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64화
보다 먼 곳으로
이미 전투준비를 마친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군이 동원령을 끝내기 전에 수도를 점령하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독일 원정군의 사령관인 멘시코프는 우선 부대를 둘로 나누어 주공과 조공을 분리했다.
멘시코프가 이끄는 주공은 처음에 계획했던 것처럼 폴란드 남부의 카토비체에 집결했다.
사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프로이센군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고 그저 방관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러시아군은 착실하게 오스트리아 침공을 준비했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크라쿠프, 오스트라바를 거쳐 빠르게 빈까지 직행.
황제를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이 토틀레벤 백작이 지휘하는 조공의 역할이었다.
“토틀레벤 백작.”
“예, 각하.”
“자네의 부대는 카르파티아산맥에 적극적으로 공세를 가하면서 적의 전선을 위협하며 적들의 시선을 끌어줘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토틀레벤 백작이 지휘하는 조공은 오스트리아군의 주요 방어선으로 예상되는 카르파티아산맥 방어선을 집중적으로 두들기며 적을 위협해야 했다.
그래야 저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것이고 폴란드 쪽에 집결하는 주공을 그저 시선을 돌리기 위한 부대쯤으로 여길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저들이 방심하며 보헤미아로 들어가는 길목을 비워뒀을 때.
“본대가 움직일 것이네.”
* * *
지난주 상부에서 급하게 내려온 명령을 받고 동부로 향하던 옐라치치의 부대는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보헤미아 지방으로 이동해야 했다.
덕분에 사소한 혼란이 있었지만, 부대를 잘게 나누어 행군하는 다른 부대와는 달리 모든 병력이 대로를 타고 이동했던지라 혼란은 빠르게 수습됐다.
“쯧……. 갑자기 보헤미아는 왜 가라는 건지 원.”
“아무래도 그쪽 전선에 구멍이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멍?”
옐라치치는 부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보헤미아는 수도인 빈에서 제일 가까운 지역인데 설마 수뇌부가 그런 중요한 곳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겠나?”
“하긴……. 그렇겠군요.”
“우릴 그곳에 보내는 건 그냥 우리에게 더는 공을 세우게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일 뿐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지난 내전에서 우리가 활약했으니 우리 동족들이 어느 정도 자치권을 얻으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니 또 견제하는 것이지.”
옐라치치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긴 하지만 내각의 수장인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나 군부의 수장인 벨덴 경은 소수민족의 목소리가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들이 충성스러운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소수민족이 목소리를 높일수록 제국이 혼란스러워졌으니 말이다.
옐라치치도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얻어내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부대는 안전한 후방으로 가는 것이니 전쟁 동안 아무런 걱정 없이 시간만 버리면 될 일이었다.
“쯧…….”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냥 참고 넘어갈 수 있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보헤미아에 도착해 보니 이게 웬걸? 현장의 상황이 뭔가 이상했다.
“국경 근처에서 대규모 러시아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적군을 직접 보진 못했나?”
“그것까진 확인하지 못했으나 도로를 따라 난 무수한 발자국 흔적들과 그들이 버리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모닥불 흔적으로 미루어볼 때 적잖은 숫자임은 확실합니다!”
“흠…….”
버릇처럼 주변에 정찰병을 풀어놓았는데, 이게 의도치 않은 정보를 물어왔다.
이런 후미진 곳에 적의 대군이라니?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정보였다.
그렇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저들의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아니, 대략적이라도 규모를 파악해서 내게 보고할 수 있도록.”
옐라치치는 이번에는 더 넓은 지역에 정찰병을 촘촘하게 흩뿌려 적의 정확한 규모와 이동 경로를 관측했다.
이전에 보고받은 것이 단순히 정찰병의 착각임을 바라면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상부에 보고를 올려야 하나?’
지금 보고를 올린다면 저들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들이 주공이 아니라면?’
지금 제국군은 예비대 하나 없이 빡빡하게 군대를 운용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보고를 본 총사령관 벨덴 경이 보내올 지원군은 다른 방어선에서 빼낸 병력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만약 저들이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라면?
그럼 다른 쪽 방어선이 뚫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찰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겠지……. 늦지 않아야 할 텐데.”
그리고 며칠 뒤, 정찰병이 다급한 소식을 전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저들이 보유한 군기의 숫자로 미루어보아 숫자는 최소 10만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맙소사…….”
옐라치치는 그들이 러시아군 본대임을 확신했다.
그러고는 바로 수도인 빈에 전보를 부쳤다.
[긴급 러시아군 주력 카토비체 집결, 지원 바람.]
짧은 전보 문구였지만 사령부를 발칵 뒤집어놓기엔 충분한 내용이었다.
전보를 받은 사령부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벨덴경은 어떻게든 방어선에서 병력을 빼내어 그곳을 틀어막고자 했지만, 전선의 지휘관들이 명령을 거부했다.
[불가, 방어병력 부족.]
[병력 부족.]
[예비대 없음.]
특히 헝가리 방위군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헝가리인은 헝가리에 제국은 제국에.]
이 짧은 문장만으로 그들이 제국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사령부에서는 난리가 났고, 말이다.
“러시아 놈들이 오스트라바까지 밀고 들어올 동안 국경수비대는 무얼 했단 말이오!”
