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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53화 (53/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53화

D-day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공작이 내 상태를 살핀다는 핑계로 나를 찾아왔을 때야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렸다고?”

“예, 서방에서는 이를 러시아의 무력시위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우리 쪽에서는 이를 본격적인 침공으로 판단했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제국 측에서 이번에 동쪽국경지대로 파견할 병력을 수도에 묶어두고 해외무역을 위해 나가 있던 상선들을 급히 불러들이고 있더군요.”

“진심인 모양이로군.”

공작이 심각한 얼굴로 이리 말할 정도라면 러시아는 이미 전쟁을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들의 침공 루트는 어찌 될 것 같은가? 어차피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둘은 러시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잖나.”

“부올 백작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는 저들이 보급기지로 이용할 만한 곳을 선제타격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보급기지?”

“예, 아무래도 저들이 멀리 원정을 오는 것이니 자신들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겠다는 것이겠지요.”

“나폴레옹 때처럼?”

“아마 맞을 겁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발칸에서의 지배력도 끌어올리려는 계획이지요.”

“곰도 머리를 쓸 줄 아는군.”

러시아에서 제법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영토가 넓은 러시아 특성상 방어해야 할 곳은 많은데 이를 막을 병력은 부족하니 아예 저들이 들어올 진입로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인데…….”

그렇게 되면 저들의 사정 권한에 우리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일단 우리도 대비를 해둬야겠군.”

“지금 폐하께서는 공식적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으시니, 당장 동원령을 내리는 건 어려울 겁니다.”

“으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러시아의 처분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나.”

하지만 그렇다고 뭘 하자니 공식적으로 나는 사경을 헤매면서 쓰러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군대가 멀쩡하게 움직인다면 서방세계와 러시아는 내 연기를 간파하거나 이를 반란이나 쿠데타라고 알고 개입하려 들 것이었다.

[어릿광대의 외줄 타기로군.]

‘영감님, 좋은 생각 없으십니까?’

[자네가 왜 누워 있는지 생각해 보게.]

‘그거야 칼을 맞아서 그런 것 아닙니까?’

[누구한테 맞았는지 잊은 건가?]

‘……아!’

역시 영감님은 수십 년간 제국을 지탱하신 분답게 조언이 술술 나왔다.

“헝가리……. 내가 그들을 잊고 있었군.”

“……헝가리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관대한 처우를 내렸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그거야 그렇……. 아!”

공작은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헝가리에서 군정을 실시하려는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내가 이런 꼴을 당했으니 그들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지 않겠는가?”

“겸사겸사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제국 동부의 국경지대 경비도 강화하고 말이지요.”

“그렇지.”

이래서 내가 공작을 참으로 좋아했다.

내가 큰 틀을 얼추 잡아주면 공작은 밑에서 밑그림을 완벽하게 그려줬다.

모르긴 몰라도 공작이 병으로 급사하거나 사고로 죽는다면 그날로 제국 행정이 마비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이보게 펠릭스 공.”

“예, 폐하.”

“요새 건강은 잘 챙기고 있나?”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내가 조금 더 성장하기 전까진 공작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길어봤자 5년, 짧으면 3년 안에 그의 빈자리를 메울 인재를 구하거나 행정체계를 개편해야 했다.

‘쓰읍……. 안 그래도 걱정거리가 많은데, 어째 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원래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이 그런 것일세, 모든 것을 감싸 안으려 들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되 챙길 것은 확실하게 챙겨야 하네.]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자네는 나처럼 매사에 차악을 고르기보다는 언제나 최선을 고르도록 노력하게.]

‘예, 노력해 보죠.’

* * *

황제가 헝가리인에게 칼을 맞았다는 소식에 크게 놀란 사람 중에는 내각에서 헝가리 헌법 수정을 반대하다 헝가리 총독으로 좌천(?)된 바흐 남작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나이에 제국을 위해 일하는 황제에게 나름대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바흐는 암살사건 이후에 더욱 강경한 탄압정책을 밀어붙이며 헝가리 정부를 압박했다.

“그대들은 지금 폐하께서 괴한에게 칼을 맞을 때까지 무엇을 한 것이오!”

“저 멀리 빈에서 일어난 일을 왜 저희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겁니까?”

“칼을 휘두른 것이 헝가리인이잖소!!”

“그건 그렇지만……. 어디 저희가 왕국의 인민들을 하나하나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 한번 잘했구려. 그래서 본인은 현시점 부로 헝가리 총독의 권한을 발휘하여 한가지 법안을 입안할 생각이오.”

총독으로 부임하고 대관식 문제에만 집중하던 그가 법안을 입안한다고 하니 헝가리 정부의 관료들은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갑작스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금일부로 헝가리 왕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정부청사에 신고하고 주민증을 받아가야 할 것이오.”

“그게 무슨…….”

“그런 일을 저희와 상의 한마디도 없이 벌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말에 다들 반발했으나 바흐 남작은 콧방귀를 뀌며 말하길.

“자네들이 처음부터 사람들을 잘 관리했으면 이런 일도 없잖은가?”

바흐는 일방적인 통보만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관료들은 울분을 터뜨렸으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사실상 헝가리왕국은 해체되어 껍데기만 남아 오스트리아에 통합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일단 하는 척이라도 해야겠지요.”

“정말 저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실 생각입니까? 당장 이런 정책을 실행하겠다고 하면 행정상의 소요를 따지기도 전에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힐 겁니다.”

“그럼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지금 혁명하겠다며 들고일어난 이들의 뒷수습을 하는 것만으로 벅찬 상황에서 총독에게 그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면, 저자가 들어줄 것 같은가?!”

