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56화
강철의 심장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제국의 선전포고에 맞서 선전포고로 맞받아쳤다.
다들 전쟁 전에는 아침은 런던에서 점심은 키예프 저녁은 페트로그라드를 외쳤지만 정작 전쟁이 벌어지자 서방세계는 몸을 사리기 급급했고 러시아 제국 역시 발칸 전선을 제외하고는 몸을 사렸다.
다들 겁먹은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단단한 등껍질 안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기만 하는 모습은 웃기기까지 했다.
당사자들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렇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영국과 프랑스는 동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특히 프랑스는 곧 다가올 대선을 앞두고 루이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침공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정치가 개판 오 분 전이 되어가고 있었던 탓이 컸다.
“지금 저 간악한 러시아가 유럽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형국에 선거가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그에 맞는 방법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그에 따라 프랑스의 인민들이 제게 건네준 엄숙한 권한을 빌려 선언하노니……. 현 시간부로 프랑스 전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차대 대통령 선거는 무기한 연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재임을 막고자 헌법을 뜯어고치는 것도 틀어막고 모두에게 투표권을 주려는 것까지 틀어막았던 정적들이 크게 반발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서나 그러는 것이오!”
“예, 압니다. 아주 잘 알지요!”
루이 나폴레옹의 목소리가 의회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자 문이 열리며 완전무장한 근위대를 비롯한 국가헌병대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의원들의 옆에 일렬로 자리를 잡으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폴레옹의 이런 노골적인 행동에 의원들은 큰 불만을 느꼈고 개중에 몇몇 용감한 의원이나 행동이 앞서는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를 비난했다.
“이 독재자!”
“이딴 짓이나 하라고 국민들이 널 그 자리에 앉혀준 게 아니야!”
“혁명의 가치를 부정하는 독재자가 되려는 건가!”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병사들의 개머리판과 발길질에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들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던지라 그들이 휘두르는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으악!”
“으으…….”
잠시 비명이 들려오더니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프랑스인의 붉은 피가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의원들은 겁에 질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반대는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나폴레옹은 의장으로부터 의사봉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의사봉을 두들기고는 천천히 발언대를 걸어 내려왔다.
그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갈수록 푸른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그의 오른편으로 물러났고 그들에게 두들겨 맞아 붉은 피를 흘리는 의원들은 왼쪽 구석으로 쫓겨났다.
루이 나폴레옹은 그렇게 생긴 새하얀 대리석 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가 의회를 빠져나오자 구름처럼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이 그를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그런 군중들에게 화답하듯이 오른손을 주먹 쥐고는 하늘로 치켜들었다.
“나는 신으로부터 프랑스를 다시금 위대하게 만들라는 운명을 전해 받았고 이를 나폴레옹의 이름으로 행할 것을 이 자리에서 엄숙히 맹세하노라!”
새로운 독재자의 등장에 누구보다 자유를 사랑해 마지않던 프랑스인들이 열의에 찬 함성과 환호로 새로운 독재자를 받아들였다.
루이 나폴레옹 3세.
프랑스 공화국의 새로운 독재자이자 새롭게 태어날 프랑스 제2 제국의 황제가 될 사나이의 이름이었다.
* * *
“얼씨구 프랑스에서는 또 나폴레옹이 권력을 틀어잡았다네요.”
[으음……. 그거 골치로군.]
“쯧쯧쯧……. 프랑스 사람들은 혁명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강력한 독재자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영국은 한창 동원령을 서두르는 모습이었고, 프랑스는 내부 문제를 정리했으니 자신의 첫 업적이 될 러시아원정에 전력을 쏟아부을 것이었다.
“앞으로 무수한 악수 요청이 쏟아지겠네요.”
[무수한 악수 요청은 또 뭔가.]
“그동안 유순하게 나오던 러시아나 서방측에서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압박을 넣어올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헨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엄하오! 이곳은 폐하께서 휴식을 취하시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저 문안이나 드리고자 했을 뿐입니다.”
“폐하를 접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약속부터 잡는 것이 기본임을 잘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시는 겁니까.”
“허허, 폐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기에 걱정되는 마음에 만나 뵙기를 청하는 것이잖습니까.”
“돌아가시지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지난번에 봤던 영국대사관 쪽 사람인 듯했다.
“아무래도 영국 놈들이 애가 타는 모양이로군요.”
[러시아가 발칸지역을 손에 넣고 오스만을 압박하고 있는데, 저들은 아무것도 하질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이젠 앞으로 눈치 볼 일이 많아지겠군요.”
이미 러시아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치고 서방에 붙기로 했지만 당장은 조용히 지내야 했다.
아직 우리 경제는 이런 대규모의 전쟁을 치르기엔 부족함이 많았고 병력이나 장비 역시 부족했고 이를 찍어낼 공장 역시 준비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있다면 얼마 전에 공작의 정기보고에 따르면 지난 탈러 화의 평가절하로 인해 수출은 늘었지만 수입물 품의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산 면, 모직물과 의류 등은 값이 너무 오른 탓에 주요 소비층이 국산품으로 돌아서게 만들 정도였다.
덕분에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부터 계속되던 무역 불균형은 자연스레 흑자로 전환되었고 국내기업들은 급격히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대신 영국의 압박도 심해지지 않았나.]
“그래봤자 저놈들이 어쩌겠습니까?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잖아요.”
[저들이 차관으로 압박하며 평가절상을 밀어붙이면 우리 쪽이 큰 손해를 보잖나.]
