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68화
계획
처음에 폴란드 군단이 오스트리아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저 우리의 병력 부족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고 방어선을 보강해 줄 만한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저들이 오스트리아로 올지…….”
공작은 의문을 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매우 급한 만큼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생각으로 요청서를 보낸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당신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요?”
“……자네는 누구인가?”
로마공화국에 지원요청을 보낸 지 정확히 이 주 정도 지났을 때, 수많은 병사가 폴란드와 로마공화국의 삼색기를 휘날리며 빈에 도착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폴란드 군단의 여러 동지를 대표하여 폐하의 앞에 선 헨리크 뎀빈스키라고 합니다.”
“헨리크 뎀빈스키라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에 머리를 살짝 굴려보니 영감님이 한숨을 내쉬며 내 귀에 속삭여주셨다.
[지난 헝가리에서의 전쟁 당시에 헝가리군을 이끌던 폴란드인 사령관일세.]
“아! 그때, 그……?”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 중에서 가장 무난한 것을 고르려 했지만 하나같이 험악한 것뿐인지라 쉽사리 고를 수가 없었다.
“흠흠……. 그때 자네가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전해 들었네만……. 아직 살아 있을 줄 몰랐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도 폴란드인의 자유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뎀빈스키는 은연중에 폴란드의 자유를 언급하며 내 의중을 떠보려고 했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자네들이 제국군과 함께 싸우는 한 나는 그대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야.”
“그렇다니 다행이로군요.”
내 대답이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뎀빈스키는 자신의 동지들을 돌아보고는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폴란드 군단의 병사들 역시 우렁찬 목소리로 내게 경례를 올렸고, 말이다.
그렇게 모인 병력이 만 명 정도였다.
폴란드 군단은 군단이라는 이름값과는 별개로 규모 자체는 한 개 사단급도 안 되었고 로마공화국의 군대는 일개 대대 수준일 뿐이었다.
이 정도로는 러시아의 대군을 막기는커녕 방지턱도 못 할 수준이었다.
“이대로 보냈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는데…….”
“……급한 대로 라데츠 백작에게 훈련 중인 병력을 맡겨 저들과 함께 보내심이 어떻겠습니까?”
“라데츠?”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지난 사르데냐와의 전쟁 당시에 이탈리아 전선을 맡아 승리를 가져다준 장군이네, 라데츠키라고 부르기도 하지.]
영감님의 말을 들으니 뭔가 좀 떠오르긴 했다.
가끔 오가며 얼굴도 몇 번 마주치고 훈장 서훈식에도 참가했었던 기억이 났다.
“라데츠 백작은 나이가 좀 많지 않은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올해로 그의 나이라 아흔 살에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했다.
아흔 살이면 현대에도 오래 살았다는 소리를 듣는데, 평균수명이 마흔을 못 넘기는 이 시대에 아흔 살이면 무지막지하게 오래 산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공작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만한 군데를 지휘해 본 경험을 가진 장군 중에 남아 있는 분이 그분뿐입니다.”
“흠…….”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모든 제국군을 카르파티아 산맥에 배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그쪽에 있는 장교들을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라데츠 백작을 불러오게.”
* * *
라데츠의 백작 요제프 라데츠키.
그는 내 할아버지……. 그러니까 영감님의 할아버지이시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셨던 프란츠 2세 때부터 군에서 활동하던 군부의 원로였다.
그동안 그가 세운 공적만 하더라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오죽하면 그가 지휘한다는 사실만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장이라고 하더라도 흘러가는 세월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려 라데츠 백작.”
“예, 그동안 몸이 좋지 않은지라 집에서 조용히 쉬었던 탓에 폐하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굳이 몸도 불편한데 힘들게 궁전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다네.”
라데츠키의 몸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탓인지 혈색도 좋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기운이 없었다.
‘영감님, 혹시 라데츠 백작은 곧 죽나요?’
[흠……. 본인이 기억하기론 아흔 살까지는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네.]
‘아흔 살이라면…….’
이제 많아봤자 5~6년 정도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손주 재롱이나 보며 노후를 보내야 할 사람이 마땅한 인력이 없어 전쟁터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그에게 미안한 마음 이들이었다.
“흠흠……. 자네도 오기 전에 대강 상황을 전해 들었겠지만 지금 전황의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라네.”
“예, 펠릭스 공에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빠르겠군……. 후…… 자네에게 별도의 병력을 맡길 것이니 그들과 함께 러시아군을 무찔러줄 수 있겠는가?”
염치없는 내 부탁에도 늙은 장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기운차게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우리의 고향을 침범한 적들은 곧 폐하의 발밑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라데츠키는 러시아군을 무찌르라는 내 명령을 듣고도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마치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 * *
그렇게 고향을 떠나 유럽을 방랑하던 폴란드 군단과 로마공화국의 가리발디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 그리고 소수의 오스트리아 민병대로 구성된 연합군이 보헤미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수십만 러시아군에 비해 숫자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난 세월 동안 각자의 민족과 국가를 위해 전쟁터를 전전하며 경험을 쌓은 훌륭한 병사들이었다.
거기에 수십 년간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던 폴란드 군단의 수장 헨리크 뎀빈스키와 요제프 벰과 혁명 때부터 지금까지 붉은 셔츠단을 이끌었던 주세페 가리발디가 그들을 지휘했다.
그들은 서로 말이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각자의 민족을 위해 싸운다는 점을 공유하며 높은 사기를 유지했다.
