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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57화 (57/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57화

서전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러시아를 제법 당혹스럽게 만들긴 했으나 전선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급하게 구성된 3만 명의 사르데냐 왕국의 원정군은 오늘날 알바니아 지역의 해안 도시 두러스라는 곳에 상륙하는 데까진 성공했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도시를 거점 삼아서 주변으로 치고 나가기보다는 도시를 요새 삼아 러시아군의 공격을 맞받아치며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러시아군을 지휘하는 이반 파스케비치 대공 역시 이러한 사르데냐 군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곧장 병력을 보냈고, 말이다.

전선에서는 연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저들을 바다로 쫓아버리려는 러시아군과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텨내려는 사르데냐 군이 뒤얽히며 사람들의 약속장소였던 분수에는 피가 흐르고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던 광장에는 시체가 널브러졌다.

“독한 놈들 같으니…….”

사르데냐 원정군을 지휘하던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장군은 자신의 목숨은 돌보지 않고 방어선에 뛰어드는 적군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여러 전장을 돌아다녔으나 그는 이렇게나 용감한 병사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온 러시아군은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불가르 등지에서 모인 자원병과 소수의 그리스군이었다.

이들의 숙련도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범슬라브주의라는 민족주의 정서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기에 급조된 민병대 수준의 병력임에도 전투 중에 도망치지 않고 러시아 장교의 명령을 받고 방어선 정면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자기들이 죽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장군, 이렇게 무의미한 소모전을 반복하면 일주일도 못 버틸 것 같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네, 하지만 저들이 눈이 뒤집혀 밀고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어찌하겠는가?”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야지 않겠습니까?”

“방어선을 보강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건 그렇지요.”

전투라는 큰 충격을 받고 회복할 시간조차 없이 연일 계속되는 격전은 병사들을 지치게 했고 덕분에 사르데냐 군의 전투력과 사기는 계속 꺾이기만 할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평소에 채찍질이 두려워 장교나 부사관에게 감히 말도 못 걸던 병사들이 알게 모르게 그들을 압박했을 정도였다.

“본국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는지요……?”

“그런 걸 왜 내게 묻는 건가? 쓸데없는 질문할 시간에 가서 참호나 더 깊게 파게.”

“이젠 손이 얼어붙어서 삽질도 힘듭니다. 도대체 지난번에 보급해 주시기로 한 모포는 언제쯤 주시는 겁니까?”

“그것 역시 나중에 따로 통지해 주겠다.”

“그러니까 언제 주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뭐?”

현대였다면 별문제 없는 대화였겠지만 지금은 엄연히 신분제가 살아 있는 시대였고 대다수 병사는 평민이었으며 대다수 장교는 귀족이었다.

그런데 감히 일개 병사 따위가 장교의 말에 토를 달았으니 장교는 그런 말을 한 병사에게 태형을 내려 엄하게 다스렸지만, 전투가 계속될수록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건 사르데냐 왕국군이 발칸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석 달쯤 지난시 점이었고 전쟁이 시작된 지 반년째가 되던 때였다.

* * *

사르데냐 원정군이 홀로 힘겹게 싸우며 시간을 버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이 벌어준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전쟁 준비에 열을 올렸다.

우선 영국은 함대를 북해와 발트해, 그리고 지중해로 파견하여 러시아함대를 공격하고 그들의 무역선을 탈취하려 했다.

하지만 이전에 나폴레옹 전쟁 때와는 달리 러시아가 재빨리 무역선과 전함을 회수한 탓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는 못하고 러시아 해군이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봉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프랑스는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았는데, 전 국민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성공한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자신으로 업적으로 만들려 했다.

자신의 큰 아버지인 나폴레옹 황제는 러시아에 패했지만, 자신은 그들을 쳐부술 것이다.

러시아의 북풍을 잠재워 위대한 프랑스의 세기를 다시금 열어젖히겠다.

이렇게 말이다.

