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63화
배신
오스트리아 침공군을 이끌게 된 멘시코프는 전선으로 떠나는 마차 안에서 오스트리아를 처리할 작전을 구상했다.
“오스트리아 동부는 카르파티아산맥으로 둘러싸여 치고 들어가기에 마땅치 않은 곳이로군.”
그의 말처럼 오스트리아 제국 동부, 그러니까 헝가리 동부에 있는 카르파티아산맥은 러시아와 헝가리 간의 자연국경으로 둘을 갈라놓는 역할을 했다.
국경지대에 자리 잡은 높은 산맥은 대군이 지나가는 길을 쉽게 열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특히 지금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었다.
이 날씨에 산에 올랐다가는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며 죽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동쪽에서부터 진군하면……. 빈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니 이곳은 포기해야겠군.”
멘시코프는 독일 전역을 오래 끌 수 없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은 원래라면 발칸 전선의 지원군으로 파병되었어야 할 병력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변심으로 독일 전역이 열림으로써 그쪽으로 가야 할 병력을 끌어온 것이기에 최대한 빨리 전역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아무리 늦어도 일 년 안에 오스트리아를 항복시키고 발칸에 있는 파스케비치의 부대와 합류해야 했다.
“수도인 빈까지 최단루트라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유럽전도를 펼쳐놓고 더듬더듬 길을 찾던 멘시코프는 이내 폴란드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카토비체……. 이곳이 있었군.”
이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영토이자 이제는 러시아제국의 영토인 카토비체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역인 보헤미아 지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도시였다.
주변이 험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것과는 다르게 카토비체와 보헤미아의 오스트라바로 향하는 길목은 이렇다 할 장애물이 없는 평야 지대였다.
거기에 이전부터 독일지역의 주요 무역로를 겸하다 보니 이곳에는 여러 대의 마차가 동시에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도로가 구비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으니 대군이 움직이기에도 적격이었다.
다만…….
“적도 이걸 알고 있을 거란 말이지…….”
오스트리아가 조금만 생각할 줄 안다면 이런 요충지에 군대를 배치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이곳에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이곳을 지나려면 프로이센의 영역을 지나거나……. 산악지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느 쪽이건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이곳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지대이기도 했지만, 프로이센과도 국경을 맞댄 곳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군사행동을 벌였다가 프로이센이 뒤통수를 때리면 러시아군은 꼼짝없이 전멸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멘시코프는 이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상부로부터 한 가지 첩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기간에 프로이센의 국경은 열려 있을 것이며 저들은 어떠한 군사적 행위도 하지 않을 것.]
좀처럼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프로이센이 중립을 표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군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니?
그야말로 오스트리아의 등에 칼을 꽂아버리겠다는 프로이센의 강력한 의지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어찌 되었건 러시아에 있어서는 호재였다.
가장 걱정되던 프로이센과의 마찰이 해결되었으니 남은 것은 하나였다.
이곳을 지키는 방어군을 돌파할 수 있을지가 이번 독일 전역의 승패를 가를 것이었다.
* * *
“오스트라바에는 최소한의 국경수비대만이 배치될 예정입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 앞서 열린 국토방위작전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야전 원수인 벨덴 경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런 중요해 보이는 곳에 군대를 최소한으로 배치하겠다는 그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최소한의 병력만 두겠다니? 그러다가 러시아군이 그곳으로 몰려오면 큰일 아닌가.”
“물론 저희 역시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군은 동원 가능한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너무 넓은 지역을 지켜야만 합니다.”
제국군은 오스트리아군 8만 명과 재소집된 헝가리 방위군 13만 명, 도합 약 21만 명의 병력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모든 지역을 지켜야 했다.
숫자 자체로 보면 상당한 대군이었으나 문제는 우리는 이걸 잘게 쪼개어 제국 내로 들어오는 요충지를 지켜야 하는 데 비해 적은 한곳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뚫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런 까닭에 아군 참모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 본 결과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이곳 헝가리 동부지역을 침공하리라 판단했습니다.”
“으음……. 어째서인가?”
“아무래도 전쟁이 장기화하면 필요한 것은 식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저들은 제국 내의 주요 식량 생산지인 헝가리 평원을 점령하여 제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감소시키려 할 것입니다.”
벨덴의 말도 일리가 있었으나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이보게 벨덴 경.”
“예, 폐하.”
“궁금한 것이 있네.”
“얼마든지 물어보시지요.”
“자네는 조금 전부터 러시아가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움직일 것처럼 말하는데……. 그 자신감의 근거가 무엇인가?”
내 말에 벨덴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야 간단합니다. 러시아군이 아무리 강군이고 그들의 영토 역시 방대하다지만 제국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들이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제국 영토로 들어온다면…….”
“아니, 그것이 아니라 러시아군이 폴란드 영토를 통해 보헤미아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 그곳에서 빈까지는 넉넉잡아도 15일 거리잖는가.”
15일 거리면 상당히 가까운 것이었다.
적들이 급속행군으로 빈으로 짓쳐들어온다면 불과 열흘 만에 빈에 도착할 수도 있는 거리였으니까 말이다.
과연 수도가 러시아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최전방의 군대가 열흘 안에 수도로 돌아올 수 있을까?
“폐하, 지금 전황이 저들에게 유리한데 저들이 어찌 그런 도박 수를 던지겠습니까?”
