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67화
귀향
괴르게이를 헝가리로 보내는 것과 동시에 나는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으로 부를 수 있을 만한 국가들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제 막 원정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프랑스는 내부소요로 인해 병력을 더 동원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스만에서는 당장 방어에 전념하느라 이곳에 지원을 보낼 만한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거긴 애초에 별 기대도 없었네.”
전쟁으로 인한 업무증가와 스트레스가 겹쳐 요 며칠 사이 부쩍 늙은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독일연방 내의 다른 국가들 역시 비슷합니다.”
“평소에는 다들 꼬리를 흔들더니만…….”
내심 독일연방의 다른 국가들은 우리를 도와주리라 생각했건만 그들 역시 우릴 버렸다.
개중에 몇몇은 아예 우리 쪽과의 외교라인을 끊고 프로이센에 달라붙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프로이센에서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고 했었나?”
“예, 아무리 러시아가 기습적으로 빈 곳을 찔러왔다지만 무언가 이상하여 조사해 보니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비밀리에 결탁한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그 둘이 손을 잡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러시아의 침공에도 나라가 휘청거리는데, 이젠 프로이센까지 밀고 들어오면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손을 잡긴 했으나 군사동맹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진 않습니다. 단순히 서로 간에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불가침……. 그렇다면 이번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상황을 관망하겠다는 뜻이로군.”
“예, 하지만 저들이 러시아군에게 국경을 개방한 정황도 보이는지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국경을 개방했다고? 아!”
그제야 사건의 윤곽이 보였다.
러시아군이 쳐들어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되어 있었는데, 저들은 대뜸 주요 카르파티아 산맥이 아니라 폴란드 지역을 통해 오스트라바로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뭔가 이상했다.
“그래……. 저들이 러시아령 폴란드 영토에서 우리 쪽으로 밀고 들어오려면 오스트라바가 아니라 크라쿠프를 공격했어야지!”
거기에 러시아 쪽에서 우리 영토로 들어오는 길목은 북부 카르파티아 산맥지대가 자리했다.
그런데도 저들은 북부의 산맥이 끊겨있는 오스트라바를 향해 밀고 들어왔다.
러시아의 대군이 우리 군의 시선을 피해 산맥을 뚫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크라쿠프에서는 오스트라바가 함락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평화로웠지요.”
[프로이센의 늙은이가 머리를 썼군.]
“젠장……. 망할 프로이센 녀석들!”
결론은 하나였다.
프로이센이 우리 뒤통수에 칼을 꽂았다.
“…….”
내 뒤통수를 친 프로이센 놈들보다 이런 걸 눈치도 못 채고 그들을 믿고 있었던 나에게 화가 났다.
아무리 양쪽 국가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저쪽에서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 화가 났다.
“폐하, 지금 화가 많이 나신 것은 잘 알지만, 지금은 분노를 억누르시고 상황을 냉철히 판단하셔야 합니다.”
“으음……. 그래, 그렇지.”
공작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그저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프로이센 놈들을 혼내줘야 했다.
“으음…….”
하지만 여태껏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는데, 잠깐 고민 좀 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겠는가?
그렇게 공작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몰려오는 러시아군을 막을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책상 한쪽에 치워뒀던 로마공화국의 외교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흠……. 그러고 보니 이들이 자신들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했었지.”
“폐하, 그들과 가까이 지낼수록 프랑스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유념하시지요.”
“알고 있네.”
지금 프랑스와 사이가 틀어져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대충 한 곳에 치워두려던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잠깐……. 내가 그걸 어디에 뒀더라?”
“폐하?”
분명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란이 끝나고 헝가리인들과 함께 제국군에 맞서 싸운 폴란드군에 대한 자료를 봤던 기억이 있다.
분명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들은 지금…….
“여깄다!”
이탈리아에 있었다.
그것도 로마공화국에 말이다.
* * *
지난 헝가리혁명 시기에 괴르게이와 여러 헝가리 장교들의 반발에 밀리고 혁명이 실패하여 이탈리아로 망명한 뎀빈스키와 폴란드 군단은 현지에 정착하여 나름대로 괜찮은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에 전쟁이 터졌을 때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일 년이 훌쩍 지나가는 지금에서는 그런 희망을 버렸다.
이제는 다들 총이나 칼보다는 농기구나 공구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을 때쯤.
한적한 시골에서 밭을 갈던 뎀빈스키에게 그의 오랜 친우인 요제프 벰이 찾아왔다.
“하하, 폴란드의 영웅께서 밭이나 갈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또 다른 영웅께서는 당나귀를 타고 다닐 것이라고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하하하!”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웃으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보답으로 우유 두 병과 달걀 한 꾸러미를 선물로 받았다네.”
“허허……. 병사를 지휘하던 자네가 이제는 닭들이나 돌보고 있을 줄이야.”
“옛날이야기는 그만하게, 해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 뭘 그리고 신나서 떠들어대는가?”
뎀빈스키의 핀잔에 벰은 허허 웃으며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자네는 이런 곳에서 썩고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잖은가?”
“자네가 나를 고평가해 주는 것은 고맙네만 아쉽게도 나는 이런 곳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네.”
뎀빈스키는 그리 말하며 소똥 내음이 진득하게 배어 있으며 겉에는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작업복을 보여줬다.
하지만 벰은 다시금 그에게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마치니에게 사람을 보내 폴란드 군단의 귀환을 허락했네.”
“허, 제깟 놈이 무슨 자격으로 허락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건가? 우습군.”
뎀빈스키는 코웃음을 쳤다.
“황제가 자네에게 나를 데려오면 오스트리아 귀족작위라도 쥐여준다고 했던가? 그랬다면 참으로 실망할 것 같네만.”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는 나를 어찌 보고……!”
