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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62화 (62/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62화

고민

지금 괴르게이의 앞에 앉아 있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이를 부르는 이름은 많았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자.

헝가리의 압제자.

아드리아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이들을 다스리는 황제.

등등…….

그중에서 괴르게이가 그를 호칭할 때는 주로 헝가리인의 압제자나 합스부르크의 망령 정도였으나.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불렀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빈에서 사라질 것이었기에 언행에 신경을 썼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신지요.”

“하하하,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였던가? 원래 친구끼리 얼굴이나 보려 하는 것일세.”

괴르게이는 황제와 친구를 맺은 기억이 없었지만, 뒤편에서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누차 말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서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밤늦게 찾아온 것은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역시 귀신같구먼.”

황제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휘황찬란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곁에 있던 시종에게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잠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니 다들 주변 경계에 신경 써주게.”

“예, 폐하.”

그러고는 자연스레 자기가 주인인 양 앞장서서 집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하나? 따라오지 않고.”

* * *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 놀란 괴르게이의 부인과 사소한 오해가 있었지만 어찌어찌 잘 해결하고 괴르게이와 단둘이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빈의 야경을 앞에 두고 서로 간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다가 괴르게이가 내게 물었다.

“폐하께서 저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헝가리 관련으로 문제가 생겼거나 제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허허, 어디 우리가 일이 있어야만 얼굴 보는…….”

“이제 재미없습니다.”

“흠흠……. 맞네, 정확히는 이번에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헝가리인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나는 긴급안보회의에서 결정된 헝가리 방위군 부활에 관한 내용을 그에게 알려줬다.

괴르게이는 헝가리 방위군이 부활하고 내가 헝가리왕국에 독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는 말에 표정이 복잡해졌다.

언뜻 보기엔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달리 보면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세히 보면 뭔가 허탈해하는 듯한 모습 같기도 했다.

“……그래서 헝가리 방위군 총사령관직을 자네에게 맡기고 싶네.”

“…….”

“받아들이겠는가?”

괴르게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어둠에 잠긴 빈을 내려다보며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그가 입을 다무니 나도 입을 닫은 채로 그가 다시금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괴르게이의 부인이 타준 차가 내 취향이었다는 것 정도?

저 멀리서 시간을 알려주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올 때쯤 괴르게이가 입을 열었다.

“폐하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혁명과 동지들을 버리고 도망친 배신자입니다. 그런 제가 무슨 염치로 다시금 동지들에게 돌아가 그들을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간곡한 거절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저들은 자네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네!”

“……제 자존심 문제입니다.”

“자존심?”

고작 자존심 때문에 헝가리 방위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걷어찬다는 말인가?

만약 헝가리가 자치권을 보장받고 의회가 열린다면 군경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을 틀어쥘 기회인데도?

나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이보게 괴르게이, 너무 그러지 말고…….”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차라리 저를 대신하여 클럽커나 가스파르를 찾아가시는 것이…….”

그의 말에 나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이들이 아니라 자네가 필요하다는 말이네, 지금 자네가 아니면 누가 헝가리군을 지휘한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허허…….”

괴르게이 역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듯한데, 왜 자꾸 거절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존심?

그게 밥을 먹여준다던가?

그의 모습이 너무 답답해서 화가 났다.

그래도 이렇게 괴르게이를 보낼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다.

“후우……. 오늘은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겠네, 이틀 정도 시간을 줄 것이니 곰곰이 생각해 보고 확답을 주게나.”

“제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생각해 보게!”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자 찻잔에 남아 있던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캑캑!”

그러다가 괜히 사레가 들려 캑캑거리면서 괴르게이의 집을 빠져나왔다.

* * *

괴르게이는 테라스에 앉아 황제가 탄 마차가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러고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후우…….”

늦은 밤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어두웠다.

집 안에서 새어 나온 매캐한 가스등 불빛이 닿는 부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렇게 어두운 밤이면 이따금 함께 전장을 누볐던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그동안은 빈에 정착하고 일과 사람에 치이느라 동지들을 잊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황제의 말을 듣고서야 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헝가리 독립이라는 꿈을 꾸며 그들과 함께 말을 타고 전장을 달렸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주 먼 옛날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때는 가슴속에 품었던 꿈도 있었고 내일은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 또한 있었다.

물론 끝에는 서로 다툼을 벌이다가 추잡하게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 그런데도 이따금 그때로 돌아가고…….

순간 괴르게이가 흠칫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쓸데없는 옛 생각 때문에 또 일을 그르칠 뻔했다.

‘잊자. 내일은 교수님과 새로운 실험을 준비해야 하니 슬슬 눈 좀 붙여야겠군.’

생각은 그리했으나 괴르게이는 좀처럼 테라스를 떠날 수가 없었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테라스에서 딱 두어 걸음만 내디디면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괴르게이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런 남편이 걱정되었던 아델은 두꺼운 코트를 들고 와서는 괴르게이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날이 춥네요.”

“확실히 춥군.”

그러고는 말없이 그와 손을 마주 잡고는 옆에 앉아 가만히 곁을 지켜주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괴르게이는 부인의 손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정신을 차리렷다.

“크흠……. 이만 안으로 들어갑시다.”

* * *

지난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헝가리 방위군은 52개 보병대대와 22개 기병대대, 그리고 13개 포병대대로 이루어진 약 7만 명 정도의 병력이었다.

지난 전쟁 당시에 탈영하거나 부상이 심한 병사는 집으로 돌려보냈는데도 이 정도였다.