“이렇게 된 이상 헝가리 방위군이 다른 생각을 품기 전에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야 하오!”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면 전선의 빈 곳을 어떻게 채우려고 그러시오!”
“그건 새롭게 병사를 징집하여…….”
“이제 막 끌어모은 청년이 총탄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대열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소?!”
덕분에 벨덴의 한숨은 깊어져만 갔고 나 역시 싸우기만 하는 참모들을 보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다들 그쯤 하게, 지금 이 자리는 자네들끼리 싸우라고 판을 깔아준 것이 아니라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못해 한마디 하니 서로 언성을 높이던 참모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번잡했던 분위기를 바로잡으며 흥분한 이들을 진정시킬 수는 있었다.
“다른 곳에서 부대를 빼 올 수 없다면 병력을 새로 모집할 수는 없겠나?”
내 질문에 벨덴 경을 비롯한 참모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다들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폐하, 지금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긴 했지만 당장 새로운 부대를 운용 가능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서너 달은 걸릴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그냥 병사들에게 총만 쥐여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군사훈련을 받을 때……. 그러니까 한국에서 훈련소를 갔을 때만 하더라도 정작 훈련 기간은 한 달 정도가 끝이었고 그 이후에는 곧장 최전방에 끌려갔다.
물론 시대가 다르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폐하께서 그리 명령을 내리신다면야 못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군대의 전투력이 상당히 약화할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병사 간에 서로 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이 다르다?”
“예,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현재 제국 내에서 사용되는 언어만 하더라도 수십 가지가 넘습니다.”
“그렇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처리했던 서류는 전부 독일어로 적혀 있었기에 그게 얼마나 불편한지는 체감해 본 적은 없었다.
서로 말이 다르다기에 지방마다 사투리가 조금 강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장교들이야 독일어가 필수이니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만……. 부사관이나 병사들로 내려가면 제법 문제가 심각합니다.”
“얼마나 심각하기에 그런 것인가.”
“……같은 지역이나 비슷한 지역 출신이 아니라면 서로 말이 아예 통하질 않습니다.”
“……?”
아예 안 통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아무리 제국이 넓다고 하지만 그건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 심각한 경우는 같은 지역 출신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독일어를 주로 사용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을 선발하려다 보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잠깐.”
벨덴 경은 지금 독일어를 주로 사용하는 이들을 징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제국군의 주류는 독일계라는 뜻이었고 내가 기억하기로 현재 제국 내에서 독일어를 주로 쓰는 독일계는 전체 인구의 12~14% 정도였다.
그럼 나머지는?
“마자르인이나 슬라브인은 징집하지 않는 건가?”
“일단 헝가리인은 헝가리 총독과 헝가리 방위군 쪽에서 알아서 처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슬라브인은……. 헝가리보다 충성심이 의심스러운지라…….”
“으음…….”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슬라브인을 배제한다면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수도를 향해 밀고 들어올 러시아군을 막을 만한 병력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그럼 이대로 저들이 빈으로 쳐들어올 때까지 넋 놓고 지켜봐야 하는가?”
“……옐라치치 장군에게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시간을 번 다음은? 그다음이 없잖은가.”
벨덴 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대책을 물어본 것인데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떨군 그의 모습에 절로 화가 났다.
“자네도 대책이 없는 건가?”
“……아무래도 빈을 버리시고 좀 더 안전한 잘츠부르크나 베네치아로 대피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나보고 도망을 가라는 것인가?”
“폐하의 안전을 위함입니다.”
“내 안전을 생각한다면 나보고 대피하라기보다는 러시아군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나 내놓게.”
빈은 지난 2년 동안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집중적으로 산업을 육성한 도시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산업시설이 빈과 그 인근 지역에 몰려 있는데, 이곳을 버리게 되면 제국의 전쟁 수행능력은 급감하게 될 것이었다.
그뿐인가?
또 이 피해를 복구하겠다고 몇 년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은 지켜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당장 수도를 지키자고 동부의 방어선을 무너뜨릴 수도 없었고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징집하여 부대를 꾸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작전사령부의 참모들은 이렇다 할 대책도 내놓질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머리가 아팠다.
‘영감님, 좋은 생각 없으세요?’
[으음……. 이런 상황에서는 자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군.]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러니까 아무 의견이라도 좋으니까 생각하신 것 없으세요?’
[흠……. 우선 영국과 프랑스에 이 소식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떻겠나?]
‘그쪽에 도움을 청하는 동안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을 것 같은데요.’
지금 그들에게 전보를 부친다고 해도 프랑스는 내부사정으로 바빴고 영국은 전쟁 준비가 덜 끝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만약에 영국이 우릴 도와줄 수 있다고 해도 저들의 군대가 대서양을 빙 돌아오는 동안 러시아군은 빈에 입성했을 가능성이 컸다.
“후우……. 다들 고생 많았네, 이만 물러들 가게.”
“폐하…….”
“물러가라고 했네.”
결국, 회의는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내 깊은 한숨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다들 우르르 나가버리고 텅 빈 회의실에 홀로 남아 있으니 갑갑하기만 했다.
“헨리, 나갔다 올 테니까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원래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러시아군이 빈을 향해 밀고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대뜸 도로를 닦으면서 자동차를 타고 달려올 게 아니라면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바람을 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힐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