“도박 수라고?”
벨덴은 다시금 지도를 가리키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곳 카토비체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프로이센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그렇군.”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프로이센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러시아군이 우릴 공격하겠다고 대군을 끌고 오면 프로이센이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음…….”
내가 생각하기엔 가만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프로이센을 공격하지 않을 텐데 굳이 러시아를 건드려서 손해 볼 것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를 대놓고 말했다가는 벨덴이나 군부를 대놓고 모욕하는 것이었기에 유순하게 살짝 돌려서 물었다.
“만약 그들이 가만있다면 어찌 되는가?”
“으음……. 프로이센이 가만히 지켜본다면……. 아군에게는 크나큰 재앙이 되겠지요. 현재 제국군은 이쪽 방면으로 돌릴 병력이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흠…….”
내가 말이 없어지자 벨덴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달래려고 애썼다.
“폐하께서 무얼 걱정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프로이센과 제국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는 해도 저들과 우리는 같은 독일인이자 독일연방의 소속국입니다.”
“그러니 저들이 가만히 지켜보진 않을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좀처럼 불안감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결국 벨덴경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폐하께서 그리 걱정되신다면 옐라치치 장군의 크로아티아 사단을 그쪽에 배치하겠습니다.”
“옐라치치……. 그자라면 믿을 만하지.”
크로아티아 사단이 보헤미아 쪽으로 옮겨지면 다른 곳을 방어선이 조금 얇아지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감수할 만한 손해였다.
[그리고 부올을 프로이센에 보내서 저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도 알아보는 게 좋겠군.]
‘좋은 생각이군요. 영감님.’
거기에 영감님의 조언까지 이어지니 조금 전까지 내 가슴을 옥죄어오던 불안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 * *
그렇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각자 전쟁 준비를 서두를 동안 프로이센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전하, 헤센과 하노버, 그리고 작센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이로다.”
독일연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북독일연방을 만들려던 시도가 러시아의 간섭으로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프리드리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비스마르크를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지난 러시아의 간섭으로 인해 멀어졌던 하노버와 작센, 그리고 헤센과의 관계를 다시금 정상화했다.
그리고 러시아에 있던 대사로부터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간의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바로 밀사를 파견하여 러시아와 비밀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녀석들이 뒷공작으로 재미를 볼 때, 자기네들도 피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프리드리히의 말에 어느덧 프로이센의 주요외교관으로 성장한 비스마르크가 답했다.
“왕국 내에서 암약하던 오스트리아의 간첩들도 전부 제거했으니 저들은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으음……. 그렇게나 많을 줄 상상도 못 했네.”
빈에서 열린 연회 이후 비스마르크는 허겁지겁 프로이센으로 돌아와서는 프리드리히에게 왕국 내에 암약하는 오스트리아의 간첩들이 존재함을 알렸다.
당연하게도 이에 놀란 프리드리히는 왕국 내부를 샅샅이 뒤져서 오스트리아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자들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거나 작위를 회수당했다.
비스마르크는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마수에서 벗어났다고 안심했으나 정작 제국의 황제는 프로이센에 간첩을 보낸 적도 없었다.
결국에는 제살깎아먹기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왕의 비호를 받고 이뤄진 대규모 인사이동은 프로이센 왕국의 이득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정계와 군부를 주름잡던 원로 중에 나이를 채우고도 자리를 지키던 이들이 일거에 숙청당했으며 오스트리아와 연계가 있던 이들이 깡그리 쓸려 나가면서 오스트리아와 합친 독일통일을 주장하던 대독일주의 역시 사그라들었다.
거기에 비어 있는 자리는 능력이 있으나 자리가 없어 위로 올라오지 못했던 이들이 대신하게 되었으니 왕국의 혼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이번 전쟁으로 오스트리아가 큰 피해를 볼 것이고 저들은 폐허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부를 정비하여 저들과 일전을 벌일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이제 무기와 탄약공장이 완성되고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5년 후면 오스트리아와 결전을 벌여 독일통일을 완수할 수 있을 겁니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프리드리히는 자신만만한 비스마르크의 계획을 전해 듣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시종을 내보내더니 둘만 남게 되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자네가 내게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했었지, 그렇기에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그들과 적대하지 않기로 약속을 맺었고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단 말일세, 어째서 프랑스나 영국 같은 서구권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라는 것인가?”
프리드리히의 질문에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어조로 설명했다.
“현재 프로이센은 러시아라는 강대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동부국경지대는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지요.”
“그렇지, 그렇기에 우리 프로이센이 언제나 국방을 최우선과제로 삼는 것이 아닌가.”
“예, 그런데 이후에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통일이 완수된다면 우리는 프랑스와도 국경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쪽으로 두 개의 강대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는 것이지요.”
비스마르크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했다.
“이렇듯이 유럽의 두 강대국 사이에 끼게 된 우리 왕국은 양쪽으로 군사력을 투사해야 할 것이니 국방비의 압박이 심해질 것이며 그에 따라서 내부에 가해지는 부담도 가중되겠지요.”
“그러니 지금부터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다지는 것이 향후 프로이센에 도움이 될 것이란 말이로군.”
“예, 당장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시간을 번다……. 시간을 번 다음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지?”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물음에 왕국 외무성의 일개 외교관인 비스마르크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독일민족의 과업을 완수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