“그렇게 치졸하게 나오겠다면 우리도 치사하게 나가면 그만이죠. 우선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러시아에 붙으면 그만입니다. 러시아에 무기도 팔아먹고 괜찮겠네요.”
[허허……. 자네도 이제 어엿한 유럽인이 되었군.]
“제가 좀 빨리 배우고는 하지요.”
누차 강조하지만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리 제국이나 독일연방의 도움이 절실할 것이었다.
당장 러시아가 점령한 발칸반도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했고,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덴마크와 프로이센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저희는 독일연방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지요.”
[허허허! 영국 놈들이 자네 비위를 맞춰준다고 골치 좀 썩이겠어!]
“아무렴요. 아주 저 녀석들의 지갑에 있는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털어낼 생각입니다.”
러시아와 서방국가들이 가슴이 절로 웅장해지는 싸움을 벌일 동안 나는 방에 틀어박혀 구경할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그렇게 시간은 기약 없이 흘러만 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발칸 쪽에서 연달아 들려오는 암울한 소식을 전해 들으며 초조함을 느꼈지만 정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러시아의 침략행위를 비난하며 함대를 보내거나 오스만에게 소정의 무기 제공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러시아군이 이스탄불 인근의 차탈차라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도 그러했고 그들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맹공을 퍼부을 때 역시 그러했다.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만 흐르면서 이스탄불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왕국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인 마시모 다첼리오에게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전하, 이 친구가 이전에 말했던 사람입니다.”
“사보이아 왕가 만세! 사르데냐 왕국 만세!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전하.”
“고맙네, 그래서 자네 이름은 뭔가?”
“저를 칭하는 이름은 많지만 다들 저를 카밀로 카보우르라고 부르고들 합니다.”
“반갑네, 카보우르.”
카보우르는 왕에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대뜸 에마누엘레 2세에게 물었다.
“전하께옵서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셨지만 아쉽게도 패배하여 그 뜻을 꺾어야 했지요…….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아직도 그 뜻을 품고 계십니까?”
“이보게 카보우르 경! 그게 무슨…….”
그의 도발적인 어투에 놀란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다첼리오가 그를 꾸짖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에마누엘레 2세는 웃으며 그를 제지했다.
“총리, 지금 면담 중이지 않나.”
“하오나…….”
“내 대답이 꼭 필요한 질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자네는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긴 힘들게야.”
“예, 전하.”
에마누엘레 2세는 웃으며 왕좌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카보우르에게 걸어와서는 그의 바로 앞에서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
“이탈리아 통일을 향한 내 열망은 몇 번의 실패 따위로 꺼지지 않는다네, 이러면 대답이 됐겠지?”
왕의 말에 카보우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충분합니다. 전하.”
“그래, 자네의 성격이 뒤틀린 탓에 예절이니 법도니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내게 그런 망발을 한 것은 아닐 테고……. 무슨 뜻으로 내게 그리 물은 건가?”
“당연히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기회가 찾아왔으니 이를 전하께 알려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통일의 기회?”
왕은 카보우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기회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번에 벌어진 러시아와 서방세계 간의 전쟁이 그 기회입니다. 전하.”
“전쟁?”
전쟁이라는 말에 에마누엘레는 얼굴을 찌푸리며 카보우르를 노려봤다.
“지금 자네 말은 저들이 우리에게 신경 쓰지 못할 때 다시금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자는 뭐 그런 말인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카보우르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왕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하길.
“전하, 이번에야말로 서방의 강대국들에 우리 사르데냐가 이탈리아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어필할 기회입니다.”
“기회라고? 그건 무슨 말인가.”
“영국과 프랑스는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선포하긴 했으나 그들은 준비를 끝내지 못해 당장 군대를 일으키지조차 못했잖습니까?”
“그래서.”
“그러니 저희가 먼저 나서서 군대를 동원하여 러시아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카보우르의 말에 다첼리오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자네 말대로라면 저들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우리 왕국의 전력만으로 러시아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피해가 크지 않겠는가.”
“피해가 큰 만큼 돌아올 과실은 더욱 달콤할 것입니다. 청년들이 흘린 피는 대지로 스며들어 통일 이탈리아라는 거대한 나무를 키워낼 테니 말입니다.”
“으음…….”
카보우르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입김이 센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이었고 사르데냐 왕국이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지난 독립전쟁으로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다른 강대국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여기서 카보우르는 프랑스와 영국을 끌어들이자고 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사르데냐는 충분한 ‘핏값’을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옳은 말처럼 들렸지만 그들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관련 없는 전쟁에 애꿎은 젊은이들이 죽어 나간다는 것이 왕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카보우르 역시 이러한 왕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그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전하, 지금이야 러시아가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설치고 다니지만 그들의 기세가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저들의 기세도 언젠가는 꺾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저들의 흉포한 기세가 한풀 꺾일 때까지만 버티면 그만이로군.”
“그렇습니다. 전하.”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큰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단을 내렸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피해가 뒤따를 수밖에 없겠지.”
“때로는 강철같은 마음으로 대업을 위해 전진하실 줄도 아셔야 합니다.”
“강철의 심장…….”
에마누엘레 2세는 잠시 두어 번 고개를 가로젓더니 천장을 올려봤다.
그러고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카보우르를 불렀다.
“카보우르.”
“예, 전하.”
“프랑스의 나폴레옹 앞에서도 내게 말했던 것을 똑같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