이런 나폴레옹 3세의 선전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며 프랑스의 최전성기였던 제국 시절을 그리워하던 국민 정서와 맞아떨어지며 그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프랑스인들은 전쟁을 위해 어려운 살림에도 자발적으로 국방헌금을 냈고 젊은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군에 자원입대했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군에 입대하는 청년의 숫자가 너무 많은 탓에 한창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프랑스에서 노동력이 부족 문제로 인해 공장이 멈추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반년 동안 내부의 불안요소를 친위쿠데타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남아 있는 불안요소를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밀어 넣은 나폴레옹은 거의 반년간 준비한 6만 명의 원정군을 발칸으로 보냈다.

나폴레옹 3세는 원정군을 파견할 때도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았다.

대대적인 출정식과 함께 병사들과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연설도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거라! 가서 프랑스에 위대한 승리를 안겨다오! 그대들의 죽음으로 전 유럽을 악에서 구하거라! 너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갈수록 유럽은 평화에 가까워질 것이고 프랑스는 과거의 영광에 가까워질 것이니……. 가거라! 그리고 승리와 함께 돌아오거라!”

원정군을 이끄는 것은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피에르 보스케 장군으로 그는 조금 뒤에 출발할 프랑스군 본대와 영국군을 위한 교두보 마련과 이스탄불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곧 사르데냐 군이 주둔지에 도착합니다.”

“알겠네.”

보스케 장군은 고민했다.

프랑스군과 사르데냐 군을 합친다고 해도 그곳을 포위한 러시아군보다 적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선발대로 먼저 도착해 있는 사르데냐 군이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도시 외부의 7~8마일(11.26㎞~12.87㎞) 지점까지는 평야 지대라는 점이었다.

거기에 인근의 대도시인 티라나까지는 좁고 구불구불한 협곡과 험준한 산악지대라고 하니 이곳에서 적을 물리치기만 한다면 이곳을 거점 삼아 주변으로 영향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문제는 저들의 전력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사르데냐 군이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그건 이미 읽어봤네.”

사르데냐에서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지금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러시아군은 본대가 아니라 현지에서 모인 자원병과 그리스군이라 했다.

뭐 말이 자원병이지 실상은 오스만의 봉신 국이었든 이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보낸 것에 가깝겠지만.

아무튼.

저들은 슬라브인이라는 공통점으로 똘똘 뭉쳤다.

겉으로는 말이다..

단 한 번도 합을 맞춰본 적 없는 군대가 한데 뭉쳤으니 분명 문제가 생길 터였다.

예를 들어 지휘계통의 문제라던가 언어 문제 같은 것들 말이다.

보스케 장군은 사르데냐 군이 상륙하고 3개월간은 매일같이 격렬히 전투를 치렀지만, 그 이후부터는 드문드문 전투를 벌였다는 점을 주목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도시를 탈환하려던 적군이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자 공세를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보스케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그럼 무언가 다르다는 겁니까?”

“처음에야 다들 민족이라는 뿌리로 굳게 단결되어 있고 언어 문제라는 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어찌어찌 잘 헤쳐나갔겠지만……. 3개월 동안 무엇인가가 달라진 것이지.”

“달라지다니요?”

그의 부관이 묻자 보스케 장군은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는 해안가를 바라봤다.

“지난 3개월간 서로 간에 치열한 격전이 오갔다고 들었네, 그렇다는 말은 양측의 피해가 상당했을 거란 이야기겠지.”

“그렇겠지요?”

“자네는 전투 중에 제일 먼저 사살해야 하는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는지 기억하는가?”

“물론입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으면 장교와 부사관을 우선해서 노리라고 배웠습니다!”

“그래, 그렇기에 사관학교에서도 전장에서는 불필요하게 자신의 몸을 노출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치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보스케 장군은 점점 가까워지는 해안가의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매캐한 연기 탓에 부관이 콜록거리자 보스케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난 3개월간 얼마나 많은 러시아 장교가 죽었을 것 같은가?”

