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58화
소모전
지난 반년간 경구 수액으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먹은 덕분에 제국경제는 나날이 성장했다.
빈과 부다를 잇는 철로는 어느덧 완공을 바라보며 마무리공사에 들어갔고 철로나 여러 기반시설을 만들기 위한 여러 공적 사업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급료를 쓰며 제국의 내수경제에 시동이 걸렸다.
그렇게 빈과 부다를 비롯한 제국 내 주요 도시들은 브루크 경과 내 계획대로 여러 기반시설이 차근차근 완공되고 여러 공장이 시공에 들어가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시장에 돈이 돌면서 제국의 경제도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빛이 돌아왔다.
거기에 내가 특별히 만들라고 하였던 경마장이나 체육시설 역시 올해 말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완벽하군.”
“그래서……. 왜 지금 나오신 것입니까?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데요.”
공작의 말대로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보내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화답하며 7~8개월이 흘렀지만, 막상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이 처음 맞붙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거기에 영국군은 아직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이었으니……. 그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끼어들어야지.”
“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옵서는 왜 이리도 다급하게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공작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답했다.
“사르데냐가 끼어들었잖나.”
“그것이 왜 문제입니까?”
“허허, 이보게 공작 자네도 조금 늙었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게, 사르데냐가 왜 자신들에게 아무 이득도 없어 보이는 이 전쟁에 끼어들었을까?”
내 질문에 공작은 뭘 그런 것을 묻냐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진행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생각보다 잘 알고 있는 공작의 말에 나도 모르게 당황하며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공작은 평소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저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려 하니 우리도 늦기 전에 얼굴도장을 찍어둬야 한다는 의도로 참전을 결심하신 겁니까?”
“아니…… 뭐……. 그렇긴 한데…….”
“폐하의 걱정은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들과 우리는 사정이 좀 다르잖습니까?”
“다를 것이 있는가?”
공작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떻게든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사르데냐 왕국과 그걸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려는 제국의 사정이 다르다니?
“저쪽은 유럽의 강대국들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고 우린 저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이잖습니까.”
“그게 다른 것인가? 내가 보기엔 비슷하네만.”
“비슷하지만 다르지요. 비유하자면 사르데냐는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얼굴을 들이민 손님이지만 우리는 초대장을 고르는 위치이지요.”
“아!”
공작의 비유를 들으니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러니 자네 말은……. 사르데냐가 아무리 저들에게 잘 보이려고 발버둥 쳐도 우리가 저쪽에 붙어버리면 그 노력이 빛을 잃게 된다는 것이로군.”
“그렇지요.”
“흠……. 그렇다면 오히려 이번에 저들의 힘을 조금 빼놓을 필요가 있겠군.”
“제가 말하려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르데냐는 이른 산업화를 통해 상당한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겨우 섬 하나와 작은 지방 하나를 소유한 소국이었다.
그러니 저들이 아무리 잘 발달한 산업시설을 가졌어도 제국에 패배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르데냐 쪽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을 끌어들여 우리에게 대항하려고 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들의 몸부림은 작은 몸짓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렇다 해서 저들을 너무 낮잡아보면 안 되네.]
‘허허, 제가 언제 낮잡아봤다고 그러십니까? 원래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입니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는 것은 금물이네, 사르데냐에는 카보우르라는 걸출한 재상과 가리발디라는 유능한 장군이 있다네.]
‘가리발디는 들어본 것 같은데, 카보우르는 또 뭐 하는 사람입니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냥 사르데냐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쉽다네.]
‘카보우르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로군요.’
지금도 외무장관과 내무장관직을 겸임하며 겸사겸사 총리직까지 도맡아서 하는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괴물 같은 행정 능력과 정세를 읽는 외교적 안목까지 갖춘 인물이라니!
그런 사람이 또 존재할 줄 상상도 못 했다.
[……그 정도는 아닐세.]
사르데냐의 카보우르가 공작에 버금가는 인재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사르데냐를 공격…….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십니까?’
[자네가 좀처럼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어째 자네는 매번 내 말을 이리도 무시할 수 있는가?!]
‘무시하다니요? 제가 얼마나 영감님께 의지하고 있는데요.’
[아니! 자네는 매번 입으로는 나를 존중하느니 존경한다느니 하지만…….]
‘아,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친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분을 존경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좀 듣게!]
‘옙.’
이후로 영감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원인은 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었으나 자세히 들어보면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자네는 이런 상황에서 본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여 제국을 미래로 이끌어줘야지 않겠는가!]
[……이게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이건 전부 자네와 미래의 황후를 위한 것일세, 자네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면 그녀가 얼마나 고달픈…….]
아무래도 지난번 연회에서 봤던 소녀가 또 원인인 듯했다.
엘리자베트라고 했던가?
애칭인 것 같은데, 도대체 뭐하던 사람이기에 영감님의 마음을 이리도 흔들어놓은 것인지 궁금증이 들 정도였다.
[보게! 지금도 내 말에 집중하질 않지 않나!]
‘앗!’
영감님의 잔소리에 시달리고 있으니 공작의 보고가 끝난 것인지 헛기침을 하며 내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틀 전에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프랑스 원정군이 발칸에 발을 들이고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했다는 소식입니다.”
“벌써? 생각보다 빠르군.”
프랑스군이 움직이려면 못해도 두어 달쯤은 더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저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내부의 불만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해소하려는 모양입니다.”
“아, 그렇겠군.”