“아니라니 다행이로군. 하지만 이건 알아두게, 난 오스트리아로 갈 생각이 없어.”
뎀빈스키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쟁기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허, 이 사람아! 내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자고 자네를 찾아왔을 것 같은가? 우리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네!”
“허, 제깟 놈이 뭐라고 우릴 폴란드로 돌려보내느니 마느니 하는 건가?”
뎀빈스키는 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랜 친우이자 동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말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놈들은 프로이센, 러시아와 손을 잡고 우리 조국을 나눠 가진 원수임을 잊은 건가?”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
벰의 말에 뎀빈스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그간 여러 번의 실패를 겪으면서 조국 폴란드의 독립에 회의감이 들었는데, 그의 친우는 어떠했겠는가?
뎀빈스키는 황제를 믿지 않았다.
“자네는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잖나!”
그의 친우는 그리 말하며 뎀빈스키의 손에 들린 쟁기를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세, 다 함께!”
친우의 제안에도 묵묵히 허리를 굽혀 쟁기를 주우려던 뎀빈스키는 문득 자신의 손에 시선이 갔다.
오랜 야지 생활로 투박하며 이곳저곳이 갈라져 있으며 이제는 쭈글쭈글해져 버린 못생긴 손.
젊었을 적 폴란드의 영웅인 포니아토프스키 공에게 군인답지 않게 손이 곱다는 칭찬을 들었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추레해진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나이 열여덟에 처음으로 군에 입대하여 유럽을 주름잡았던 프랑스의 황제를 따라 러시아와 독일을 누볐고 그의 몰락을 지켜봤으며 폴란드의 희망이 사그라드는 것까지 봤다.
그 이후 희망을 이어가고자 동지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섰지만, 러시아를 이겨내지 못해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조국 폴란드를 떠났다.
중간중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세월이 지날수록 그를 비롯한 여러 동지는 늙어만 갔다.
앳된 신병은 어느덧 중년의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있었고, 그 역시 올해로 예순한 번째 생일을 맞이하며 노병이 되었다.
이제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노후를 함께할 가족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쳤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초라한 집과 작은 밭 한 뙈기뿐.
이는 그의 유일한 친우인 벰도 그러했다.
하지만 마음이 꺾인 자신과는 다르게 벰은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가자며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후우…….”
뎀빈스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속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끄집어낼 듯이 숨을 내뱉고는 이내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미리 밭을 갈아놓아야 내년 농사가 편한데 말이야.”
“이런 척박한 이탈리아 땅보다는 비옥한 고향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게 더 좋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지.”
뎀빈스키는 쟁기를 대충 내팽개치고는 입고 있던 작업복 상의를 벗어서는 그대로 거름통에 던졌다.
“잠깐만 기다려주겠나?”
“얼마든지.”
그러고는 곧장 집으로 뛰어 들어가 옷장 한쪽에 고이 모셔둔 자신의 옛 제복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금고에서 폴란드의 주인이자 영웅이었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에게 받은 훈장까지 꺼내 들었다.
[조국에 대한 자네의 헌신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걸세, 그러니 자랑스러워하게.]
폴란드의 영웅이자 그의 주인께서 마지막 전투를 앞두시고 자신에게 선사한 훈장을 매달았다.
[대위, 언제나 희망을 잃지 말게나 이 전투에서 우리가 패했다고 해도 자네와 전우들이 살아 있는 한 자네 조국 역시 다시 돌아올 걸세.]
그러고는 프랑스의 황제에게 하사받은 기병도를 꺼내 허리춤에 달았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한 뎀빈스키는 오랫동안 정들었던 집을 박차고 나왔다.
“오래 기다렸나?”
“내게 묻는 건가 아니면 조국의 동포들에게 묻는 것인가?”
벰의 장난기가 어린 농담에 뎀빈스키는 씩 웃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지.”
* * *
로마공화국 집정관이자 삼두정권의 일원인 주세페 마치니는 구름처럼 모여든 폴란드인들을 보고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정도로 많이 모일 줄이야…….”
“폴란드인들이 그만큼 고향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으음…….”
지난날 오스트리아의 황제로부터 지원요청을 받고 형식상 폴란드인들에게 공문을 돌린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이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탈리아로 피난 온 폴란드 군단 대부분이 자신의 옛 무기와 군복을 꺼내 들고 로마로 모여서는 오스트리아로 보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닌가.
“가고 싶다면 보내주기야 하겠지만……. 굳이 장군께서 가실 필요는 없잖소.”
거기에 로마공화국의 거의 유일한 지휘관이자 장군인 가리발디 역시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오스트리아로 보내줄 것을 청했다.
“지금 공화국은 오스트리아에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니 이를 적절히 청산해야 할 것이오.”
“으음……. 그건 맞긴 하지만…….”
가리발디의 말처럼 로마공화국은 교황령에서 공화국선포 이후부터 엄청난 경제위기와 인플레이션, 그리고 외부의 침략 위협까지 겪었다.
그렇게 내부위기와 프랑스의 위협으로 무너지기 직전, 오스트리아의 도움으로 겨우 공화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가리발디는 추후에 이를 명분으로 오스트리아가 간섭해 올 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의 지원요청에 다소 무리해서라도 저들을 돕고자 결심한 것이었다.
“공화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힘을 쏟는다고 해도 저들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소.”
“그러니 더더욱 오스트리아로 향해야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저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머릿속 깊이 각인시켜야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마치니는 잠시 고민하며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그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니 더는 말릴 수가 없겠구려……. 그럼 가서 이탈리아 청년들의 기개를 오스트리아인들의 뇌리에 단단히 새겨주고 오시오.”
“알겠습니다.”
가리발디는 그리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