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60화
변심
니콜라이 황제의 명령으로 페테르부르크의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폐쇄되었고 부올 백작은 본국으로 쫓겨나왔다.
그러고는 내게 이런 말을 전했다.
“러시아 측에서 한 달 내로 전쟁에 참여하거나 러시아의 전쟁행위를 돕지 않을 시 오스트리아를 적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또 징징거리는군.”
“이, 이번엔 정말로 우리를 적으로 돌릴 생각인 것 같습니다. 제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출발하여 이곳으로 오는 동안 국경지대에 러시아군이 부대를 증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흠…….”
부올 백작은 러시아가 정말로 침공해 올 것이라고 내게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러시아가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까지 적으로 돌리려고 할까?
안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힘들 텐데, 전선을 더 늘린다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우리가 이름뿐인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최후통첩에 가까운 포고문을 보내올 정도는 아니잖은가.”
“저도 그 점이 수상합니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황제는 어떻게든 우리를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했는데…….”
그동안 어떻게든 우리와 친하게 지내보겠다고 되지도 않는 아양을 떨던 러시아가 돌연 태도를 바꿔 우리에게 강경하게 나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당장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흠……. 중간에 생각이 바뀌었거나……. 우릴 대신할 만한 새로운 동맹을 구한 모양이로군.”
“오스트리아를 대신할 만한 동맹국이 있습니까?”
“그건 모르지, 저쪽에서 우리보다 새로운 동맹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정말 강력한 동맹이 생긴 것일 수도 있지.”
그 동맹이 어디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이 그런 동맹을 가졌다면 굳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려 할 것이니 조만간 그 정체를 알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으니 말이다.
“폐하,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단순히 러시아의 황제가 생각을 바꾼 것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푸핫! 아무리 러시아가 중세에 머무르는 삼류국가여도 황제라는 사람이 국가의 중대사를 기분 따라 결정하겠는가?”
“하긴……. 그렇긴 하군요.”
부올 백작의 말에 웃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내가 틀린 것이라면?
러시아의 황제가 정말 단순히 우리가 참전하지 않는 것에 분개하여 이렇게 나온 것이라면?
“설마…….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서방의 강대국들과 일전을 벌이겠다고?”
아무리 러시아인들이 애국심만큼이나 자존심이 높다지만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만용이었다.
전쟁이라는 국가의 중대사에 개인의 감정이 끼어든다면 그건 재앙이었다.
“에이 설마…….”
말은 그리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초조했다.
* * *
니콜라이는 전선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보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반 파스케비치 대공은 군대를 이끌고 발칸반도를 휩쓸면서 오스만제국의 휘하에서 고통받던 동족들을 해방함은 물론 옛 로마의 상징인 콘스탄티노플도 함락시키기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황제의 기분은 그야말로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천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하지만 곧 유럽을 제패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리고 제3의 로마를 제창하여 러시아의 역사를 새로 쓸 생각에 빠져 있던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폐하,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건강문제를 핑계 대며 다시금 참전을 거부하였습니다.”
“뭐? 으음……. 오스트리아 놈들…….”
그건 바로 오스트리아였다.
분명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동맹 관계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저들은 러시아의 참전 요구를 번번이 무시하거나 거부하며 시간을 끌었다.
마치 어느 쪽이 이길지 살펴보다가 마지막에 개입하여 과실을 따 먹겠다는 듯이 말이다.
“참으로 치졸한 녀석들 같으니…….”
그동안은 대세의 불안함이나 정국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그들의 행동을 눈감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지금 러시아의 승리가 확실해 보이는 현시점까지 오스트리아가 참전을 거부하니 황제의 인내심은 바닥을 보였다.
거기에 동맹인 그들과는 다르게 프로이센에서는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싶다며 알아서 앞에서 설설 기지 않았던가.
