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75화
승천
“후방을 사수하던 폴란드군이 적의 강습에 무너지고 중군은 통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렇군.”
고지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라데츠키는 전황이 아무리 불리함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예비대로 남겨둔 3연대를 투입하여 병사들을 구원하고 제23 기병연대를 파견하여 폴란드 군단을 구원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군.”
“각하, 그렇게 되면 부대에 남아 있는 기병대가 없어 적의 기습에 대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휘부는 고지에 위치하였으니 적의 접근을 알아채고 이를 막는 데는 그리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관은 라데츠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여 말한 것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라데츠키는 그런 부관을 꾸짖었다.
“지금 나 한 명의 안전보다는 전선에 있는 병사들의 무사 귀환이 더 중요하네!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패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적과 맞서려면 이 늙은이보다는 저들이 더 필요함을 모르는가!”
“……실언이었습니다.”
“그럼 가서 병사들을 구하게.”
“예, 각하…….”
라데츠키는 전황의 불리함으로 인해 지휘부의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음을 깨달았다.
‘다들 너무 기운이 없어 보이는군. 이대로라면 잘 될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라데츠키는 아흔 살에 가까운 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기운 넘치는 목소리로 장교들을 꾸짖었다.
“지금 전선의 병사들은 제 한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거늘 그대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무얼 하는 건가!”
“하지만 각하…….”
“무릇 장교란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이를 해결하여 병사들을 승리로 이끌어주는 존재이지 않은가!”
그의 준엄한 꾸짖음에 장교들의 시선은 라데츠키에게로 향했다.
“그러므로 장교란! 그 어떠한 어려움에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고난에도 굴하지 않으며 폭풍 속에서도 깃발을 짊어지고 전선으로 향해야 한다!”
그리 말한 라데츠키는 있는 힘껏 테이블을 내리치며 장교들의 느슨해진 긴장의 끈을 다시금 팽팽하게 잡아당겨 줬다.
“묻겠다! 그대들은 군인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대들은 수백, 수천의 병사들 앞에서 그들을 이끄는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어느샌가 장교들의 시들시들해진 두 눈에 총기가 돌아오고 그들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졌다.
다시금 장교들이 생기를 되찾자 라데츠키는 곧장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흩어진 병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도록.”
“예, 각하!”
몇 마디 말로 장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리했던 전황이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선의 아군은 적들에게 밀려나는 중이었고 전열은 무너진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전부 포기하고 백기를 들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라데츠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장교들의 멘탈을 붙잡아서 그들이 다시금 정신을 차리게 했고 무너져내린 병사들을 수습하여 다시금 전선으로 보냈다.
말로는 무척이나 쉬워 보이는 일이었지만 이미 공포에 잠식된 이들을 붙들어 다시금 전장으로 보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데츠키는 이를 해냈다.
그는 두려움에 빠져 도망치는 이들의 발을 붙잡아 용기를 북돋아 줬고 다시금 전선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정된 패배를 조금 뒤로 미루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가용 가능한 예비대는 이미 모두 소모되었고 상당수의 병력이 통제를 지휘부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각하, 이제라도 몸을 피하심이…….”
“아직 적진에 남아 있는 부대가 있잖나.”
“예? 아군부대는 대부분 철수했습니다.”
부관의 말에 라데츠키는 말없이 자그마한 마을에 걸려 있는 폴란드 깃발을 가리켰다.
그러자 부관이 화들짝 놀라고 말하길.
“저들은 러시아군에 포위되어 있잖습니까? 그리고 폴란드군은 제 역할을 다했으니…….”
“폐하께서는 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최선을 다하신다고 했네, 그러니 나 역시 신하 된 도리로 그분의 뜻을 끝까지 따라야지.”
“각하…….”
라데츠키는 최후의 방어선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지휘부에 남았다.
* * *
시계를 잠시 뒤로 돌려 전투가 한창이던 점심쯤.
멘시코프는 급한 보고를 받았다.
“각하! 각하! 브르노에 주둔 중인 아군이 적의 공격을 받아 도시가 함락당하기 직전입니다!”
“요새 안의 적이 밖으로 나온 건가?”
“예, 하지만 그들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적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외부의 지원군?”
순간 멘시코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지금 전령이 말하는 외부의 지원군은 얼마 전에 올로모츠를 공격했다는 헝가리군임이 분명했다.
그들이 브르노까지 왔다는 것은 조만간인 곳으로 들이닥친다는 뜻이기도 했다.
“…….”
“각하…….”
“이대로 가면…….”
“적에게 포위당할 텐데…….”
다들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아 보였지만 속 시원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멘시코프의 눈치만 살폈다.
그들이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봤자 사령관이 전선 사수를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전황이 러시아군에게 기울어 있었지만 언제든지 적이 들이닥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적군이 후방에서 나타난다면 간신히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가 확 꺾이면서 전황이 기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병사를 뒤로 물리기엔 지금 전황이 너무나도 유리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제국군을 박살 내고 빈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만 같은 상황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지원군 때문에 병력을 물리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금 아군의 현황은 어찌 되는가.”
