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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71화 (71/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71화

군대는 잘 먹어야 진군한다

사실 러시아의 보급문제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와 최전선인 발칸 국경까지는 직선거리로만 1,400㎞에 달했다.

그런데 현재 발칸 원정군은 국경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니……. 러시아군에게 보급이란 것은 어쩌다 한 번씩 받을 수 있는 부모님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현재 원정군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화약이었다.

식량이야 어찌어찌 인근 마을이나 도시에서 징발한다고 해도 전투에 꼭 필요한 포탄이나 탄환, 그리고 화약 같은 것은 현지에서 구하기 어려웠다.

원정초기에도 그러한 걱정 때문에 화약을 잔뜩 챙겨놓고 오스만군과의 전투에서 이를 노획하여 화약을 얼추 확보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러시아의 영웅이자 제국의 마지막 대원수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정립했던 총검 돌격 교리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투에서 필수가 되었다.

러시아의 포탄은 비싸지만 사람 목숨은 그것보단 싸게 넘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최소한의 화약이 존재했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않은가?

병사들이 아무리 용맹하다고 한들 적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내며 적진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은 그냥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압도적인 숫자로 적을 몰아붙여봤자 화약이 없다면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으음……. 일단은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지원을 받을 수는 없겠는가?”

“한번 사람을 보내보겠습니다만……. 그들이 화약을 내어준다고 해도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것입니다.”

파스케비치는 적군을 궁지로 몰아넣고도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했다.

“이런 곳에서 발목이 묶일 줄이야…….”

“최대한 저들을 독촉해 보겠습니다.”

“그래, 가능하면 빨리 좀 부탁하지.”

그렇게 러시아군은 두 달의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시에 틀어박힌 채로 주변에 병사들을 보내 현지자원을 징발했다.

러시아군이 한곳에 눌러앉아 식량과 물건을 뺏어가자 당연하게도 현지 주민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사람들은 러시아군을 이교도들의 밑에서 고통받던 자신들의 구원자로 여겼기에 그들의 징발에도 자발적으로 호응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군대가 계속해서 자신들에게 손을 벌리자 사람들은 더는 그들을 구원자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노상강도나 거지 떼 취급하는 때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러시아군의 보급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갔고 며칠 굶은 병사들의 성깔도 점점 더러워져 갔다.

“종자까지 다 가져가면 내년에 농사는 뭐로 지으라고 그러는 건가!”

“영수증 써드렸잖습니까.”

“그래서 뭐!”

“그걸 도시로 들고 가서 상인들에게 내밀며 종자를 새로 구해오면 될 것 아니오?”

“이런 종이 쪼가리로 종자를 어떻게 구하는가!”

러시아군도 나름 현지 민심을 신경 썼던지라 현지 징발 이후엔 항상 영수증을 끊어줬다.

자기들 딴에는 현지인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징발이 쉽도록 다음에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그걸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현지인들 처지에서는 러시아 놈들이 종이에 자기네들 언어로 대충 휘갈기고는 서명한 것에 불과했으니 이걸 누가 믿겠는가?

심지어 저들이 전쟁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준 영수증은 그냥 종이 쪼가리가 될 게 분명했다.

“받으라면 그냥 받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지인들의 사정.

러시아군은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며 약탈에 가까운 현지 징발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징발한 식량이 군 창고에 착착 쌓일 동안 현지인들의 불만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착착 쌓여가고 있었다.

* * *

한편 보헤미아의 러시아군과 대치 중인 라데츠키와 연합군은 사흘 동안 열 번에 가까운 전투를 벌였지만, 여전히 고지 위에는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폴란드 군단의 고지 위에도 여전히 폴란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멘시코프를 비롯한 지휘부를 무척이나 화나게 했다.

“자그마치 열 번이네! 열 번! 그동안 도대체 무얼 했기에 아직도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건가!”

열 번의 공세가 모두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면 멘시코프도 깨끗하게 단념하고 브르노를 거점으로 다시금 수도공략을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열 번의 전투 동안 러시아가 승기를 잡으려고만 하면 제국군은 화력을 집중하여 이를 밀어내거나 숨겨놓았던 예비대를 투입하여 전황을 뒤집기 일쑤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방어선이 약해 보였던 폴란드 깃발이 나부끼는 고지로 분명 병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적의 저항에 밀려 내려와야만 했다.

열 번의 공세가 모두 실패로 끝나버리자 지휘부 내에서도 빈 공격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교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각하……. 차라리 브르노로 후퇴하여 그곳을 정리하고 부대를 재정비한 뒤에 다시금 빈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정하긴 싫지만, 저들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우리가 쉽게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더는 무리입니다.”

“무의미한 희생을 늘리기보다는 후퇴하여…….”

그동안 자신만만하게 공격을 주장하던 장교들은 어느샌가 후퇴라는 말은 버릇처럼 입에 올렸고 이는 멘시코프를 분노케 했다.

“후퇴? 지금 우리가 물러날 곳이 어디 있다고 후퇴를 입에 담는 것인가!”

“각하, 현실을 보셔야 합니다.”

“현실? 말 한번 잘했네, 지금 우리가 저 고지 하나 뚫어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

멘시코프의 분노 어린 고함에 장교들이 움찔했다.