전후 이들은 반역죄로 기소되어 각자 산업현장에서 부족한 노동력으로 일하며 죄를 청산했다.

그런 그들에게 대뜸 러시아군이 쳐들어오니 나라를 위해 싸워달라고 하면 누가 싸워주겠는가?

아무리 내가 그들에게 헝가리에 독립에 준하는 자치권을 쥐여주느니 고향을 지켜달라느니 말해봐도 그들에게는 제 목숨을 건사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들을 전장에 내보내기 위해서는 병사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쓰읍……. 그래서 괴르게이를 끌어들여 스리슬쩍 넘어가려 했던 것인데…….”

지난 헝가리 반란 당시에 군대를 이끌었던 괴르게이는 그들의 구심점이 되기엔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솔선수범하여 병사들에게 모범이 되었고 열세인 상황을 번번이 뒤집으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었다.

지난 반란이 실패로 끝나고 헝가리가 제국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뒤로 그는 소리 소문도 없이 헝가리를 떠났지만, 아직도 헝가리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했다.

[아무래도 가족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기를 꺼리는 모양이더군.]

“끄응……. 부인이 임신 중이라 그런 것이겠지요.”

조만간 태어날 아이가 평생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로 자랄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겠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대의보다 가족이 우선인 사람이로군.]

“그런 모양입니다.”

[괴르게이는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로군.]

“예, 그런 모양이로군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야…….]

“?”

영감님은 갑작스레 괴르게이를 칭찬하시고는 또 상념에 빠지신 듯했다.

요즘 들어 자꾸 뭔가를 떠올리거나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시고는 했는데, 덕분에 잔소리가 줄어들어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감님이 걱정되었다.

‘저러다가 갑자기 성불하시는 거 아닌가?’

물론 영감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기에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괴르게이를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라도 괴르게이를 전장으로 끌고 나가고 싶었지만…….

“쯧……. 이틀 뒤에도 거부하면 클럽커인지 뭔지 하는 녀석과 가스파르라는 녀석에게 군권을 맡길 생각입니다.”

[그들이 군대를 잘 지휘할 것 같나?]

“괴르게이가 직접 추천한 인재니 그럭저럭 잘 해내지 않겠습니까?”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지금 중요한 것은 러시아군을 무찔러줄 헝가리군이 아니라 동원령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헝가리군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지난 전쟁에서 두각을 보였던 두 장군이 적절한 인선인 것 같기도 했다.

“헨리, 거기 있나?”

“부르셨습니까? 폐하.”

“가서 전쟁 장관을 불러오게.”

“예, 폐하.”

아쉽지만 괴르게이에 매달릴 시간은 없었다.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침공이 예정된 이상 일분일초를 허투루 쓸 수 없었으니 말이다.

* * *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는 벌써 2주째 아무런 답변도 보내질 않는 오스트리아의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내심 오스트리아가 자신들의 잘못을 사죄하며 러시아와 함께하겠다고 했으면 모든 것을 잊고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무얼 믿는 것인지 이렇다 할 답변도 보내오질 않았다.

“정말로 우리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것인가.”

황제의 말에 키셀료프는 남몰래 혀를 찼다.

‘이미 국경 근처에 병력도 배치하고 침공 시기까지 결정하셨으면서 저리 말씀하시다니…….’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기에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기분을 달래줄 수밖에 없었다.

“폐하, 오스트리아가 대화를 원했다면 진즉에 사람을 보내거나 하다못해 전보라도 부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조차 없다는 것은 저들이 전쟁을 결의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겠지…….”

니콜라이는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아쉽다는 듯이 연신 혀를 찼다.

이는 막상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려니 괜스레 적을 늘린다는 걱정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항상 일을 벌여놓고 정작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우유부단하게 있을 뿐이었다.

“폐하, 이제는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전쟁을 결단하셨다면 이를 행하셔야 합니다.”

지금 이러는 상황에도 오스트리아는 부랴부랴 전쟁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기습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 오스트리아를 공격해서 끝장내야 했다.

황제의 우유부단함으로 벌써 저들에게 2주라는 시간을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황제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그런 그의 모습은 키셀료프와 페롭스키를 초조하게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끈덕지게 황제를 설득했고 결국 황제의 재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으음……. 오스트리아를 공격할 사령관은 누구로 하는 것이 좋겠는가?”

“멘시코프 공이 맞기로 하였습니다.”

“멘시코프라면 믿을 만하지.”

현재 러시아 군부의 원로들이 그러하듯이 멘시코프의 가문은 이전부터 러시아에 헌신하는 군인 가문이었고 현재 가주를 맡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멘시코프 역시 조국 전쟁과 오스만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육군에서 보직을 변경하여 해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핀란드 총독을 지내다가 현재는 쉬고 있었기에 이번 독일 전역을 이끌기에 충분한 인물이기도 했다.

“멘시코프가 지휘할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33개의 보병연대와 12개 기병대래, 그리고 7개의 포병대대로 이루어진 약 10만의 병력이 민스크에서 대기 중입니다.”

발칸반도에 20만 병력을 파견했음에도 이 정도나 되는 병력을 양성하는 것은 드넓은 러시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들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발칸반도로 향해야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러시아의 높으신 분들은 러시아군이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차면 오스트리아의 썩은 문짝이 날아가면서 건물째로 무너지리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멘시코프의 계획은 프로이센과의 조약대로 프로이센의 카토비체를 지나 비어 있는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대로 밀고 들어갈 예정입니다.”

거기에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찌를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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