“자세한 상황은 보고받지 못했지만……. 그간 보고받은 내용을 추려보면…….”
멘시코프는 전선 곳곳에 흩어져 적과 교전 중인 아군의 현황을 보고받으며 고민에 잠겼다.
‘조금만……. 앞으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되는데…….’
전투 초반 아군의 전선을 들쑤시던 폴란드군과 정체불명의 군대는 이제 그 힘을 다하고 밀려나는 중이었고 제국군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물론 폴란드군이 후방에 남아 추격을 저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이 오래가진 못할 것이었다.
이것저것 따져보며 승패를 가늠하던 멘시코프는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밤이 되거나 적의 지원군이 오겠군.”
어차피 물러나기엔 너무 늦었다.
지금 물러나서 병력을 정비한다고 하더라도 뒤이어 들어올 적의 지원군과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승기를 굳히고 적군을 맞이하는 것이 옳았다.
“번복은 없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적과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멘시코프는 결단을 내렸다.
적의 지원군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오스트리아군을 분쇄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남아 있는 전력을 총동원하여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붙였다.
숫자가 적었던 적들은 아군의 반격을 견디지 못하고 대열이 무너졌고 오스트리아군의 후위를 지키던 폴란드군 역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멘시코프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태양이 점점 서쪽으로 기울수록 전황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폴란드군은 이름 모를 마을에 갇혀버렸고 오스트리아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며 수많은 전리품을 길바닥에 내던지고 있었다.
적군의 진형은 무너졌고 질서 없이 후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멘시코프는 무릎을 ‘탁’ 치면서 기쁨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됐어! 우리가 이겼다!”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오스트리아는 위대한 조국 러시아의 발아래 무릎 꿇을 것이고 자신은 러시아의 영웅이 되어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각하! 각하!”
“벌써 적 지휘관이 항복한 것인가? 오스트리아 놈들도 생각보다 오래 버텼…….”
전령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적의 지원군이 곧 전장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뭐?”
멘시코프는 급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전령에게 되물었다.
“지원군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지원군을 말하는 건가?”
“제국군을 말하는 겁니다…….”
“…….”
멘시코프는 두 손을 얼굴에 대고선 소리죽여 고함을 내질렀다.
앞으로 두 시간……. 아니, 한 시간만 있으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몇 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적들은 무너져 내릴 것이고 자신은 승리자가 되어 빈에 입성할 것이었다.
그런데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적의 지원군이라니!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가슴속의 울분을 담아 소리쳤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단 말이다!!”
* * *
괴르게이는 언덕에 올랐다.
그리고 전장을 내려다봤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며 새하얀 화약 연기가 피어오르며 들판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전장을 쓱 둘러봤다.
“아군이 불리하군.”
“지휘소에 적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선 그쪽을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옐라치치의 말에 괴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전장 한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로 향했다.
“자네는 그리하게, 나는 저들을 돕지.”
“저들이라면…….”
옐라치치는 괴르게이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마을 한가운데 내걸린 깃발을 봤다.
붉은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는 깃발.
그건 폴란드의 것이었다.
“……저건 폴란드 군단인 것 같은데, 저들이 왜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
괴르게이는 그 말만을 남긴 채로 전장을 내달렸다.
그러자 수천의 기병대가 그의 뒤를 따르며 함께 전장을 가로질렀다.
갑작스레 나타난 기병대의 모습에 보급과 재편성을 위해 본대로 돌아가던 러시아군은 그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겁에 질린 채로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치기 바빴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나고 뒤이어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깃발을 단 제국군이 나타나자 병사들은 물론이요. 그들을 통제해야 할 장교들까지 술렁거렸다.
“저건……. 아군인가?”
“멍청아! 여긴 적진 한가운데잖아!”
“아, 그럼 적군인가……?”
“…….”
병사들은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장교들이 가자고 하면 움직였고 멈추라고 하면 멈췄을 뿐이다.
하지만 전투가 몇 시간 동안 이어지며 아군이 계속해서 죽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며 이 싸움이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적군이 등장했다?
병사들은 알게 모르게 슬그머니 도망쳤다.
여기 더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동하거나 잠시 멈추기만 하면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들을 붙잡으려 하면 다른 병사들이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몇몇 장교들은 이전에 했던 대로 도망치는 이들에게 총까지 쐈지만, 어차피 도망가다 총 맞으나 가만있다 총 맞으나 죽는 것은 비슷했기에 사기가 바닥을 뚫고 땅속에 잠든 티라노사우루스와 인사할 정도였던 병사들은 계속해서 도망쳤다.
물론 도망치는 병력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그리 많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전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리고 헝가리군과 교전하는 부대가 늘어날수록 그 숫자는 눈덩이 굴러가듯이 늘어났다.
괴르게이가 전선을 휘저으며 러시아군을 혼란케 했고 그 뒤를 언드라시의 부대가 받쳐주며 적은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장교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로 돌격이나 후퇴만 외쳤고 명령이 갈리니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지휘부에서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멘시코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습 가능한 병력을 챙겨 전장을 벗어난다.”
하지만 더는 그의 휘하에 병사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