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73화
숨 고르기
다음 날 아침.
멘시코프는 고지 위의 폴란드군이 부산스레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혹시 저들이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 말곤 없다네.”
그렇게 멘시코프를 비롯한 러시아군은 분명 폴란드 놈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으리라 판단, 그들을 감시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짐을 싸서 고지를 내려갔음에도 좀처럼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각하, 지금이라도 저들의 뒤를 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본대와 합류하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아직 저들의 생각을 읽지 못했는데,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낭패를 보기마련이야.”
멘시코프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경마로 전 재산을 잃은 도박꾼이 죽기 전에 하는 마지막 베팅처럼 말이다…….
그의 휘하장교들은 그런 사령관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에게 이를 직언할 만큼 용감한 자는 없었다.
다들 그저 사령관이 생각을 바꾸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멍청한 루스 놈들.”
“저들이 아예 움직이질 않으니 계획이 틀어지는 게 아닌지 두렵구먼.”
“걱정하지 말게, 저들은 반드시 움직일 것이야.”
“뭐…….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렇겠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군.”
그동안 용감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병사들을 밀어 넣던 러시아군이 갑자기 겁먹은 거북이처럼 목을 집어넣고만 있었다.
그들을 유인하고자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저들이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소심하게 행동했음에도 뎀빈스키는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또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오랫동안 전장을 돌아다니며 배운 것 중 하나였다.
그는 마음에 조급함이 깃들면 몸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이 꼬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라데츠키는 고지 위에 있는 제국군의 진지에서 조용히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날 늦은 밤.
뎀빈스키가 자신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일방적으로 작전을 통보했던 것을 기억했다.
적을 크게 우회하여 포위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상당히 무모해 보였지만, 성공한다면 단번에 전세를 뒤집어놓을 수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라데츠키는 이번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엔 폴란드 군단의 병력이 너무 적었으니 말이다.
적의 허를 찌르고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그들만으로 러시아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라데츠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리발디가 물었다.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신지요.”
“저들이 입안한 작전에서 나는 가만히 적의 시선을 끌어주는 역할이었네.”
언뜻 듣기엔 폴란드 군단의 계획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렸지만 가리발디는 그가 그들의 생각을 존중해 주기에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시군요.”
“자네도 괜히 나서지 말게, 러시아 놈들은 결국엔 저 탐나는 먹잇감에 현혹되어 움직일 수밖에.”
“그럼 저희는 무얼 하면 되는 겁니까?”
라데츠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세차게 내릴 것처럼 구린 하늘에는 시꺼먼 구름만이 가득했다.
“때를 기다리세.”
* * *
브르노의 요새에 틀어박혀 러시아군과 신경전을 벌이던 옐라치치도 상황이 뭔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들이 왜들 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것인가.”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것이었으면 진즉에 했어야지, 인제 와서 요새를 공격하겠다고? 그게 더 이상하네.”
“흠……. 그렇다면 요새를 공격할만한 이유가 생겼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유가 생겼다?”
부관의 말에 옐라치치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저들이 저리 다급하게 움직일 만한 이유라면……. 중앙에서 새로이 부대를 증파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옐라치치는 다급히 지도를 펼쳤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샅샅이 훑어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상부와 연락했던 것이 언제였지?”
“어……. 이곳에 갇히기 전이니……. 대략 열흘 정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열흘……. 열흘이라면…….”
그는 지도에 손을 올리고는 주변 도시들을 둘러보며 열흘 동안 벌어졌을 일을 상상했다.
그러고는 이내 결론을 내렸다.
“브르노 인근……. 못해도 올로모츠나 오스트라바 쪽에 지원군이 당도한 모양이로군.”
“그럼 저들이 저리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도…….”
“포위당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겠지.”
그리 말한 옐라치치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지금 남아 있는 식량과 물자는 어느 정도인가.”
“식량이나 식수는 보름 치 정도가 남아 있고 군수물자로는 두어 번 전투할 정도는 됩니다.”
“그래? 그럼 배급제한을 풀고 평시처럼 배급한다면 얼마나 가겠는가?”
“……일주일 정도?”
옐라치치는 씩 웃으며 부관의 어깨를 두들겼다.
“오늘부터 병사들에게 먹을 것을 아끼지 말고 배불리 먹이면서 기운을 차리게 만들도록.”
“그 말씀은……?”
“조만간 역으로 우리가 치고 나갈 것이야. 나가서 아군과 합류하여 적을 몰아낼 것이다.”
* * *
전선의 러시아군이 빌빌거리는 덕분에 전선이 안정되고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지만, 빈의 황궁은 전혀 그러질 못했다.
“이곳이 잘못되었네, 이렇게 되면 전선으로 식량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건초더미가 갈 것이네.”
“분명 지난달에 본인이 말하길 외환 태환을 재개하고 쌓여 있던 외화로 식자재를 수입해 오라 하지 않았던가?”
“제국 내 도로공사와 철로 공사는 절대 멈춰서는 안 되네, 이게 멈춰서면 제국의 경제가 멈추어 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네.”
그중에서도 나는 사방에서 업무가 몰려드는 탓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식사는 대충 홍차 두어 잔으로 때웠고 잠은 회의 전에 의자에서 눈 좀 붙이는 것으로 해결했다.
당연하게도 주변에서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는 다들 걱정스러운 조언을 하곤 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프로이센 녀석들이 정말로 우리 등에 칼을 꽂은 것이로군.”
“예, 폐하.”
