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76화
자유?
보헤미아의 어느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서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던 폴란드 군단은 갑작스러운 헝가리인들의 도움에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는 뎀빈스키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헨리크.”
“……오랜만이군. 괴르게이.”
헝가리 혁명 이후 오랜만에 재회하는 것이었으나 서로 그렇게까지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지못해 인사하는 것에 가까웠다.
“으음……. 자네가 이곳까지는 무슨 일인가?”
“헝가리의 친구들이 어려움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
뎀빈스키 괴르게이의 성격을 잘 알았다.
언제나 제 잘난 맛에 살며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이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성격 말이다.
그런 괴르게이가 저렇게까지 말했다는 것은 정말 자신들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허, 참으로 고맙군.”
하지만 그렇다고 뎀빈스키의 입에서 좋은 말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그와 괴르게이의 사이는 지난 헝가리 혁명 당시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외국인이 사령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괴르게이가 대놓고 뎀빈스키의 명령을 무시한다거나 공공연하게 그를 깔보는 행동을 자주 하였기에 그런 것이었다.
덕분에 정말 화가 난 뎀빈스키가 그를 총살하려고 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전투가 급하니 끝나고 뵙겠습니다.”
“크흠…….”
괴르게이는 늘 그렇듯이 자신의 할 말만 하고는 말을 달려 다시금 전장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있던 벰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친구로군.”
“앞으로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세상일이라는 게 참으로 모를 일이야.”
“동감하는 바네.”
뎀빈스키는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을 돌아보며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하루 다들 고생 많았다. 지원군이 제때 온 덕분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구나.”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내팽개치고는 가보처럼 아끼던 기병도를 뽑아 들었다.
“나는 지금부터 루스 놈들을 사냥하러 갈 것이다. 쉬고 싶은 녀석들은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하지만 나를 따르고 싶은 녀석들은 내 뒤를 따르라.”
그렇게 짧은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말에 올랐다.
“오늘은 피와 영광의 날이로다!”
그의 선창에 병사들이 따라불렀다.
“또한, 부활의 날이로다!”
폴란드 군단은 그들의 깃발을 높이 들고 더욱 큰 목소리로 폴란드의 노래를 불렀다.
“하얀 독수리는 프랑크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네!”
백마에 올라탄 뎀빈스키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머리 위로 검을 들었다.
그는 곳곳에서 뿌옇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전장에서 저녁노을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의 앞에는 마을로 도망쳐오며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우들의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
그 모습에 누구 하나 잠시 멈춰서서 전우의 시신을 수습해줄 법도 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더욱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장송곡을 부르듯이 말이다.
곳곳에서 포성과 총성,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오는 와중이었음에도 폴란드 군단의 목소리는 전장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들릴 정도였다.
* * *
전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패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쓰라린 상처를 핥으며 도망쳐야 했다.
거기에 헝가리군의 추격을 받으며 추가적인 피해를 본 러시아군은 완전히 공중분해 돼버렸고 사령관인 멘시코프는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
오스트리아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만큼 피해도 큰 승리였다.
라데츠키는 적의 공세를 꺾는다는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투에서 너무 큰 피해를 보았다.
그의 휘하에 있던 부대 중 폴란드 군단은 부대 정원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오스트리아군은 그보다 더한 피해를 냈다.
사실상 부대가 와해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덕분에 현장의 분위기도 침통하였는데, 빈에서 이걸 보고받는 상층부의 반응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예상보다 피해가 크군.”
“아무래도 급하게 끌어모은 병력을 동원하여 생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막았으면 된 것이지…….”
러시아군을 막지 못했다면 수도가 적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전투에서 발생한 피해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였다.
애꿎은 시민들이 죽고 여러 기반시설과 공장들이 박살 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영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결국엔 군인들도 산업발전을 위해 일해야 할 노동자이자 일꾼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한시름 덜었군.”
“그렇습니다. 지금 러시아는 무리하게 전선을 넓혀놓은지라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마땅치 않을 것입니다.”
바흐 남작은 승리 소식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 그냥 잠깐이라도 여유가 생겨 그런 것인가?
“그렇겠지.”
“폐하, 지금이 기회입니다.”
“기회?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것인가.”
바흐 남작은 그 어느 때보다 상기된 얼굴과 과장된 몸짓, 그리고 흥분한 어조로 내게 말하길.
“폴란드말입니다. 폐하께서 폴란드 군단을 끌어들이신 것도 폴란드를 우리 영향권에 두기 위함이 아닙니까?”
“?”
그냥 군대가 필요해서 온갖 감언이설로 급하게 용병으로 끌어온 것이었다.
“거기에 로마공화국을 끌어들이신 것 역시 저들 역시 서쪽의 사르데냐를 견제하시며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에 가해지는 부담을 덜기 위함이시지요!”
그것 역시 노리고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을 그런 이유로 지원한 것은 맞았지만 지금 로마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그냥 상황이 매우 급하여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바흐 남작은 잠시라도 이렇게 일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인지 아니면 그냥 흥분한 것인지는 몰라도 목소리를 높이며 내게 말하길.