“그야…….”

수도 없이 많이 죽었을 것이다.

당장 사르데냐 원정군만 하더라도 전투로 인해 약 3,000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들었으니 상대는 그것과 비슷하거나 더 많을 터였다.

“러시아군 지휘관이 심혈을 기울여서 저들 사이를 기름칠해 줄 인선을 마련했는데, 대부분이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으로 인해 자리를 비웠다네, 그럼 어찌 되겠는가.”

“그렇다면 저들은 서로 소통이 안 되어……. 아!”

부관은 보스케 장군을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일 뿐이네.”

“하지만 그럴듯한 가정이었습니다!”

“원래 계획이느니 예상이니 하는 것은 막상 현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법이네.”

말은 그리했으나 보스케 장군의 입가는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 *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며 발칸 쪽 전선이 열려 버리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대사가 쉬지도 않고 쉰부른 궁을 찾아왔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대사는 얼마나 절박했던 것인지 나를 보기 전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겠다면서 내 방 앞에서 주저앉아서 단식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그건 다행히도 어머니께서 적절히 물리쳐주긴 했으나 앞으로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브루크 경이 주도하는 공적 사업들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고 덕분에 국가 경제도 탄력을 제대로 받으며 제국경제가 안정궤도에 오르자 슬슬 이런 되지도 않는 연극을 끝내야 할 때가 찾아왔다.

“반년이면 오래 끌었지.”

[처음에는 한두어 달쯤 하다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정말로 반년을 채울 줄이야.]

“허허, 제가 원래 참을성이 좀 좋습니다.”

[그러면 그라츠에게는 왜 그리 대한 건가?]

“정정하겠습니다. 저는 참아야 할 때만 참을성이 좋습니다.”

[참으로 잘났군.]

“제가 좀 그렇지요.”

오랜만의 외출인지라 평소에 입던 잠옷이나 간편복이 아닌 후사르 군복으로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어깨 위에 걸친 멘테까지 튼튼하게 고정하고서는 거울을 돌아봤다.

“역시 완벽하네요.”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본인의 젊었을 적에는 거리에 나가기만 해도…….]

“어허, 이게 전부 제 꾸준한 관리 덕분임을 잊으셔서는 안 되지요.”

[원래는 자네의 것이 아니라 짐의 것이었거늘…….]

“관전자는 조용히 해주십시오.”

[…….]

영감님을 조용히 시키고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런 병사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줬다.

“좋은 아침이네.”

“폐, 폐하……!”

“그럼 나중에 또 보세.”

그렇게 당황하는 병사들을 뒤로하고는 산책하듯이 천천히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만나는 몇몇 시종들과 시녀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내일한다던 사람이 멀쩡히 걸어 다니는 것에 놀란 것인지 비명까지 지르며 나를 격하게 반겨줬다.

“폐, 폐하께서 살아나셨다!”

“유, 유령이다!”

“…….”

그렇게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집무실로 향하던 중에 공작과 딱 마주쳤다.

“오랜만이야 공작.”

“폐하…….”

공작은 잠시 주변을 두어 번 둘러보고 난 뒤에 지켜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마를 짚으며 내게 말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긴? 슬슬 일선에 복귀하려는 것이네.”

“그렇다면 제게 미리 말을 좀 해주셨어야지요.”

공작의 말에 내 눈매와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허, 내가 자네 허락 맡고 다닐 사람인가?”

“그건 아닙니다만……. 미리 상의하고 움직이는 쪽이 더 편하시잖습니까.”

“내가? 아니면 자네가?”

내 공격적인 어투에 공작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폐하의 편의를 위해서이지요.”

오랜만에 딱딱하게 굳은 공작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푸핫! 농담일세.”

“폐하…….”

“내가 저 안에서 너무 심심하여 자네를 가볍게 놀린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말게.”

“후우……. 일단 집무실로 가시지요. 보고는 그곳에서 올리겠습니다.”

“좋지~”

역시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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