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48화
연회?
우리가 소금을 풀겠다고 나서면 유럽 내의 긴장 상태가 어느 정도 완화되리라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방국가들의 시선에서는 우리가 러시아의 개짓거리를 중간에서 적절하게 끊어주는 것이라 보일 것이었고, 러시아에서는 명목상이지만 동맹국인 우리가 서방과의 사이를 적절히 중재해 주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말이다.
“저 친구들은 왜 저러는 건가?”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서방과 러시아는 이전보다도 더 깊은 갈등의 골을 드러내며 대놓고 우리에게 편을 확실히 정하라는 뉘앙스로 나왔다.
“……아무래도 판단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네.”
어찌 되었건 동방과 서방의 대결을 막으면서 떡고물 좀 챙겨 먹고자 이런 일을 벌인 것인데……. 오히려 내가 일을 벌임으로써 저들의 갈등이 단순히 외교적 담론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것임을 확인시켜준 꼴이 돼버렸다.
“우리 정부에서는 모두가 힘든 시기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의 기회마저 앗아가는 그대들의 행위를 공식적으로 비판하며 이를 철회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요.”
“우리 프랑스의 통령이신 샤를 루이 나폴레옹 각하께서도 귀국의 사재기 행위의 우려를 보이시며 조속한 시일 내에 원만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을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대응책을 고심 중이십니다.”
“올 테면 와보시오. 우린 준비되었소.”
대놓고 전쟁하겠다고 을러대는 영국과 프랑스나 이에 지지 않고 할 테면 해보라는 러시아까지 그야말로 연회장의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세상일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닐세.]
‘기왕 싸울 거면 자기네들 땅에서 싸웠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면 우리도 끌려들어 갈 텐데 그걸 걱정할 때인가?]
‘그러니 차라리 그 전에 힘을 키워서 오스만 녀석들과 한판 붙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오스만?]
영감님은 당혹스러움에 뭐라 할 말도 잊으셨지 말까지 더듬으시며 내게 물었다.
[갑자기 오스만은 왜 그러는가?]
‘이 녀석들이 우리가 좀 약해졌다 싶으니까 자꾸 남슬라브인들을 건드리면서 우리 쪽 국경을 들쑤시잖아요. 이빨 빠지다 못해 골골거리는 환자 새끼들이…….’
지난번에 제국 내의 남슬라브인들이 여러 모임을 가지면서 불온한 움직임을 가진다기에 뒤를 파보니 오스만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제국의 오랜 숙적이긴 했지만 지금 와서는 그냥 이빨 빠진 호랑이로 아무것도 못 하는 호구 중의 호구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제국이 내전과 전염병으로 잠깐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다시금 남부영토에 얼쩡거리면서 혼란을 일으키니 짜증이 났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발칸 쪽으로 확장해서 남슬라브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의 입을 싹 다물게 만들고 오스만 녀석들의 발톱까지 전부 뽑아버려야겠습니다.’
[그것도 좋아 보이네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걸 가만히 두고 볼지 의문이군.]
‘어찌 되었건 저들로서는 우리가 러시아 편을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 아닙니까? 거기에 영국은 대규모 차관으로 우리 목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더욱 그럴 테고요.’
[하긴…….]
이렇듯 내가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도 서방국가들과 러시아는 여전히 험악한 기조를 유지하며 서로를 향한 비방을 멈추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지난 34년간 그대들이 우리 러시아에 무엇을 해주었소? 그 잘난 서방국가들은 우리를 멸시하고 차별하지 않았소이까!”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셔야지요. 우리가 그대들을 멸시하고 차별한 것은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그대들의 야만적인 풍습과 기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야, 야만적인 풍습과 기조?!”
특히 프랑스 공화국의 부통령으로써 나폴레옹 3세를 대신하여 이번 연회에 참석한 앙리 조르주 불레는 러시아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공격적인 어조를 써가며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러시아인들의 야만성이 유럽을 위협하는 현시점에서 프랑스는 영국의 중요한 파트너로서 유럽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설 것이오.”
“야, 야만성……!”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리면서 결투를 신청할 것처럼 보이는 러시아 측 대표의 얼굴을 본 공작이 중간에 끼어들어 그들을 말렸다.
“자자……. 다들 이렇게나 좋은 날에 왜들 이리도 흥분하신 겁니까? 일단 머리를 좀 식히고 우리 쪽에서 준비한 음식도 드시면서 기분을 푸시지요.”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뭐 프랑스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으나……. 그 성의를 생각하여 한번 들어보지요.”
“으그극…….”
나는 이를 부숴버릴 듯이 갈고 있는 러시아 측 대표의 모습을 보고는 자연스레 자리를 피해 구석진 자리로 도망쳐 버렸다.
“폐하?”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했던가?
내가 몸을 피한 구석진 자리에는 이미 다른 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선객이 있었군요.”
“하하하, 폐하께서도 저 꼴을 보기 싫어서 이리로 오신 모양이로군요.”
말쑥한 신사는 푸근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옆자리를 안내했다.
[으음……. 막시밀리안 요제프 공이로군.]
‘예? 그게 누군데요.’
[내 장인…….]
“아빠!”
