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조금 전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폐하, 어째서 대답이 없으신 겁니까?”
“잠깐만요 생각 중입니다.”
“지금 무슨 생각을…….”
“생각 중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일로 시간이 끌리니 골치가 아팠다.
“어머니, 이건 순전히 제 오해로 벌어진 일입니다. 저는 딱히 바이에른을 침공할 생각도 없고 그냥 군대를 어디 둘지 몰라서 국경에 배치해 둔 겁니다.”
“…….”
어머니께서는 잠시 아무 말도 없으셨다.
[으음……. 폭풍전야로군.]
이윽고 어머니께서는 한숨을 내쉬셨다.
“……거짓은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예, 제가 어머니께 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아휴……. 네가 이 어미에게 불만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 그러는 줄 알았단다.”
“제가 어머니께 왜 불만을 느끼겠습니까? 가끔 정치에 끼어드시는 게 귀찮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어머니를 싫어할 이유는 아니잖습니까.”
“…….”
어머니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셨다.
[자네는 너무 직설적인 화법이 문제일세.]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차라리 빙빙 돌려 말하게, 아니 말하기 전에 다섯 번 정도는 생각하는 게 어떤가?]
어머니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시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삐지셨군.]
‘그럼 당분간 안 찾아오지 않을까요?’
[대신 다음에 찾아올 때는 크나큰 재앙이 뒤따를지도 모를 일이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죠. 뭐.’
그리 생각하며 서류 더미를 뒤졌다.
서류 더미에서 튀어나온 것은 대충 제국 남부의 남슬라브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였다.
“이 새끼들은 또 왜 난리야.”
[남슬라브인이라면……. 세르비아로군.]
“세르비아요? 그건 또 어디래.”
[흠……. 간단히 설명하자면 자기네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욕심쟁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을 서슴지 않고 즐기는 자들이라고 말해두지.]
영감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격양된 어조로 말씀하셨다.
“혹시 세르비아 사람들하고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자네는 유럽의 모든 국가가 얽혀든 대전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세계대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네는 그걸 세계대전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로군. 뭐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격돌하였으니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로군.]
영감님은 아련한 얼굴로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내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 루돌프가 잘못된 선택으로 가버리고……. 그 뒤를 이은 조카 녀석이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놈들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지.]
사라예보 사건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영감님이 말하려는 것은…….
“아, 그럼 1차네요.”
[1차……?]
영감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아차.”
* * *
요한은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다.
매번 공사장의 인부 중에 제일 먼저 출근하여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고는 다른 현장을 돌아다니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일만 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요한의 모습을 보고는 미련하다며 놀렸으나 정작 당사자인 요한은 그런 사람들의 비웃음을 한 귀로 흘렸다.
‘알로이스를 위해서는 뭐든 해야 한다……!’
그는 다른 이들의 손가락질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요한은 죽은 아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자 늘그막에 본 어린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내였다.
“요한, 벌써 온 건가?”
“아, 감독관님.”
“자네가 부지런한 것은 좋지만 그러다가 골병들겠네! 이 사람아.”
당연한 말이지만 부지런한 인부를 싫어하는 감독관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요한이 일하는 곳의 감독관들은 매사에 열심히 작업에 임하는 요한에게 친절했고 종종 그의 아들에게 주라며 학용품이나 과자 같은 것을 구해다 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요한이 가진 기술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보게 요한, 그러고 보니 자네가 대장간에서 도제로 일했다고 했었던가?”
“그렇지요.”
“그럼 철도 좀 만질 줄 알겠네?”
“기본적인 것은 배웠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그럼 나 좀 도와주게, 지금 폐하께서 철도를 만들려고 하시는데 지금 철로에 쓰일 철이…….”
요한은 그렇게 감독관의 일을 돕다 보니 어느샌가 철도를 건설하는 인부에서 철로를 제작하는 철도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급료도 배로 올랐고 일의 강도도 조금 줄어들어 집에 일찍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정도였다.
요한은 자신의 이러한 행운이 황제가 길을 열어준 덕분이라 생각했다.
황제가 아니었다면 자신과 자기 아들은 빈의 어느 이름 모를 길거리에서 굶주림에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고 말이다.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하며 기운이 넘쳤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천연강장제 사시오!”
“강장제라…….”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요즘 몸이 좀 허했는데, 몇 개 쟁여둬도 되겠다는 생각에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병에 얼마요?”
생각보다 싼 가격에 요한은 여러 개를 사 한 병을 따서 그대로 들이켰다.
순식간에 역하고 구역질이 절로 나오는 맛이 느껴졌으나 이를 몸이 건강해지는 신호라고 생각한 요한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요한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거리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특별한 저녁을 준비해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아들과 마주하며 근엄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먹고살 수 있는 것도 전부 폐하의 은혜 덕분이란다. 나는 이미 늙어서 폐하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네가 이 아비의 은혜를 대신 갚아줬으면 좋겠구나.”
“네, 아빠!”
“그래……. 그럼 되었다.”
요한은 귀여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로 향하였다.
평소보다 몇 배는 지친 몸을 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