그토록 용맹하며 자존심 높았던 이들마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뻣뻣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오스트리아 놈들은 왜 이리도 오만방자하단 말인가! 내 여태껏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뭐든 주었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친절을 베풀지 않았는가!”
“맞습니다. 폐하!”
“폐하의 말씀이 백번이고 천 번이고 맞습니다!”
“저놈들은 우리의 친절을 짓밟아 진흙탕에 처박아버렸습니다!”
황제의 분노 어린 말에 귀족들이 찬동하며 장내의 분위기는 점차 건방진 오스트리아를 한번 혼내줘야 한다는 식으로 흘러갔다.
“폐하, 저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사실이오나 그건 얼마 전에 내전이 끝났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키셀료프 경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은 적을 늘릴 때가 아니라 우리 편을 더 만들 시간이잖습니까.”
키셀료프나 페롭스키는 이러한 분위기에 뜨악하며 그들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분위기는 오스트리아 침공 쪽으로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오스트리아가 우리 편이라고?”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어쩌면 저들은 이미 서방국가들 쪽에 붙기로 이야기가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지.”
귀족들이 제멋대로 떠들어대자 황제의 관심은 그곳으로 향했다.
“오스트리아가 이미 서방국가들과 밀월관계를 맺은 상황일 수도 있다……. 참으로 재밌군.”
그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오스트리아가 어물쩍거리며 참전을 꺼리던 것이 모두 설명되었다.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그냥 억지로 끼워 맞춘 것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황제가 생각하기엔 그러했다.
“폐하, 오스트리아가 우릴 왜 버리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빚이 있잖습니까?”
“페롭스키 경의 말이 옳습니다. 저들은 프로이센이라는 경쟁자가 존재하는 한 우릴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저들은 우리가 어려울 때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워하고 있네, 그런데 내가 그런 이들의 사정까지 헤아려야 하는가?”
“그건…….”
황제의 말은 당장 자신들을 도와줄 동맹이 절실했던 러시아의 입장으로 보면 망언에 가까웠다.
하지만 감정이 많이 섞인 듯한 황제의 말은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을 설득하기엔 충분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그깟 오스트리아가 돕지 않는다고 우린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 유럽이 벌벌 떨던 나폴레옹을 상대로도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발목만 잡을 동맹국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겁니다!”
키셀료프, 페롭스키를 비롯한 신중론자들이 아무리 그들을 설득하려 해봐도 이미 한껏 승전의 기쁨에 취해 있는 이들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현 시간부로 오스트리아는 우리의 가상적국으로 분류하고 군부는 유사시에 저들을 상대할 작전계획을 세워놓도록!”
“예, 폐하!”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의 대사관을 폐쇄하고 대사는 본국으로 송환시켜 우리의 뜻을 알리도록.”
황제의 선언에 키셀료프와 페롭스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지만 다른 이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그렇게 러시아는 본인들의 손으로 유일한 동맹국을 쳐내기로 결의하였다.
그것도 전쟁 도중에 말이다…….
* * *
“……그러니까 이게 협박이 아니라 정말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겠다는 최후통첩이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공작의 침통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장난을 치는 것 같진 않았다.
[으음……. 본인이 기억하기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던 것은 이맘때가 아니라 수십 년쯤 후였네만.]
“러시아와의 전쟁…….”
제국의 경제가 궤도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전쟁을 감당할 정도로 튼튼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전쟁에 큰 도움이 될 철로 역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부지역에는 단 하나도 설치되지 않았다.
“지, 지금 러시아가 쳐들어오면 이를 방어할 병력은 몇이나 되겠는가?”
“지난번에 헝가리에 배치한 병력 8만 명과 소수의 국경수비대가 끝입니다.”
“그럼 국경은 포기해야겠군.”
“하지만 동부의 카르파티아산맥을 포기한다면 그 뒤로는 평야 지대인지라 적들을 막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갑작스레 러시아의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오니 머리가 아팠다.
우리 군은 내전이 끝난 뒤 대대적인 군비축소를 벌여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었다.