영감님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라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며 이쪽 눈치를 보던 소녀는 어느샌가 신사의 품 안에 쏙 안겨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씨, 이런 자리에서는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히히히.”
“허허,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폐하……. 제 딸이 워낙에 자유분방하게 자란 탓에…….”
“그럴 수도 있지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니 괘념치 마시지요.”
그렇게 웃어넘겼는데, 정작 영감님은 무엇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하던 말도 멈추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계셨다.
‘영감님, 시씨는 또 누굽니까? 성이 시씨인가?’
오히려 무엇에 집중하려는 듯이 어린 소녀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닌가?
[엘리자베트……. 내가……. 내가…….]
‘영감님?’
[……그날 당신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당신이 그렇게 비명에 갈 줄 알았다면……. 족쇄를 채워서라도…….]
‘영감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영감님을 조금 큰 목소리로 불러세우니 그제야 영감님의 두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나를 돌아보셨다.
[아! 크흠……. 미안하군. 잠시 옛 생각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닐세……. 아무것도 아냐…….]
영감님은 그리 말하면서 다시금 소녀를 바라봤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공존하는 묘한 시선을 보고 있으니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 꼬마애가 영감님 부인이라도 됩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황후가 되지…….]
‘거참……. 열두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데요.’
[지금 자네 나이도 열아홉이잖나.]
‘그건 그렇네요.’
조혼이 만연한 유럽 왕실에서 열아홉이면 노총각의 반열에 들어서기 직전인 나이대였다.
반면에 열두 살의 소녀는? 몇 년 뒤면 유럽 왕실의 결혼 시장에 이름을 올릴 만한 나이였다.
‘다시 생각해도 좀 역겹……. 영감님?’
시씨인지 뭔지 하는 소녀에게 관심이 쏠려 있던 영감님은 이젠 아예 무릎을 꿇고 눈물까지 보이시며 소리죽여 오열하고 계셨다.
평소에는 든든한 벽처럼 느껴지시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시니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니, 거참……. 다 큰 양반이 왜…….’
[시씨…….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내가 멍청하고 못나서 그대를 아프고 슬프게 만들었소…….]
영감님은 무엇이 그리도 슬픈 것인지 눈물을 흘리시며 연신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물론 내 눈에만 보이는 상황이었던지라 갑자기 연회장의 분위기가 초상집으로 가라앉지는 않았…….
“내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가서 간악한 서방국가들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겠다!”
생각해 보니 원래 초상집 분위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옆에서 영감님이 바닥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고 계시니 신경이 쓰여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폐하?”
“음? 무슨 일인가?”
“하하하, 무엇이 그리도 신경 쓰여 그리 힐끔거리고 계신가 했더니 제 딸아이를 보고 계셨군요.”
“응?”
그러고 보니 영감님이 꿇어앉은 쪽 너머에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신사의 품속에 안긴 소녀를 닮은 여인이 있었다.
나는 영감님을 본다고 한 것인데, 어째 그 여인을 뚫어지라 쳐다본 모양이 돼버렸잖은가.
어이구 영감님…….
“아, 그게 아니고…….”
“하하하, 안 그래도 조피 대공비께서 폐하의 짝으로 제 딸아이를 점찍었다고 하시던데…….”
신사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자신의 딸을 불렀다.
“헬레네, 잠시 이리로 와보거라.”
신사의 부름에 헬레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블까지 와서는 조심스레 내 옆에 섰다.
갑자기 상견례 자리가 되어버린 상황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도망가는 것도 여러 사람에게 실례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헬레네, 이분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신 프란츠 요제프 폐하이시다 인사드리거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소녀는 바이에른의 공작이신 막시밀리안 요제프의 딸 헬레네 카롤리네 테레제라고 해요.”
“으음……. 반갑군요. 헬레네 양.”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으나 가까이서 보니 이제 열다섯이나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시대의 왕실에서는 조혼이 유행이라지만 이건 어려도 너무 어리잖은가.
“혹시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뇨……. 괜찮습니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어 조금 당혹스러워 그랬을 뿐입니다.”
“아, 아하하……. 그러시군요. 제가 너무 급작스럽게 만남을 주선하여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게 만든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왕족이라면 언젠가는 얼굴 한 번씩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린애랑 결혼해야 한다니 조금 꺼림칙했다.
그래서 대충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전부 마시고는 한창 시끄러워지는 러시아 측 대표단 쪽을 가리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쪽이 슬슬 시끄러워지는 모양이니,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물론이지요. 잠시라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만…….”
아직도 눈물을 보이시는 영감님을 뒤로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안 들으려면 결혼을 해야 했으나 이렇게 하는 것은 나도 사양이었다.
“씁……. 방법이 없나?”
하다못해 상대가 스무 살만 넘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이건 어려도 너무 어리잖은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돌연 헨리가 나를 찾아왔다.
“폐, 폐하!”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러시아 측 대표단이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에 대한 항의 표시로 단체로 연회장을 나갔습니다!”
“씁……. 다 큰 어른들이 뭐 하는 짓인지 원…….”
결혼문제도 골치 아팠는데, 그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들이 나를 반겨줬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말이다.
“거기에 프로이센 측 대표단은 대놓고 독일지역의 여러 소국대표단과 접선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이 새끼들이?”
남의 집 안마당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