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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69화 (69/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69화

산사태

뎀빈스키의 말처럼 러시아군을 지휘하는 멘시코프 중장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피해만 누적되는 현 상황에 불만이 많았다.

“브르노를 지나쳐 가려 하니 새로운 적군이 우리 앞을 틀어막았다?”

“예…….”

“그들은 어디에서 온 부대인가? 영국? 프랑스? 그것도 아니라면 사르데냐?”

멘시코프는 오스트리아가 급하게 외부병력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간파했다.

보헤미아의 제국군이 아군의 발목을 붙잡고 제법 시간을 끌었다지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가 외국에서 지원병을 받아온 것이라 판단했고 그들의 정체를 대충 짚었다.

하지만 부관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자면……. 오스트리아군의 깃발과 폴란드의 깃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 하양, 빨강의 삼색기를 확인했습니다.”

“폴란드군에 삼색기……?”

멘시코프는 잠시 가만히 상황을 정리했다.

‘폴란드 깃발이라면……. 분명 지난번에 폴란드에서 도망쳤던 반역자들이 분명한데……. 그들이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다고?’

지금 폴란드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지만 오스트리아 역시 러시아와 손을 잡고 폴란드 왕국을 나눠 가지지 않았던가?

그들이 보기에는 러시아나 오스트리아나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왜 오스트리아 놈들과……?’

그렇기에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그들은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우는 것인가?

그들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모르겠군.’

멘시코프는 자신의 고민이 전제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그만두고 적군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대략 8개 연대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략 2만 명에서 2만5천 명이라는 말이었는데, 상당한 숫자였다.

“상당한 숫자로군.”

러시아군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규모였지만 브르노를 우회하여 빈으로 들어가려던 멘시코프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기엔 충분한 병력이었다.

덕분에 단번에 수도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겠다는 멘시코프의 계획은 크게 어긋났으니 말이다.

점점 자신이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가자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하던 멘시코프도 초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본래 그의 계획대로였다면 자신의 부대는 이미 빈을 점령하고 헝가리왕국으로 진격하고 있어야 했다.

“변수가 너무 많군.”

“각하, 차라리 브르노로 회군하여 그곳에 있는 요새를 점령한 다음 천천히 지원군을 상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앞을 막아선 적들에게 지원군이 오기 전에 성공을 가하여 그들을 분쇄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멘시코프의 휘하장교들은 각자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지만, 결론은 한번 붙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멘시코프의 부대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공도 세우지 못하고 텅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전선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본국에 있는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기고도 그리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공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크고 결정적인 놈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멘시코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저들과 브르노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손을 잡고 앞뒤로 공격하면 골치 아프니 연계를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병력을 정비하여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 하겠다.”

* * *

연합군은 라데츠키의 계획대로 재빠르게 부대를 움직여 인근의 고지대를 선점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브르노에 있는 옐라치치의 부대와 연대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들이 브르노에 전령을 보내는 것보다 먼저 러시아군이 전장에 발을 들였으니까 말이다.

“제 말이 맞지요?”

“…….”

뎀빈스키는 라데츠키에게 그가 틀렸고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며 웃었다.

하지만 라데츠키는 평소 같은 얼굴로 망원경을 들어 적진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 뎀빈스키는 현 상황을 언급하며 그를 압박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브르노에 있는 제국군과의 연계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우린 이곳에 갇혀버렸군요.”

하지만 라데츠키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말없이 망원경으로 러시아군 진영을 살펴보며 무언가를 계획 중이었다.

“이젠 죽어서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전해 듣기론 자네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인 크라쿠프 지방에서 태어나 빈 사관학교를 졸업했다지.”

그의 말은 마치 오스트리아사람인 네가 왜 폴란드에 그리도 목을 매느냐는 것처럼 들렸다.

이에 뎀빈스키는 코웃음을 쳤다.

“저는 태어나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순간도 오스트리아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나고 자란 땅이 오스트리아면 그대는 오스트리아사람이 아닌가?”

“제 몸속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는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폴란드의 것입니다.”

그의 말에 라데츠키는 망원경을 접으며 물었다.

“그동안 자네와 같은 이들을 상대하며 저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네만……. 자네의 말을 들어보니 한 가지는 확실히 이해했네.”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죽더라도 그대들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의 말에 뎀빈스키도 맞받아쳤다.

“저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렇게 둘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때, 전선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가리발디가 이 논쟁에 합류했다.

“원래 사람들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요.”

자연스레 둘 사이에 끼어든 가리발디는 턱짓으로 러시아군을 가리키며 둘을 번갈아 봤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싸우는 건 적당히 하고 러시아군부터 처리하자는 것이 가리발디의 뜻이었다.

“제가 전선을 쭉 둘러보니 아무래도 좌측에 홀로 떨어져 있는 고지 쪽의 방어선이 조금 약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그 점은 나도 인지하고 있네, 아마 공격이 시작되면 적의 집중공격을 받겠지.”

라데츠키의 말에 뎀빈스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폴란드 군단을 그곳에 배치하신 겁니까.”

“나는 우리 부대원 중에서 취약한 방어선에서 오랫동안 러시아군을 붙잡아줄 부대로 자네들을 선택한 것일세.”