아무리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을 좋아하고 열렬한 사랑을 보낸다고 해도 친위쿠데타로 정권을 연장하고 프랑스의 권력을 틀어쥔 나폴레옹에게 반감을 품는 사람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대개 그를 이용하려다가 실패한 부르주아들이거나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해 화가 난 혁명가들이 대부분이겠지.
그렇게 불만이 쌓였으니 나폴레옹은 이 불만을 외부로 돌려 자신에게로 향하는 비난의 화살을 걷어내려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머리를 잘 썼군.”
“어찌 보면 나폴레옹은 이전부터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겠군.”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는 군사부문을 제외하고도 여러 방면에서 프랑스와 인류 역사에 무시 못 할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루이 나폴레옹이 그런 사람의 휘광을 등에 업고 프랑스의 권력을 틀어쥘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현재 프랑스 공화국의 지도자인 루이 나폴레옹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렸을 적부터 프랑스에서 쫓겨나 유럽을 방랑하던 꼬맹이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하나와 자신의 정치력만으로 권력을 틀어쥐었으니 말이다.
“공작, 프랑스를 예의주시해야겠어.”
“훌륭하신 판단이십니다.”
다시금 프랑스의 주도권을 쥔 나폴레옹이 그들을 어디로 몰고 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나폴레옹 그놈은 다시 황제가 된다네.]
‘아니 영감님……. 스포일러는…….’
* * *
프랑스의 발칸 상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두러스에 상륙한 피에르 보스케의 프랑스군과 그곳을 지키던 사르데냐가 포함된 연합군은 도시 인근의 평야 지대에서 벌어진 러시아군과의 회전을 벌였고 적들을 격파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말이다.
그동안 잘 훈련되기는 했어도 실전경험이 부족했던 사르데냐 군과는 달리 훈련도 잘되었고 식민지 반란 진압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프랑스군은 그 정도가 달랐다.
그들은 러시아군의 맹렬한 포격 속에서도 유유히 곡을 연주했고 심지어 포탄이 대열 한가운데 떨어져도 그들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사기가 높은 병사들의 손에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최신무기인 미니에 탄을 사용하는 미니에 라이플이 들려 있었고 후방에서 보병대를 지원하는 포병은 강선포를 사용했다.
이렇듯 회전에서 가장 중요한 병력의 질과 화력에서 차이를 보이니 고작해야 예비군 수준이었던 러시아군은 금세 무너져 내렸다.
현지 부대를 지휘하던 러시아의 장군 파벨 페트로비치 리프란디는 도주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인근의 험준한 산맥을 끼고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지만, 이 역시 피에르 보스케 장군이 보낸 기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적과의 회전에서도 패배하고 방어선 구축에도 실패한 러시아군에게 남은 것은 기약 없는 퇴각뿐.
그러는 와중에도 프랑스군 기병대는 하이에나처럼 러시아군의 후방을 짓밟으며 보급품을 약탈했다.
연합군의 끈질긴 추격을 받던 리프란디 장군의 부대는 아군이 있는 스코페에 이르러서야 적의 추격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일주일에 걸친 추격을 떨쳐내고 돌아온 리프란다 장군의 부대는 대포를 비롯한 대다수 중장비를 손실했고 병력 또한 사방으로 흩어져 부대 정원의 절반만이 남았다.
“리프란디가 크게 한 방 먹었군.”
“역시 프랑스로군요…….”
“사자의 자식은 못 해도 늑대쯤은 되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파스케비치 휘하의 장교들은 프랑스군의 승전보를 전해 듣고는 자연스레 과거 조국 전쟁 시절의 프랑스군을 떠올렸다.
전 유럽을 정복하겠다던 나폴레옹과 그의 휘하의 내로라하는 장군들, 그리고 그의 명령에 한 몸처럼 움직이던 프랑스군을 말이다.
“다들 무엇을 그리도 걱정하는가? 이미 우리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친 경험이 있잖나? 원래 한 번이 어려운 것이지 두 번은 쉽다네.”
파스케비치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장교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을 질책하려 그런 것이 아니라 전투에 앞서 적의 기세에 눌리면 잘 풀릴 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렇긴 하죠.”
“그 잘난 나폴레옹도 결국 어머니 러시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지요.”
“그런데 그 아들도 아니고 조카란 녀석이 우리를 이겨보겠다? 말이 안 되지요. 하하하!”
파스케비치의 휘하 장교들은 대부분 지난 조국 전쟁 당시에 장교로 복무한 전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장 지휘관인 이반 파스케비치 대공만 하더라도 모스크바에서부터 파리까지 군대를 지휘하며 나폴레옹과 맞서 싸웠던 장군이 아닌가?
그런 만큼 다들 그때의 프랑스군을 떠올리며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호승심을 느꼈다.
“아무래도 콘스탄티노플의 일은 조금 뒤로 미뤄둬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어떤가?”
파스케비치는 생각했다.
이제 프랑스군이 합류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그들의 숫자는 아군보다 적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전황은 아군에게 유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유리한 상황을 유지하며 목표를 달성할 방법은 무엇인가?
“결전이로군요.”
“그렇지.”
파스케비치는 조국 전쟁 당시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승패를 갈랐던 보로디노 전투를 떠올렸다.
물론 그 전투에서는 러시아가 패배했지만, 프랑스는 어마어마한 보급품과 인적손실을 입어야 했고 그렇게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결국 보급 부족으로 물러나야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똑같았다.
적과 일전을 벌여 적의 보급품을 소모하고 적을 약하게 만든 다음에 잡아먹는다.
아주 간단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인 전술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군의 피해도 클 것이었으나 파스케비치 대공은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병사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건 간에 적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위대한 러시아의 위대한 승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