“저희라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병사들이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데, 저희가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각하께서는 그런 것도 모르시고 저희를 몰아붙이시는 것 아닙니까……?”

“이미 전장에서 능력 있는 장교들과 용맹한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멘시코프의 말에 울컥한 장교들이 나름 자기변명이랍시고 말을 늘어놓았지만, 이는 오히려 그의 화만 북돋웠다.

“그래서 뭐? 그들이 피를 흘렸음에도 왜 저 고지는 아직 저들의 것인가? 자네들은 그저 겁쟁이야! 겁쟁이에 실패자! 그리고 멍청한 패배자들이지!”

멘시코프의 격양된 말에 감정이 상한 장교가 반박하듯이 말했다.

“말씀이 조금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그래, 저 고지 하나 점령하지 못한 것은 화가 나지 않지만 내가 자네들의 실책을 꼬집는 것은 참지 못했던 모양이지? 염치없기는…….”

멘시코프의 빈정거림에도 장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저런 고지 하나 점령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 부족이 맞았으니 말이다.

장내를 휘어잡은 멘시코프는 잠시 흥분으로 인해 어지러워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후퇴는 없다!”

그러고는 다시금 장교들을 둘러봤다.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다들 그의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절대 후퇴는 없다! 이대로 적을 뚫고 나가거나 이곳에서 모두 죽는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하도록.”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멘시코프는 두려움에 떠는 장교들의 얼굴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금일 오후부터 공격을 재개하겠다. 이번에야말로 저 고리를 점령하고 적군을 섬멸하여…….”

“각하! 각하!”

멘시코프는 자신의 훈시를 끊는 부관의 등장에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그, 급보입니다!”

“조금 뒤에 보겠네.”

살짝 기분이 상했던 멘시코프는 숨을 헐떡이는 부관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부관은 품속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급한 일입니다. 각하!”

“조금 뒤에 듣겠다고 하지 않았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부관의 모습에 멘시코프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부관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각하! 지금 크라쿠프를 비롯한 폴란드 주요거점이 한 번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입니다!”

“뭐?”

부관의 말에 멘시코프의 얼굴은 흰 도화지에 물감이 떨어진 것처럼 분노에서 당혹스러움으로 순식간에 변해갔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지금 오스트리아에는 가용 가능한 병력이 없을 텐데 무슨 병력으로 어떻게 도시를 점령했다는 건가!”

“그, 그것이…….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헝가리의 깃발을 단 부대가 카르파티아 북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도시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헝가리군?”

멘시코프는 의아함을 느꼈다.

헝가리군이라니?

그가 기억하기론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 헝가리 군대는 없었다.

“보고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 아닙니다. 보고는 정확합니다!”

“그럼 자네 말은 지금 오스트리아가 몇 년 전까지 자신들과 맞서 싸웠던 헝가리인들을 군대로 끌어들였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게 보는 것이…….”

멘시코프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 부관의 말은 러시아로 따지자면 매번 반란을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는 폴란드인으로 부대를 만들어 서방국가들에 맞선다는 것과 같았다.

그건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을 떠안은 채로 일을 벌였다는 뜻이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저주 때문에 단단히 미쳐 버린 모양이로군.”

지금 멘시코프가 내릴 수 있는 답이었다.

잠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멘시코프는 이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세는 예정대로 진행한다.”

“!!!”

멘시코프는 결단을 내렸다.

“폴란드 영토가 적에게 점령당함으로써 이젠 돌아갈 길도 막혀버렸다. 이제는 정말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엔 없어.”

그는 이 상황을 오히려 호재로 봤다.

어차피 폴란드 영토는 이미 빼앗긴 뒤였다.

지금 와서 되찾으려고 해봤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차라리 퇴로를 막음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자 함이었다.

“이젠 정말 후퇴는 없…….”

“각하! 각하!”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금 전까지 격전을 치른 것으로 보이는 전령이 뛰어와 그의 앞에 볼썽사납게 자빠졌다.

전령은 자신의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는 것인지 고개를 들고는 멘시코프에게 말했다.

“오, 오스트라바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뭐?! 도대체 누구에게…….”

그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지만, 멘시코프는 이를 부정했다.

하지만 잘못될 일은 결국 잘못되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그의 불길한 상상은 곧 현실이 됐다.

“헝가리……. 헝가리군입니다!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군이 지휘하는 헝가리군이 오스트라바를 공격했습니다!”

“그, 그게 언제인가?!”

“이틀 전입니다.”

“이틀……. 이틀이라면…….”

멘시코프의 시선이 사르르 지도로 향했다.

오스트라바는 지금 부대가 있는 브르노 인근에서 불과 걸어서 사나흘 거리였다.

그렇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봤을 때, 적은 아군과 하루, 혹은 반나절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멘시코프의 부대가 있는 곳에서 하루, 반나절 거리에 있는 것은…….

* * *

“곧 브르노 인근입니다.”

“병사들은 좀 어떤가? 다들 지치진 않았겠지?”

“급속행군 때문에 병사들이 조금 지치긴 했지만 열외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다행이로군.”

언드라시의 기운찬 대답에 괴르게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도시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보헤미아 지방의 심장이자 러시아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브르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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