라데츠키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당장 연합군 내에서 실전경험을 가진 부대는 폴란드 군단과 로마군뿐이었는데, 이 중에서 로마군은 병력이 너무 적어서 단독으로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보병들에게는 총과 제복만 쥐여주고 기병대는 목장에서 일하던 목동들로 해결하고 포병대는 사관학교의 생도들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군에게 방어선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라데츠키의 행동은 합리적이었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자면 전후에 문제가 될 폴란드 군단의 힘을 빼놓겠다는 정치적인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국가멸망의 위기에서 그들을 구해준 폴란드 왕국의 등에 칼을 꽂은 나라가 아니던가.

비록 지금은 폴란드로의 귀향을 위해 임시로 손을 잡았으나 뎀빈스키나 폴란드 군단의 처지에서는 그런 라데츠키의 행동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피는 우리만 흘려라. 이겁니까?”

하지만 라데츠키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대들만 영광을 독차지할 생각인가?”

라데츠키의 말에 뎀빈스키도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의 멋들어진 콧수염이 씰룩거리더니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도 못하시는 분이 무슨 영광을 논하십니까? 러시아 놈들은 제가 다 처리할 것이니 다 끝나면 그제야 오시지요.”

“건방지군.”

그렇게 말하는 라데츠키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 * *

보헤미아에서 러시아군과 제국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려던 무렵.

괴르게이는 산을 넘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지난 헝가리 혁명을 함께했던 장교들과 병사들이 있었다.

두 달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그는 방어선을 재조정하여 예비대를 만들었고 재소집한 방위군을 이끌고 헝가리 북부 산악지대를 넘었다.

바깥에서는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왔건만 이곳은 세월을 거스르려는 듯이 여전히 춥기만 했다.

산은 사람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찬바람을 휘몰아치며 손과 발을 얼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병사들은 대포를 밀고 보급 수레를 끌며 산을 올랐다.

병사들에게 이런 미친 짓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산 정상에서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는 괴르게이의 존재 덕분이었다.

“각하.”

“병사들의 상태는 좀 어떤가.”

“동상자도 발생하고 감기가 심해져 폐렴에 걸린 병사들도 있지만……. 다들 불평불만 없이 통제에 잘 따라주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로군.”

괴르게이는 노새에 타는 것을 거부하고 병사들과 함께 대포를 끌고 수레를 밀었으며 자신의 두꺼운 털코트도 부상병들에게 양보하는 등 솔선수범하며 산을 넘었다.

이런 솔선수범하는 그의 모습에 병사들은 그에게 믿음을 가졌고 그를 따랐다.

“이곳만 넘으면 갈리치아일세.”

“예.”

본래라면 클럽커나 가스파르를 불러와야 했지만, 그들은 괴르게이와의 합류를 거부하고 카르파티아 방어선에 남았다.

그들이 합류 요청을 거부한 표면적인 이유로는 러시아군의 동진을 막는 것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갖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선 가스파르는 괴르게이를 다시 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한 것이었고 클럽커는 분명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일 것이라 생각하여 이를 거부했다.

그렇기에 현재 괴르게이의 곁에는 스물다섯의 젊은 부관 언드라시 줄러가 함께했다.

그는 지난 혁명전쟁 시기부터 그를 따라다니며 부관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 초기에는 외교관 역할을 자처하며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얻으러 다닌 젊은이였다.

“줄러, 저기 보이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기 반짝이는 도시 말일세.”

“예, 잘 보입니다.”

“저곳이 갈라치아의 주도인 크라쿠프네.”

괴르게이가 아직 눈과 얼음이 전부 녹지 않았음에도 산맥을 넘은 이유였다.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의 방어선을 크게 우회하여 빈틈을 찔렀듯이 괴르게이도 방심한 러시아의 빈틈을 몹시 아프게 찌를 예정이었다.

그가 이런 작전을 세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선 러시아의 병력은 많았지만, 오스트리아 전선을 개전하여 무리하게 전선을 확장해 버렸고 따라서 이를 전부 커버할 병력이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전선 곳곳에 구멍이 생겼지만 당장 오스트리아는 방어에 전념하느라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여력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도 그렇게 판단했기에 굳이 전선에 생긴 구멍을 막지 않았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러시아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헝가리 방위군의 존재였다.

지난 혁명 이후에 대대적인 숙청과 탄압 대신 관용과 자비로 처벌을 피해갔던 헝가리 방위군은 겉으론 다들 무장해제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한번 전쟁을 경험한 이들이었고 언제든지 국가의 부름에 무기를 들고나와서 싸울 수 있는 예비병력이었다.

그렇기에 괴르게이는 이점을 잘 파악하여 그들을 다시 소집했고 곧 헝가리 전역에서 수만 명의 병력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렇게 병력을 확보한 괴르게이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대적인 반격작전에 들어갔다.

헝가리 북부 산악지대를 넘어 러시아령 폴란드 지역을 공격하는 것 말이다.

“그 옛날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공격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지.”

“하하, 장군께서도 카르파티아를 넘어 폴란드를 공격하셨으니 이름을 남기시겠군요.”

“내가?”

언드라시의 말에 괴르게이는 살짝 거만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수많은 업적으로 역사서에 이름을 남겼다네, 그렇잖은가?”

“아…… 예, 그렇죠.”

그의 말에 언드라시도 헛웃음을 지으며 동조했다.

괴르게이는 그런 젊은 부관과 뒤에서 덜덜 떨고 있는 병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러요시대왕의 후예이자 머저르의 영웅들이여! 이 영광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것이다! 나와 같이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의 무리를 무찌르러 가지 않겠는가!”

이윽고 산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그들은 산사태처럼 휘몰아쳐 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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