“그러니 감히 폐하의 뜻을 살펴보건대……. 폐하께서는 러시아가 집어삼킨 폴란드의 영토를 탐내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건 아니…….”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
영감님의 말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지금 폴란드를 먹으면 러시아의 차르가 아주 좋아서 죽으려고 할 텐데요?’
[그게 무슨 뜻인가? 우리가 폴란드를 뺏어가면 러시아의 황제가 좋아한다니?]
‘……반어법입니다.’
[쯧쯧쯧……. 자네는 말장난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가?]
‘제 말은 우리가 폴란드를 먹으면 러시아의 큰 반감을 살 것인데, 그럼 전후에 국방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전후에 러시아와 험악해진 분위기를 풀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만 하더라도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않으면 그들로 인해 국방에 대한 압박이 심해질 것이니 말이다.
[이미 러시아와 우리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셈일세, 그럼 어찌해야겠나? 기회가 왔을 때 저들의 힘을 빼놓아야지.]
영감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이번에 러시아와 전쟁이 벌어진 것도 우리가 저들에게 도움을 받았음에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것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말인즉.
어차피 러시아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영감님은 폴란드를 먹어치워서 저들의 힘을 줄이고……. 우리의 덩치를 키우라는 겁니까?’
[반은 맞고 반은 아닐세.]
‘흠……. 그럼 폴란드를 직접 합병하기보다는 새롭게 독립시키는 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것일세.]
영감님의 제안은 이러했다.
어차피 폴란드 군단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 이상 우리가 저들을 위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가장 바라마지않는 폴란드의 독립을 이뤄주되……. 그들을 우리의 영향권 아래에 넣자는 말이었다.
[내 동생 막시밀리안과 작센의 공주를 맺어주어 폴란드의 왕으로 앉히는 것을 추천하네.]
‘잠깐만요……. 작센의 공주는 왜 나옵니까?’
[이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직계혈통이 작센왕가를 따라서 내려왔으니 명분상으로 막시밀리안을 그쪽과 맺어줘서 폴란드 왕으로 앉히는 것이지.]
그 후에 영감님은 폴란드 왕계혈통과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연계나 가문 간의 결합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셨지만, 그중에서 내가 알아들을 만한 것은 저게 전부였다.
‘그, 그렇군요.’
[그러니 막시밀리안을 폴란드 왕으로 즉위시키면 추후에 폴란드 왕위는 자네에게 넘어올 것이네.]
‘예? 그게 왜 제게로 넘어옵니까?’
[그야 막시밀리안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니까 그런 것이지……. 자네 혹시 몰랐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영감님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영감님……. 그 애가 이제야 열아홉쯤 먹었는데, 벌써 그……. 아랫도리를 못 쓴다고요?’
내 질문에 영감님도 조금 당황하셨다.
[……생각해보니 그렇군.]
‘그래도 막시밀리안에게 폴란드 왕위를 준다는 것 자체는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전후 러시아 놈들은 이를 갈면서 복수를 다짐할 것이고 그 대상은 멀리 있는 영국과 프랑스보다 우리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우리를 대신하여 분노를 대신 받아줄 만한 국가가 필요했는데, 폴란드 왕국이 부활한다면 저들의 화살이 그쪽으로 향할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에게는 조금 미안해지는군요.’
[그런 놈에게 뭐가 미안한가? 괜히 신대륙에서 왕 하겠다고 설치다가 객사할 바에는 가까운 폴란드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야.]
‘잠깐만요……. 신대륙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내 물음에 영감님은 아차 하며 말을 돌리셨다.
[크흠……. 실언이었네, 신경 쓰지 말게.]
뭔가 굉장히 수상했지만, 영감님께서 말씀하길 꺼리시는데 굳이 물어볼 이유는 없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고는 기대된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바흐 남작의 앞에서 잠시 고민하는 척 말했다.
“폴란드라…….”
“폐하, 지난 폴란드 분할 당시에 러시아는 제일 많은 영토를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그중 일부라도 떼어올 수 있다면 제국에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흠……. 그렇게 되면 러시아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내 물음에 바흐 남작이 움찔하더니 이내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때로는 결단이 필요한 법입니다.”
얼굴만 보면 전쟁터로 나가는 장군과도 같았지만, 현실은 내 옆에서 눈이 터지라고 서류를 들여다보며 인장을 찍는 신세였다.
“그럼 차라리 폴란드를 독립시키는 것은 어떤가.”
“독립 말입니까?”
“그래, 폴란드 왕가 핏줄을 잇고 있는 여인과 막시밀리안 대공이나 카를 대공을 맺어주어 왕국을 부활시키는 것이지.”
내 말에 남작은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폐하께서는 폴란드의 영토가 아니라 폴란드인의 충성을 바라시는 겁니까?”
“충성? 하하하, 이보게 바흐.”
“예, 폐하.”
“그들이 내게 충성을 바친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그저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이네.”
“이용이라고 하시면…….”
제국은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격류 속에서 호시탐탐 우리의 이권을 노리는 사냥꾼들에게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선 우리도 사냥꾼이 되어야 했다.
지금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서방과 손을 잡고 러시아라는 커다란 불곰을 사냥하고 있지만, 이후에는 프로이센의 들개들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마침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큰 적개심을 가진 사냥개가 내 앞으로 걸어들어왔다.
“뭐……. 자세한 건 다음에 설명해 주지.”