덕분에 경제는 어느 정도 성장시켰지만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한정적이었다.
민속놀이로 설명하자면 생더블을 갔는데, 친구가 동맹을 풀고 우리를 공격한 상황이었다.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대한 병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자 천혜의 요새인 산맥을 버리고 뒤에 새로운 방어선을 펼치자니 분지 지형인 헝가리 특성상 내부는 죄다 평야 지대였다.
그뿐인가?
러시아군은 동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발칸반도를 휩쓸고 있는 것 역시 러시아군대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세르비아 공국 방면으로 쏟아져 들어올 러시아군도 대비해야 했다.
“……가뜩이나 얼마 없는 병력도 쪼개야겠군.”
당장 러시아가 발칸반도에 동원한 병력만 하더라도 20만을 넘겼고 동부에 배치하는 병력 역시 이와 같다고 산정한다면…….
“제국 내의 동원령이 완료될 시점까지 고작 8만 명의 병력으로 제국 전역을 수비해야 하는군.”
“……그렇습니다.”
참으로 허황한 말이었다.
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생각해 본다면 8만이 아니라 80만을 동원한다고 해도 전부 지킬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네만……. 지금 당장 제국 전역에 동원령을 내리고 병력을 끌어모은다면……. 부대를 완편하는 데 어느 정도나 걸릴 것 같은가?”
“일 년……. 아무리 빨라도 8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미치겠군.”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이니만큼 징집할 수 있는 병역 자원을 조사하고 이를 소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제국은 아직 산업화를 끝내지도 못했으니 그 기간은 더 길 수밖에 없었다.
“쯧……. 무슨 방법이 없을까…….”
당장 전쟁이 난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승전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겠지만 러시아 군대가 제국 전역을 짓밟고 그동안 공들여 키워놨던 것을 깡그리 뭉개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제국이 약해지면 그동안 칼을 갈고 있던 사르데냐와 프로이센이 그걸 가만히 지켜볼까?
“으으…….”
머리가 절로 아파지며 속이 쓰렸다.
공작 역시 내 고민을 공감하는지 평소와는 달리 암울한 표정을 지은 채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법이……. 무슨 방법이 있을 텐데…….”
“우선 전쟁 장관과 군부의 장군들을 불러 긴급안보회의를 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아무래도 두어 명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면 좋은 의견이 나올 것이었다.
하지만 공작의 급한 부름에 쉰부른 궁전까지 급하게 찾아온 이들 역시 나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저, 전쟁 말입니까?!”
“그것도 러시아와의 전쟁이라니…….”
제국군의 총사령관인 벨덴 경과 슈바르첸베르크 내각의 전쟁 장관인 크레토 남작은 갑작스러운 전쟁 소식에 크게 당황하였다.
군부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당황하니 밑에 있는 장군들은 아무 말도 못 한 채로 각자 충격받은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이것이 사실입니까?”
“불행히도 사실이라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대책을 의논하고자 함이니 다들 생각한 것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전부 말해보게.”
하지만 다들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인지 서로 눈치만 살피거나 러시아와의 전쟁이라는 말에 크게 절망하여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좋은 의견 없는가?”
“저……. 폐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무엇이 궁금한가 벨덴 경.”
“러시아가 어느 루트로 얼마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여 침공할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까?”
“없네, 일단 저들이 발칸반도에 투입한 병력으로 추산해 보면 못해도 20만은 넘을 것이라는 게 공작과 내 의견일세.”
“20만…….”
얼추 숫자까지 언급되니 장내는 순식간에 한겨울의 시베리아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다들 한숨 쉬거나 절망한 모습들을 구경하며 괜히 사람들을 모았다는 생각이 얼핏 들 때쯤.
“폐하, 제가 의견을 하나 내어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하이나우.”
지난 내전 당시에 상당히 과격한 모습을 보여주던 하이나우 경이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