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49화
사냥개?
프로이센 측의 대표로 이번 연회에 참석한 이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라는 시골 뜨내기 출신의 초짜 외교관이었다.
그가 이런 중요한 자리에 오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사정과 우연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현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총애를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혁명세력이 프로이센과 독일지역을 잠식했던 시기에 국왕을 추종하며 직접혁명을 진압하려 했을 정도로 강경한 왕당파였다.
심지어 국왕이 비밀리에 자신의 사람을 불러모으고 군대를 끌어모을 때도 가장 앞장서서 그의 계획을 보조하며 왕의 눈에 띄었고 결국에는 혁명을 뒤엎는 데 성공하였다.
그 공로와 워낙에 발이 넓었던 비스마르크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왕의 신임을 얻어 서른네 살의 나이로 독일연방 내 프로이센 대사직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얻게 되었다.
다른 국가들은 소싯적에 온갖 망나니짓을 일삼던 그런 개망나니를 외교관이라고 올리는 프로이센을 비웃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자신을 비웃는 이들의 말에도 딱히 반박하거나 화도 내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 충실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그래서 귀국이 우리 프로이센과 힘을 합친다면 독일연방 내에서 유의미한…….”
“흠흠……. 그대가 프로이센 측 대표인가?”
“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바짝 질려 있는 독일지역 외교관에게 손짓하며 돌려보내고는 프로이센의 대표에게 물었다.
“이렇게 좋은 날을 즐기지 않고 왜 다른 이들에게 귀찮게 엉겨 붙는가?”
“하하하, 엉겨 붙다니요? 저는 제 나름대로 폐하께서 주최하신 파티를 즐겁게 즐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그럼 나도 내 방식대로 파티를 좀 즐겨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프로이센 측 대표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그를 으슥한 구석으로 이끌었다.
“엇……. 폐하?”
“잠깐 대화 좀 나누지.”
프로이센 놈이 괜히 독일지역 대표단들에 허튼소리 하지 못하게 조금 구석진 곳으로 끌고 와서는 그에게 물었다.
“요즘 프로이센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전해 들었네.”
“불온한 움직임이라…….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엇인지 제게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대들이 작센과 하노버를 끌어들여 독일연방을 대체할 새로운 연방을 만들려 한다는 것을 내가 정말 모를 것으로 생각했나?”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니 프로이센의 외교관은 화들짝 놀라면서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내게 호소했다.
“폐하, 외람되오나 저희 프로이센 측에서는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연유로 저희에게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오해를 푸셨으면 좋겠군요.”
“그래?”
정말 억울함과 슬픔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그의 표정과 행동에 영감님이 잘못 알려준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음……. 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겠군.”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의심하시니 참으로 억울합니다.”
“그래, 내가 잠시 오해했군.”
하긴 지금 세상은 영감님이 경험했던 세상과는 조금 달라져 있으니 이런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괜히 이런 일로 불러서 미안하군……. 이름이?”
“아, 오토 폰 비스마르크라고 불러주십시오.”
“비스마르크……?”
아까 했던 말은 취소다.
영감님이 옳았다.
프로이센 녀석들은 오스트리아를 까꾸러트릴 음모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 *
황제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바뀌었다.
다른 이들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변화였지만 수많은 이들과 어울렸던 내가 보기에는 아주 큰 변화였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말을 믿으며 반신반의하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확신에 찬 얼굴이 아니던가.
자신은 그저 이름을 밝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로 프로이센의 계획까지 꿰뚫어 본 듯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어찌 자신을 알고 있겠는가? 아니, 만약에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 성격 나쁘고 극성 왕당파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 터.
그런데 그게 어째서 프로이센의 삼왕동맹까지 이어진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황제가 눈치챘으니 최대한 이쪽 정보를 숨기는 편이 좋겠어.’
다시금 얼굴에 긴장을 풀며 입가를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저를 알고 계실 줄이야……!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해도 되겠군요!”
“크흠……. 아니, 뭐……. 독일 쪽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잖나.”
“허허허, 그렇습니까? 이것 참 소문이라는 것은 숨기려 해도 숨겨질 수가 없는 법이라더니…….”
황제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프로이센 내부에 오스트리아 측의 정보망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는 뜻이었다.
‘으음……. 돌아가는 대로 방첩에 신경을 써야겠군.’
프로이센의 일개 외교관인 자신의 얼굴과 이름마저 황제가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프로이센 내부에 오스트리아와 내통하는 존재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프로이센의 모든 행보는 실시간으로 오스트리아 황제의 책상 위로 보고될 것이니, 한시바삐 이를 처리해야 했다.
그래야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라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통일된 독일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자네가 벌써 외교관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예? 하하하, 이야~ 저도 제가 이런 자리에 오게 될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프로이센 놈들이 벌써 우릴 배제한 통일을 위한 밑 작업을 준비하려는 건가?”
“예, 예예?!”
황제의 폭탄 발언에 너무 놀란 나머지 표정 관리에 실패해 버렸다.
“아무것도 아닐세, 파티 재밌게 즐기게나.”
황제는 그런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의 행동은 마치 이렇게 들렸다.