이미 이전에 저들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것은 얼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 부올 백작을 보내 이번 일을 소상히 조사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는 러시아군이 프로이센 영토를 거쳐 오스트리아 영토 내로 들어섰다는 다수의 증거자료를 들고 왔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팔았다.
그것도 독일통일을 위해서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민족국가의 설립을 위해 같은 동포의 등에 칼을 꽂는 저들의 행태가 말이다…….
“내 꼴이 참으로 우습군.”
“당장에라도 서방세계에 이 사실을 알려서 저들이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알리면? 그다음은?”
“그야…….”
서방국가들이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아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기껏 해봤자 함대를 보내어 프로이센의 해안가를 공격하고 무역로를 막는 것 정도?
그 정도로는 프로이센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건 일단 묻어둔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 공개할 때가 아닐세, 오히려 꼭꼭 숨겨두고 전쟁에 집중해야지.”
나는 공작이 내게 조언했던 것을 떠올렸다.
분노는 창고에 쌓아두는 곡식 부대처럼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필요할 때 써야 한다는 것 말이다.
“부올.”
“예, 폐하.”
“지금 중요한 것은 독일연방 내에서 우리 편과 상대편을 구분하는 것이네.”
부올 백작은 내 말이 혼란스러웠는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독일연방의 임시회의를 소집할까 해.”
“임시회의라면……. 주제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러시아와의 전쟁 결정이지.”
아무리 오스트리아 제국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하지만 나는 엄연히 독일연방의 지도자다.
그런 내가 임시회의를 연다고 하면 연방 내의 독일국가들은 무조건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참전이라……. 반대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알고 있네.”
“그중에서 편을 갈아탄 이들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 역시 알고 있네.”
지금 중요한 것은 독일연방 내에서 아직도 우리 편을 들어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여 이후의 일을 대비해야 했다.
프로이센은 비스마르크를 필두로 독일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러시아와 몰래 손을 잡은 것 역시 전쟁에 앞서 우리의 힘을 빼놓으려는 수작의 일환이겠지.
물론 우리가 러시아와 투덕거리며 국력을 소모한다고 해도 아직까진 프로이센 혼자서 우릴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난번 에르푸르트 연방처럼 주변국들을 끌어들여 우리와 대적하려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자네라면 잘 해낼 것이라 믿는 것이네.”
“폐하…….”
지난번에 영감님께 배웠던 대로 그에게 신뢰감을 드러내며 나름대로 그를 잘 다독였다.
이에 부올 백작은 감동…… 받진 않았다.
오히려 왜 그런 일을 자신에게 맡기냐는 듯이 살짝 원망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어찌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겁니까?’
[흠……. 지금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일단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게.]
결국, 보다 못한 영감님이 개입하셨다.
영감님께서는 일에 찌들어 있는 부올 백작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길.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부올, 자네가 부지런히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펠릭스 공의 자리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겠나?”
“아……!”
부올 백작은 그제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운 넘치는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폐하,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저 간악한 프로이센 녀석들의 음모를 단번에 분쇄해 버리겠습니다!”
“어, 음……. 그러게.”
단번에 기운을 차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리는 부올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감님께 물었다.
“이상하네요. 제가 한 말이나 영감님께서 한 말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데…….”
[자네는 그저 믿고 있다는 추상적인 말 몇 마디로 사람을 부리려 해서 그런 것이잖나.]
“영감님이 하라는 대로 한 건데…….”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나! 사람을 다룰 때는 신뢰를 줄 수 있는 언행과 더불어 적절한 보상을 제시하라고 했잖나!]
영감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했잖습니까?”
[도대체 조금 전에 자네가 했던 말 중에 적절한 보상이 어디 있었나?]
“제 신뢰를 받았잖습니까.”
[……?]
“???”
영감님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시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후우……. 자네는 자존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자만심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어허, 자만심이라니요. 솔직히 제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는데 한세월이 걸렸을 겁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자네가 없었더라면 러시아와 전쟁할 일도 없지 않았겠나?]
“그런 결과론적인 말은 삼가십시오.”
[조금 전에 자네가 했던 말이잖나.]
“어허, 황제는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어휴……. 앓느니 죽지.]
말은 그리하셨지만, 영감님은 웃고 계셨다.
“그나저나…….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일을 잘 헤쳐나갔지만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공작의 일 때문인가?]
“예, 뭐……. 그것도 있지요.”
내 옆에서 여러 업무를 도와주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과로로 쓰러졌다.
그 탓에 공작이 담당하던 여러 행정업무와 외교업무가 전부 멈추어 서버리는 바람에 내가 더 바빠졌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식사다운 식사와 하루 3시간 정도는 눈을 붙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안 되었으니 말은 다 한 셈이다.
[그동안 자네가 공작을 너무 부려먹은 탓이지.]
“으음……. 할 말이 없군요.”
영감님의 말대로였다.
지금 제국 내에서 공작처럼 다방면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작에게 업무가 몰릴 수밖에 없었는데……. 당연하게도 이런 방식은 나이가 적지 않은 공작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공작 역시 자신의 후임을 기르고자 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의 후임이라고 할 수 있는 부올이나 브루크, 바흐 등의 인물은 각자 한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공작처럼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전시내각이 삐걱거리면서도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공작의 희생 덕분이었는데, 그가 쓰러져 버렸으니 그를 대신할 인재를 찾아야 했다.
“쓰읍……. 이를 어쩐다.”
다만 문제는 그를 대신할 만한 인재가 없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영감님이 해결해 주셨다.
[그럼 그 친구를 한번 써보게.]
“누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