“그건…….”

코슈트의 혁명정부가 몰락하고 정권을 잡게 된 러요시 페렌츠 요제프 버차니 백작은 전임자가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전에 코슈트가 벌여놓은 개혁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곡예였다.

그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적으로 바로잡으며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균형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빈에서 한 눈치 없는 헝가리 청년이 벌인 일로 인해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내가 그동안 혁명분자들의 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그렇게나 말했거늘 여기 있는 이들 중에 단 한 명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각하,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럼 아닌가? 아니라면 리베니인지 뭔지 하는 애새끼는 왜 황제 폐하를 찔렀느냔 말이야!”

버차니 백작의 일갈에 다들 입에 못질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닫고는 대답을 못 했다.

“지금 총독이 보기에는 우리도 그 리베니인지 뭔지 하는 애새끼에게 황제를 찌르라고 사주한 범인처럼 보일 걸세, 그런데 지금 총독의 말을 거스르자는 건가?!”

“……죄송합니다.”

“죄송한가? 그럼 당장 그 못난 낯짝을 내 앞에서 치우게! 나가서 총독이 시킨 대로 헝가리인들에게 주민증을 발급하는 척이라도 하란 말이야!”

그의 서슬 퍼런 분노에 다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 *

황제피습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며칠 만에 제국 내에서 헝가리인의 인식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특히 황제가 벌여놓은 여러 공적 사업 덕분에 입에 풀칠하고 살게 된 하층민이나 도시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까지 겹치면서 헝가리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황제 폐하의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헝가리 놈의 집입니다.]

괴르게이는 퇴근길에 자신의 집 대문에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다섯 번째로군…….”

이 정도면 얌전한 편이었다.

다른 헝가리 사람은 길 가던 중에 어디선가 날아온 썩은 음식을 맞는다든가 밤중에 누군가 찾아와서 그에게 당장 도시를 떠나라고 협박했으니 말이다.

괴르게이는 배 속에 아이를 밴 부인을 위해 거리를 다니는 경관에게 몇 번이나 상황을 설명하며 거리순찰을 늘려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으면서 바쁘다며 이를 거부했다.

아니,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경관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우……. 일만 아니었으면 이 빌어먹을 도시는 진즉에 떠나는 건데…….”

괴르게이는 페인트 범벅이 되어 있는 문을 열어젖히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뒤를 쫓는 이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는 지난번 황제와의 면담 이후에 생긴 그의 버릇으로 제국의 개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생긴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항상 신경이 날카로웠지만…….

“어서 오세요. 피곤하시죠?”

“조금 그런 것 같아.”

부인을 보면 어느샌가 긴장이 풀리며 날카로움이 많이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아델, 우리 떠날까?”

“재밌네요. 그럼 어디로 가볼까요?”

“내 말은 아예 제국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자는 뜻이었어……. 파리나 런던으로 말이야.”

“네?”

괴르게이의 말에 아델은 가볍게 놀라더니 이내 그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으며 물었다.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닌데……. 당신이 힘들까 봐 그렇지.”

혁명이 전부 물거품이 돼버린 상황에서 괴르게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었다.

더군다나 부인은 곧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었다.

만약에 자신 때문에 아델이나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괴르게이는 이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여기가 제 새로운 고향이고 곧 태어날 아이의 고향이 될 텐데 뭐가 힘들겠어요?”

“지금 밖에서…….”

“사람들이 헝가리 사람들을 괴롭힌다고요?”

그녀의 말에 괴르게이는 당황했다.

분명 그녀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찌…….

“옆집 사는 마리아 여사가 알려주던걸요?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자길 꼭 부르라면서 말이에요.”

“……옆집에 사는 분 이름이 마리아였군.”

“예전부터 했던 말이지만……. 당신은 너무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 같아요. 이제 전쟁이니 혁명이니 하는 건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주변을 돌아보세요.”

“아델, 난 이미 모두 털어냈어.”

“그런 분이 빈을 떠나느니 마느니 하시는 거예요?”

“그건…….”

괴르게이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아델은 그의 입을 막으며 웃었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알겠어.”

괴르게이는 부인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괜찮지만, 아델의 안전을 확보해야 해.’

그리 생각한 괴르게이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그는 빈에 거주하는 헝가리인 모임을 찾아다니며 다 같이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마자르인들이 힘을 모아 이런 불평등한 세상에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호소력 짙은 말에 그동안에 다른 이들에게 많이 시달렸던 헝가리인들이 똘똘 뭉치기 시작했고 그들은 신문 사설을 투고하거나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등의 활동하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렸다.

이런 그들의 활동은 황궁에서 일하는 한 헝가리 의사의 귀에도 흘러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런 쳐죽일 놈들을 보았나!”

이 일을 접한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동포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물론 그가 열성적인 민족주의자여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고 그저 자신의 논문이 떨어진 것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분명 지난번에 황실의 직인을 찍어서 보냈음에도 떨어진 것에 분개하여 이번에는 황제 폐하께서 읊어주신 소독이라는 개념을 추가한 새 논문을 들이밀었지만, 학계에서 반려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자신이 헝가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긴 일이라 판단한 제멜바이스는 이러한 사회통념에 크게 분개했다.

“이런 망할 놈들을 보았나!”

그리고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자신의 억울함을 쉽고 빠르게 풀어줄 수 있는 인물을 찾아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쓸데없는 일이 벌어지는군.”

이마를 찌푸리는 황제를 보며 제멜바이스는 남몰래 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날 무시하던 멍청한 새끼들을 한 번에 처리할 기회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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