[네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다 알고 있다. 그러니 허튼짓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황제의 그런 행동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느껴졌던 계획들이 한낮 종이 쪼가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화, 황제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지?’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듯한 황제의 말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황제의 시선과 그 말투까지……. 황제는 이제껏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 * *
“씁……. 비스마르크라니.”
가뜩이나 영감님도 이상한데 귀찮은 인간이 툭 튀어나왔다.
이로써 프로이센이 우리 몰래 뒤에서 호박씨를 깐다는 것은 확실해졌는데……. 당장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의 분쟁 때문에 이걸 신경 쓸 만한 여력이 없다.
그렇다고 두 세력 간의 분쟁을 내버려 두고 프로이센에 집중하자니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만에 하나라도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도 끌려나갈 판국인데……. 아씨…….’
우리는 적당히 회색지대로 남고 싶었지만, 사방에서 우리에게 편을 정하라고 난리였다.
오늘의 연회도 내심 러시아와 서방세계 간의 갈등 해소를 위한 자리가 되었으면 했는데, 정작 두 세력 간의 갈등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 돼버렸다.
‘자존심 하나로는 유럽에서 제일이라는 녀석들이 붙었으니 전쟁은 피할 수 없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을 막으려던 내 행동이 전쟁을 부추긴 꼴이 되었으나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면 재빨리 대응해야 했다.
슬쩍 연회장을 둘러보니 공작은 연회장을 벗어나려는 러시아 측 대표를 붙들고 달래는 중이었고 브루크는 프랑스와 영국 측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이미 둘의 파탄 난 관계를 연회장에 보였으니 우리는 우리대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저 멀리 이탈리아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웃으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스트리아의 영원한 친구들이 여기 있었군!”
유럽 전역을 불태운 혁명의 불길 속에서 함께 들고일어나 공화국을 세우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외교적 고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이탈리아인들은 연회 내내 다른 이들의 눈치만 살피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적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아는 체를 해오니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중에 단 한 명만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나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완고해 보이는 인상과 그걸 뒷받침해 주는 당돌한 행동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려줬다.
“로마공화국의 대표 주세페 마치니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군.”
로마공화국이라는 나라도 있었던가?
머릿속을 뒤져보니 뭔가 기억이 나는 것 같긴 한데 확실하진 않았다.
“그런데 로마공화국은 무엇인가? 짐이 알기로는 로마는 교황령이 아니었던가?”
내 말에 자신을 주세페 마치니라고 소개한 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새로 만들어진 국가이니 모르실 만도 하지요.”
“그래, 연회는 즐거운가?”
“오스트리아의 황제께서 직접 주최하신 연회이니 즐거울 수밖에 없지요.”
“흠?”
그의 말투는 묘하게 공격적이었다.
금방이라도 내 뒤통수에 칼이라도 찌를 것처럼 말이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가?”
그러자 굉장히 할 말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지난 수백 년간 합스부르크 가문의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이어가려 하십니까?”
“가문의 오명?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지난 수백 년간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탈리아인들을 탄압하며 그 땅을 자신들의 것인 양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지.”
이제야 그가 왜 이리도 불만이 많은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자네는 사르데냐인들과 같은 과로군.”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압제자 무리와 저를 비교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자네가 이곳을 찾아온 것도 내게 그런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건가?”
“명분상으로는 프랑스의 침공 위협에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구하려는 것이지만……. 폐하께서 우릴 도와줄 리가 없으니 준엄한 꾸짖음이라도 해야 속이 편할 것 같더군요.”
“준엄한 꾸짖음이라……. 그래, 자네 속이 편해졌다니 다행이로군. 그럼 지금부터는 실무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하는데…….”
“실무적인 이야기 말입니까?”
마치니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내게 물었다.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조금 전에 폐하의 앞에서 폐하의 가문을 모욕했습니다.”
“나도 들었네.”
“그런데 실무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폐하께서 로마공화국을 도와주시려 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잘 알아들었군.”
“……?”
마침 이탈리아에서 사르데냐를 견제해 줄 만한 세력이 하나쯤은 필요하긴 했다.
양시칠리아를 이용하자니 애초에 그들은 내부적으로 단결되지도 않았고 그만한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도 사르데냐에 밀리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토스카나 대공국이나 교황령 정도였는데……. 둘 다 내가 이용하기엔 좀이 애매한 감이 있었는데 이런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그래, 지금 자네들은 프랑스의 침공을 막아서 국체를 존속시키고 싶다. 뭐 그런 건가?”
“……예, 그렇습니다만…….”
마치니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눈치까지 빠른 것이 이용하기 딱 맞았다.
“간단한 논리일세, 나는 사르데냐가 싫고 자네들도 사르데냐가 싫으니 우린 친구인 셈이지.”
“친구…… 말입니까?”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잠깐…….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단순히 프랑스를 막아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별도의 지원까지 해주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나를 깔보던 마치니는 이젠 혼란스러워진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까?”
“조금 전에 설명했잖나.”
나는 그런 마치니를 보며 웃으며 답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말이야.”
그리고 잘 쓰다가 사냥이 끝나면 버리기 좋은 적당히 유능한 사냥개이기도 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