“현재 러시아군은 정면에 있는 작은 동산 너머에 있는 마을과 브르노에 걸쳐 넓게 퍼져 있습니다.”
“듣기로는 러시아군은 브르노를 통과하여 곧장 빈으로 향하려던 모양인 듯합니다.”
“대군이 넓게 퍼져 있는 상황에 저들은 예상치 못한 우리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겠군요.”
“그럼 브르노에 있는 병력과 연계하여 저들을 사방에서 들이친다면 알아서 무너지겠군요.”
뎀빈스키와 가리발디는 러시아군이 갑작스러운 연합군의 등장에 크게 당황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니 병력을 잘 분배하여 사방에서 러시아군을 들이치면 순식간에 무너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데츠키의 생각은 달랐다.
“러시아군은 일점돌파를 시도하여 아군을 둘로 가르고 각개격파할 생각일 것이네, 그러니 부대를 나누기보다는 한데 뭉쳐 저들의 공격을 맞받아쳐야 하네.”
명목상으로 연합군을 이끄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장군인 라데츠 백작이었지만 다들 전장에서 한가락 하던 인물이었던지라 혹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라데츠키가 한창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총독으로 있을 때, 강압적인 통치로 동포를 괴롭혔던 것에 원한을 품고 있던 가리발디는 그의 말을 비웃었다.
“이보시오 라데츠 백작, 우리 군은 러시아가 눈치채기 전에 기습적으로 이 지역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저들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도 몰랐을 테니 크게 당황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잖소.”
가리발디의 말에 라데츠키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물었다.
“맞는 말이네, 하지만 자네는 이런 대군을 이끌어본 경험이 적어 모르는 것 같군. 자네가 말하는 그 혼란이 얼마나 갈 것 같은가?”
“……그야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은 가겠지요.”
“십 분에서 이십 분이면 충분하네.”
“?!”
라데츠키는 당황한 가리발디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지도 위에 있는 작은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부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부대를 응집하여 저들에게 불리한 전장을 강요하는 것이네.”
“잠깐……. 아무리 그래도 십 분은 말이 안 됩니다. 병사들이 그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왜 그 사실을 병사들에게 알려야 하지?”
“그게 무슨……?”
라데츠키의 반문에 가리발디는 할 말을 잃었다.
“병사들은 내가 목표를 가리키면 멈추라는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진 움직이기만 하면 그만일세.”
“…….”
“그러니 예상치 못한 적들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걸세.”
“오스트리아의 병사들이 불쌍하군요.”
“그게 자네가 끌고 다니는 동네 자경단과 군대의 차이점이지.”
라데츠키의 말에 자기 생각을 모조리 부정당한 가리발디의 얼굴이 붉어졌으며 이를 지켜보던 뎀빈스키는 멋쩍은 미소를 흘리면서 이마를 긁었다.
“이쯤 하시지요. 지금 우리는 러시아군을 물리치기 위해 모인 것이지 서로 설교나 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잖습니까.”
“미안하군. 설명을 계속해도 되겠는가?”
뎀빈스키는 슬쩍 가리발디를 돌아봤다.
그는 무척이나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회의장을 떠난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분노를 삭이려는 듯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시지요.”
“자……. 그래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곳에 있는 우헤르치체를 비롯한 인근의 언덕을 저들보다 먼저 선점하여 저들을 한곳으로 몰아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네.”
“잠깐.”
라데츠키의 설명이 계속되던 와중에 가리발디가 다시금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고지를 선점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면 러시아군이 결전을 피하여 우릴 지나치려 들지 않겠습니까?”
“흠……. 그럴 수도 있겠군.”
라데츠키는 미처 그런 것은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다시금 지도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번엔 뎀빈스키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겠군요. 러시아군은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건 말건 절대로 우릴 우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가?”
“제 인생에서 러시아에 맞서 싸운 날들이 그렇지 않은 날들보다 많으니 그들의 심리 정도야 어느 정도 꿰뚫고 있습니다.”
뎀빈스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러시아군은 제국군의 지연전에 걸려서 제대로 된 전투는 해보지도 못하고 손해만 입었으니 아주 단단히 화가 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라데츠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저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인가?”
“아직 말이 끝난 것이 아니니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마시고 조금만 더 들어보시지요.”
가리발디의 핀잔에 라데츠키는 입을 다물었다.
딱히 화가 나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아무튼……. 러시아의 군대는 황제의 군대입니다. 그리고 현재 넓은 동토를 다스리는 러시아의 황제인 니콜라이는 상과 벌이 분명한 인물이지요.”
뎀빈스키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라데츠키와 가리발디를 번갈아 봤다.
“그러니 현재 러시아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발칸반도 쪽과는 달리 이렇다 할 공적을 세우지 못해 상당히 초조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조금 피해를 보더라도 우리를 확실하게 제압하고 빈으로 향할 것이라는 말이로군요.”
“으음……. 적이 공을 세우려 한다…….”
라데츠키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뎀빈스키의 말은 그럴듯했다.
거기에 아군의 숫자는 적보다 훨씬 적었으니 러시아의 사령관도 더 적극적으로 파고들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고지를 점령하는 것뿐만 아니라 브르노에 있는 아군에게 연락하여 그들과 연대를 강화해야겠군.”
라데츠키의 말에 가리발디와 뎀빈스키도 머릿속으로 전장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연합군이 러시아군의 주력부대를 막아서며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을 동안 아군과 연락을 주고받은 옐라치치의 부대가 저들의 뒤를 후려치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